노보살 건넨 보시… 순례 진행 원동력

습하고 어두운 대사당 나와서
장애인 화장실서 잠을 청했다
선잠으로 피곤한 몸으로 순례
마당 한켠 내준 노보살에 감동
오셋타이 받고 그 힘으로 걸어

44번 사찰로 향하는 고개인 ‘노소도게’ 고갯길로 향하는 시골길.

여느 때와는 다르게 조금 불편한 밤을 보냈다. 당초에 잠자리로 삼았던 대사당이 꽤나 불편해서 야밤에 잠자리를 옮긴 탓이다. 오후 늦게 순례자들에게 들은 정보를 따라 대사당을 관리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서 열쇠를 받았다. 식당 사장님의 알려준 길을 따라 도착한 대사당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듣기로는 대사당 뒤로 넒은 방이 연결 되어 있고, 그곳에 순례자들이 잘 수 있도록 이부자리가 있으며 대여섯 사람은 너끈히 잘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라고 했다. 그러나 도착한 대사당은 내가 생각했던 그런 편안한 장소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습하고 어두컴컴한 대사당은 꽤 오랫동안 아무도 찾지 않은 듯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고, 불단에는 번들거리는 페인트로 칠을 한 코보대사상이 꽤 흉흉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일단 전기를 켜려고 하는데 아무리 스위치를 올렸다 내려도 불이 들어오질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밖의 전기 계량기를 보는데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 가고 있었다.

비상용 손전등을 켜고 대사당 뒤로 이어져있다는 방으로 들어가 보려는데 복도가 움푹 파여 있고, 마룻바닥도 흔들거리는 게 뭔가 불안했다. 일단 환기를 할 겸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잠시 마루에 있으려니 식당 사장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오셨다.

“순례자님, 어떤가요? 한 일주일간 아무도 이곳에서 묵질 않아서 제대로 살피질 못했어요.”
“아, 그렇군요. 여기저기 조금 이상한 곳이 있긴 해요.”

전기가 안 들어오는 점이나, 숙소인 방으로 가는 길이 이상한 점 등을 말했더니 사장님이 몇 가지 점검을 해본다. 사장님 말론 여기의 전기와 밖의 가로등의 전원이 같은데 대사당만 불이 안 들어오는 걸 보니 어딘가 선이 나가서 누전이 되는 것 같단다.

“아차! 저 복도의 마루가 빠져서 방을 못 쓴다는 말을 제가 깜빡했군요.”
대사당을 지은 지 오래되어 이곳저곳 손볼 곳이 많은데, 지난 장마로 결국 연결 복도 바닥과 마루 여기저기가 빠져 버렸단다. 결국 사장님이 알려준 잘 수 있는 공간은 불단 앞의 마루 정도였다. 열쇠는 내일 아침 식당 우체통에 넣어달라고 부탁받았다.

사장님이 떠나가고 순례자들이 남긴 방명록을 훑어본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흉흉한 분위기에 대해서 말들을 남겨뒀다. 심지어 마루사이에서 지네가 나왔으니 조심하라는 충고도 있었다. 이 곳에 묵어도 될까하고 고민하는 사이 어느덧 해가 져버렸다.

음산한 대사당을 피해 피신한 공중화장실. 장애인 화장실 노숙은 가장 마지막 선택이다.

촛불에 의지해 저녁예불을 모시고 누워 자려는데 천정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쥐인가 했는데, 쥐라고 하기엔 무게감이 있는 소리가 났다. 무엇인가 산짐승이 들어온 듯, 한 마리도 아닌 모양이었다. 곧 잠잠해 지겠거니 하곤 잠을 청하고 있는데 쿵하곤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잠이 달아났다. 벌떡 일어나서 근처의 다른 잘만한 곳이 있나 하고 생각해보니 마을 안에 있는 휴게소가 생각났다. 바로 짐을 다시 싸서 대사당을 나와 버렸다. 대사당 열쇠는 휴게소로 가는 길에 식당 우체통에 일찌감치 넣어두었다.

마을 안의 휴게소에는 이미 다른 순례자 두 명이 잠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낮에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잘만한 곳 중에 젖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내가 서성이는 소리에 눈을 떳는지 한 순례자가 몸을 일으켜 화장실 쪽으로 가보라고 한다.

“화장실은 밤새 불이 켜져 있어서 눈이 부실 수 도 있어요. 우린 밝으면 잠이 안와서 여기로 자릴 잡았는데, 괜찮으면 가 봐요.”

어둠 속에 알 수 없는 산짐승을 경계하며 잘 바에야 불빛에 잠을 설치는 게 낫겠다 싶어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 통로에 자리를 깔까 하다가 아스팔트 바닥에서 오는 냉기와 산속의 한기를 버틸 재간이 없어 결국 장애인용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실 노숙 순례자들에게 장애인용 화장실은 가장 매력적인 노숙 장소중 하나다. 수도, 화장실, 전기, 안전성까지 어느 하나 뺄 것 없는 장소지만 꼭 필요한 분들이 급하게 쓸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에 가능한 지양해야하는 장소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잠자리를 꾸렸다. 다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두고 잠에 들었다. 

그렇게 선잠을 자고 일어나니 몸이 영 말이 아니었다. 아침을 먹자니 입맛도 없고 뻔한 미숫가루가 조금 물리기도 해서 일단 걷다가 허기지면 먹을 요량으로 그냥 걷기로 한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배낭을 짊어 멘다. 다른 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아마 기분 탓이겠거니 하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늘 날씨가 맑다는 것이다.

그렇게 5km 가량을 걸었을까, 슬슬 배가 고파서 못 걷겠다 싶어서 어딘가 앉아서 미숫가루를 먹으려 하는데 앉을 만한 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어제 종일 비가 온 탓이었다. 일단 갈 때까지 가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그냥 길 바닥에서 먹을 요량으로 나아간다.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마침 화단을 돌보고 계시던 할머니가 인사를 하신다.

“순례자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셋타이 할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침밥으로 오셋타이를 받은 캔커피와 빵. 현지인들의 보시는 순례에 원동력이다.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가셔서는 캔커피를 하나 가져왔다.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잠깐 앉아 쉴 수 있을지 여쭈어 보고 그 집 계단참에 배낭을 풀고 나서 잠시 앉았다.

“순례자님 보니까 노숙하시는 분 같은데, 아침을 드셨나요?”
“아니요, 이제 뭐라도 좀 먹을까 하고 있습니다.”
“먹을 걸 가지고 계세요?”
“네, 미숫가루가 있어서요. 이제 간단하게 먹으려고 합니다.”
“어머나! 그걸로 밥이 되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할머니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빵을 가져 오셨다. 할머니는 조금만 빨리 왔어도 밥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지만 시장이 반찬인 나에겐 그 어떤 식사보다도 훌륭한 아침이 됐다.

훌륭한 오셋타이 덕에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길을 걸어간다. 44번 다이호지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두 갈래인데 조금 가팔라도 거리가 짧은 산 고개를 넘어 가기로 한다. 노소도게(農祖峠)고개를 넘어가면 곧 44번 사찰과 이어지는 국도와 만나고, 국도를 조금 올라가면 곧 사찰에 도착한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점심 전에 도착할 듯하다. 이리 되면 45번 사찰까지도 넉넉하게 노려 볼 수 있다.

45번 사찰이 산속 깊은 곳에 있는데다가, 46번으로 가기 위해선 들어간 길을 다시 밟고 나와야 한다. 왕복길이 거의 16km나 되다 보니 심적으로 부담이 꽤 크다. 그래도 44번에 빨리 도착 할 테니 45번까지 다녀오면 딱 하루 길이 되겠구나 하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노소도게는 4km 남짓한 고갯길로 포장이 되어 있진 않지만, 농가에서 길을 정리해 두어서 트럭한대는 너끈히 다닐 수 있게 편한 길이다. 다만 산 고개를 넘어 가는 길이라 조금 가파른 것은 사실이다. 국도를 타고 계속해서 걸어가다 현도로 빠지고, 다시 조금 거슬러 올라가다 산길로 접어든다. 다행히 알기 쉽게 이정표와 순례길 안내가 여기 저기 붙어 있어 염려는 없어 보였다.

노소도게길에 본격적으로 접어들자 거친 자갈길이 나타났다. 그래도 ‘이정도 길이라면 가팔라도 문제없지’ 하곤 조금 부주의하게 걸은 탓일까? 시코쿠 순례 중 가장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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