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 고개 넘어 새로운 나를 찾다

조계종 교육부장 진광 스님은 지난 822일부터 95일까지 조계종 해외연수 순례 일환으로 영진 스님과 함께하는 티베트 수미산 순례를 다녀왔다. 진광 스님은 80여 스님과 함께 했던 여정을 서간문 형식으로 보내왔다. 이에 본지는 스님의 순례 서간문을 인터넷에 순차적으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수미산 전경. 올라가는 길은 고행이지만 새로운 나를 만날 수 있다.

카일라스 코라 순례길 둘째 날 입니다. 새벽 3시에 소변을 보기 위해 손전등을 들고 100m 떨어진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문득 무심코 바라 본 카일라스 북면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영롱한 별들의 향연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태고의 신비인양 압도적인 경외와 숭고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인도 순례자들은 이미 일어나 정좌한 채 만트라 등을 외우며 시바신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중입니다. 카일라스가 시바신의 상징인 우람한 링가를 닮았기 때문인가 봅니다. 나도 자리를 잡고 정좌한 채 하염없이 웅혼한 수미산 북면과 그 주위의 수많은 별들의 향연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안에 온전히 카일라스의 형상과 마음을 오롯이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카일라스 빙하가 녹아내린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키고는 그 신성한 물로 온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니 새로 태어난 느낌입니다.

뒤편 언덕의 전망대에 올라 카일라스에게 짜시달레, 강린포체하고 모닝콜을 하고는 내려와 시내 건너편의 디라푹 사원을 다녀왔습니다. 이 사원은 13세기에 세워진 카규파 절로 문화대혁명 때에 파괴된 것을 1986년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원의 사원마저 파괴한 인간의 무지와 사상의 잔혹함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상과 이념도 광풍도 종교의 자비와 진리를 이길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아침, 수미산 순례를 출발하기 전에 갑자기 대중공사가 열렸습니다. 하산할 것인지 아니면 순례를 계속할 것인지를 묻는 대중공사였습니다. 갑론을박 끝에 대중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하산할 11명은 내려 보내고 나머지 인원은 4개조로 다시 나누고 조장을 선임해 순례를 계속하기로 하였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악마의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임자로서 순례를 계속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은 대중 스님들의 신심과 원력, 그리고 힘과 지혜에 의지할 따름입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삼보와 대중을 믿고 다만 가고 또한 갈 따름입니다.

카일라스를 바라보며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하고는 다시 둘째 날의 코라 순례길에 오르는 대중 스님들의 굳은 의지와 염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카일라스 코라에서 둘째 날의 코스가 가장 힘들고 험난하며 가장 긴 여정입니다. 계속되는 오르막 너덜 길로 고도를 430m 높이며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특히 해발 5,640m의 가파른 깔딱고개인 돌마라 패스는 이번 코라의 최대 고비이자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초모랑마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 보다는 4백미터가 높고 백두산보다 두배 이상 높은 고지인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서 카일라스의 검은 몸체가 온몸을 드러낸 채 아침 햇살에 황금빛을 발하며 온 산하를 내리 비치고 있습니다. 만년설의 카일라스는 그렇게 아침햇살을 받아 영롱한 무지개 색으로 세상을 밝히며 신의 거처다운 아름답고 신비한 자태로 저만치 우뚝 솟아 자리합니다. 마치 죽순이 얼은 땅을 뚫고 솟아오른 듯 군더더기 없이 검은 금강석 같은 적벽의 외기둥 봉우리가 온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에게 마치 다 잘 될 것이네! 그르쳐 가지 말게나라고 속삭이는 듯 합니다.

시작부터 숨이 턱 막히는 오르막길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주위 풍광은 검은 빛의 기암괴석 봉우리와 안개구름, 은빛 빙하가 어우러져 영산다운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티베트의 강한 햇빛과 바람, 티끌 하나 없는 카일라스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세속에 찌든 영혼의 때를 한 꺼풀씩 벗겨내는 듯 합니다. 숨이 턱에 차는 듯한 고통 속에 모든 것을 내려 놓은채 그저 타성에 의해 무심코 발을 내 딛습니다. 부족한 산소만큼이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면서 어느 사이에 무념무상의 상태가 됩니다.

첩첩이 겹쳐있는 산마루를 4~5번 돌아서 조장터를 지나니 제법 높은 고갯마루 정상에 타르초가 펄럭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 주위에는 순례객들이 평생 지은 업보와 함께 나마저 버린다는 의미로 돌탑을 쌓고 그 위에 번뇌의 상징인 듯 모자와 목도리, 그리고 손수건과 양말까지 온갖 것들을 남겨놓고 갔습니다. 이른바 나를 죽이고 새로 태어난다는 해탈의 고개입니다. 그리고는 새로운 나, 보다 나은 내세의 삶을 간구하며 돌마라 고개로 향합니다.

순례길이 오른쪽으로 꺾이며 가파른 고바위 너덜 길이 저 멀리 높은 봉우리 등성이로 이어집니다. 그 곳이 바로 돌마라 고개 정상인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육체적 한계와 절대고독 비슷한 상황에 직면한 채 내가 할 수가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렇게 한번 걷고 심호흡 한번 하고, 두 걸음 떼고 걷는 식으로 고통스럽고 험난한 발걸음으로 한발 한발 조금씩 돌마라 고개를 오릅니다. 숨쉬기가 힘들고 다리 힘이 풀리면서 그냥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가 어느 임계점을 지나 극한에 다다르면 고통의 감각이 무뎌지며 점차 사라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바로 앞의 땅만 바라보며 걷고 또한 걸을 따름입니다.

내 앞에 걸어가는 한 비구니 스님은 정말 아주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씩 내 딛는데 그리 편하고 가벼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무척이나 힘들어 보이고 곧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말입니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그 순간 화두를 든 채 참선하듯이 일념으로 걸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비구니 스님의 발걸음에서 참 많은 것들을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고마움에 스님의 운동화에라도 온 몸을 던져 오체투지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수미산 순례를 진행 중인 순례단 스님들.

천근만근의 마지막 한 발자국을 힘겹게 딛으며 드디어 돌마라 고개 정상에 올랐습니다. 맨 먼저 정상 대부분을 뒤 덮고 있는 오색의 타르초와 돌탑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뿐 숨을 내 쉬며 한참을 그냥 멍하니 선채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마치 천상의 정원에 초대받아 온 듯한 기분입니다. 그 누구도 아무나 올 수가 없는 그런 신성한 신들의 정원에 말입니다. 그곳에 오르면 누군가를 위해 음성공양을 하겠다던 법련사 주지 진경스님의 찬불가 음성공양에 감동과 환희의 눈물이 저절로 흐릅니다. 아니 이곳에 주저앉아 그대로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그런 심정입니다. 그러다 끝내 이 천상의 화원에서 생을 마감하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다시금 내려갈 시간입니다. 불국정토나 천국이 제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산 사람이 거할 곳은 못됩니다. 내려가 세상 속에서 자비와 친절을 베풀며 이곳 소식을 증언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길은 타르초 꽃밭을 지나 저만치서 끊기며 아래로 급하게 꺽인 채 이어집니다. 피어오르는 향연기를 타고 순례자들의 염원이 수미산과 신들에게로 전해지기를 기원하며 내리막길로 향합니다.

그런데 눈 아래로 믿기지 않는 풍광이 들어옵니다. 앙중맞게 예쁘면서도 신령스러운 기운을 내뿜는 연못이 해발 5,500m의 하늘위에 떠 있는 것입니다. 코발트색의 크고 작은 6-7개의 연못이 계곡 주위의 설산과 하늘, 빙하와 어우러져 환상적인 수채화를 보는 듯 합니다. ‘은총이라는 의미의 연못으로 힌두교에서는 코끼리 머리를 한 가네쉬 신이 태어 낫다고 전해지는 가우리꾼드(하얀연못)’가 바로 그곳입니다. 조그마한 아담한 연못이지만 용이 산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신령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빙하와 눈이 덮혀 순백의 설원이 보이는데 그곳을 걸어서 지나야 합니다. 그 설원을 지나며 서산대사의 선시를 가슴에 새겨 봅니다.

눈 덮힌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이여, 함부로 난삽하게 걷지 말지어다. 그대가 걸어가는 이 발자국 훗날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되리니!”

계속해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기도 합니다. 산은 오르는 것도 힘들지만 내려가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순간입니다. 옛 선사들이 올라올 적에는 내려놓으라(放下着)’하고, 내려갈 적에는 그르쳐 가지 말지어다(莫錯去)’라고 하심을 이제사 알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 벼랑 같은 길을 내려가니 민가와 텐트가 보이고 그곳에서 점심과 휴식을 취할 수가 있었습니다. 가장 험난한 코스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희열에 취해 차 한잔과 컵라면 하나에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60여명의 스님들이 한 사람의 낙오자나 다친 사람없이 무사하고 원만하게 순례를 완주해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카일라스 코라 순례에 동참해주신 대중 스님들의 신심과 원력, 그리고 발원과 회향에 경의를 표하며 수희찬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강을 따라 다시 3시간여를 더 걸어야 비로소 숙소인 밀라레빠가 수행했다는 주틀북 사원(해발 4,810m) 앞 숙소에 도착하게 됩니다. 어느 언덕 마루에 올라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니 눈 덮힌 카일라스 산줄기와 길게 뻗은 계곡이 어스름 속의 저녁 노을에 아름답게 물든채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마치 랭보의 시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다 겪은 기분입니다. 아마 우린 지금 신들의 거처인 천상의 화원을 다녀온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모두가 어렵고 힘들다고 했지만 대중의 힘으로 코라 순례를 원만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대중 스님들이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며 감사하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스님들의 상호와 마음이 한결 더 넓고 자비스럽고 행복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서로 칭찬하고 자랑스러워 하며 모두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