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계를 받고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지요
질문 올해 수계를 신청했습니다. 근데 오계를 받고 나서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매년 수계법회 때마다 많은 분들이 계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편으로만 계를 받는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부처님의 뜻이 한 찰나에 온 누리에 서리는 것이고, 악한 일에 휘달리지 않을 것이고, 또는 모두 한마음으로 돌아가면서 공부에도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여우 꼬랑지라도 봐 둬야 문리가 터지고 충전이 되죠. 그래서 우리가 그대로 전력이나 자력, 통신력, 광력이 같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계율을 지킨다 하면서 못 지키는 경우가 많죠. 단 오계도 제대로 못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관념으로 계율을 지키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는 생각을 다 놓고 욕심과 집착과 관습을 다 놓아 버리게 된다면, 놓고 가는 도중에 우리가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를 떠나서 그냥 자연적으로 계율을 지키는 거예요. 그렇게 한다면 계율 안 지키는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바닷물과 같고 허공과 같이 돼라. 바다에 별의별 물이 다 들어가도 그냥 한 바다의 물로 돌아가고, 이런 물 저런 물 따지지 않고 그냥 하나로 젖는다. 어떤 거든지 다 젖는다. 그래서 계율이라는 것이 우리가 지키려고 해서 지키는 게 아니라 탐심도 없고 집착도 없고 남을 모함하지도 않고, 둘로 보지 않기에 일체를 내 아픔 같이 생각하고 내 몸같이 공심으로서 생각한다면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를 떠나서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지 않는 게 없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육바라밀에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이 있는데, 인욕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모든 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건데 일어나는 마음을 꾹꾹 눌러 참는 게 인욕이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참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참는 것은 참다운 인욕이 아니죠. 놓는 것이 인욕이에요. 그 자체를 놓는 것이 인욕입니다. 그래서 찾으라고 하지 않고 놓으라고 그랬죠.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놓으라는 거예요. “네가 너를 찾는다면 둘이 되니까 그냥 놓아라. 너한테 보림해라.” 이겁니다. 그래서 오계를 받고 둘로 보지 않는 마음으로 모든 거를 놓는다면 그대로 그것이 인욕이요, 참답게 계를 지키는 겁니다.
자불의 주인공을 진짜로 의심하지 말고 믿으세요
스스로 정말이지 지혜로운 마음과
우주를 다 집어삼켜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는
그러한 자유인이 되신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그러니까 계를 받는 그 뜻을 마음으로 새겨야지, 그냥 한 번 받았다 두 번 받았다 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계를 설하는 사람도 책임이 있고 받는 사람도 책임이 있고 부처님의 뜻도 책임이 있으니 잘 생각해서 계를 지키며 또 그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 극락에 간다고 하죠? 그러나 계를 받은 사람들에 한해서, 만약에 승천해서 극락으로 가는 길을 지금 청와대로 비유를 한다면, 청와대에는 근거가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를 받은 그 뜻의 확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거추장스럽게 방편으로 그냥 떨어뜨리는 게 아닙니다. 물론 나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거짓으로 했다면 내 책임이 아주 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계를 설하는 사이 없이 설하고 주는 것이니 여러분도 받는 사이 없이 받아서 오직 뜻으로 간직하면서 허탈히 생각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오늘이라는 이 자체도 찰나찰나 공해서 변해 돌아가고 부서지고, 우리도 태어나서 자라면서 젊어지고 늙어지고, 늙어지면 병들어 없어지고 찰나찰나 또 생하고 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서 한마음으로, 한마음에서 나오는 걸 한마음에다 되입력할 수 있는 그런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니 여러분은 그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애를 써서 피땀을 흘리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서 옳게, 단 10원을 쓴다 하더라도 옳게 써야지 허무하게 써서는 절대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따라서 지속되기도 하고, 길을 가다가 끊어질 수도 있고, 현실에 한 발짝도 내밀지 못한 채 끊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계를 주는 내 책임도 있느니만큼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렇게 계를 받는 것이, 계첩을 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거짓이라면 여러분이 한번 지켜보고 부처님의 뜻이, 삼라만상 우주 세계가 말없이 말로 전달되고, 손 없는 손이 온 누리에 꽉 차 있고, 걸어 다님이 없이 평발을, 부처님의 발은 한발로 디뎠기에 평발입니다. 이렇게 광대무변한 도리를 여러분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정말 모두 멋쟁이로 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당당하고 떳떳하게 참다운 인간으로서 진실하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자기 양심이 진실하다면 무엇이 두려울 게 있습니까? 죽인대도 두려울 게 없고, 살린대도 뭐, 좋을 것이 없고, 항상 중심을 가지고 평등한 마음으로 두루 굴리면서 자기라는 생각은 쑤욱 빼 버린다면 일체가 한마음으로 세세생생 자유인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느 새 바깥으로 끄달리게 됩니다
질문 참나를 발견해 보겠다고 늘 안으로 마음을 집중하려고 하는데도 어느 새 이 마음이 바깥으로 끄달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바깥으로 끄달리지 않고 참나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답변 주인공이라고 하는 자체는 개별적인 내가 아닙니다. 내 몸속으로도 수십억 마리가 지금 회전을 하고 있는가 하면, 내 마음으로 짓는 그 찰나가 고정됨이 없이 공해서 돌아가고 있거든요. 바깥의 외부의 일도 바로 나 자체 이 개별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밖으로도 개별적인 나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생명들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지금 사는 건 ‘내가 이렇게 살고 있지.’, ‘나야. 내 거야.’ 이럴 수가 없죠. 여러분 몸속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회전해 주고 생명을 유지시키고 또 여러분을 이끌어 가고 말도 하게 하고 똑똑하게 다니게도 해 주는데 모두 내가 혼자 나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몸속에 들어 있는 그 생명체들은 무시하는 거죠.
모두가 둘이 아니게 한마음으로서 서로 고정됨이 없이 내부나 외부나 같이 공생, 공용, 공체, 공식 하고 이 우주 전체가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마음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개별적인 나 하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을 총합해서 ‘주인공’이라 한다면 내 근본에다가 맡겨 놔야죠. ‘야! 내가 억겁 천년 전서부터 이끌어 온 것도 바로 내 주인공이요, 나를 형성시킨 것도 내 주인공이요, 바로 지금도 끌고 가는 게 바로 내 주인공이요, 내 주인공밖에는 해결할 수가 없다. 내 아픈 것도 내 주인공밖에는 병을 낫게 해 줄 수 없다. 내가 가난한 것도 이끌어 주는 건 바로 내 주인공밖에 없다. 내가 일이 막혀서 안 되는 것을 이끌어 주는 것도 내 주인공밖에 없다.’ 이렇게 진짜 당황하지 않고, 이 물질적으로다가 자꾸 끄달리지 않고, 옆에서 죽는대도 눈 하나 깜작거리지 않고 주인공에다 맡길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은 저절로 바로 승천이 돼요. 각자 여러분 한 분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상대도 없고 생활도 없고 부딪칠 일도 없고 부처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것이고 진리가 있는 것이며, 생활이 있는 것이고 바로 가정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바깥으로 끄달리지 마시라는 것은 세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를 발견하는 데 목적이 있다. 둘째, 내 몸을 이끌어 가는 데에 있다. 셋째는, 내 가정과 모든 사회를 끌어가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너무 멀리 찾아요. 부처님이 가죽 속에 모두, 이 원 안에 전체가 들어 있다면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풀포기 하나 빼놓지 않고 같이 다 들어서 동일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이 나 이외에 따로 있는 줄 알고 ‘나 좀 잘되게 해 주시오. 우리 아들 좀 잘되게 해 주시오.’ 칠성한테 가서 빌어야지, 산신한테 가서 빌어야지, 여기 가서 빌고 저기 가서 빌고 그러다가 보니까 용왕까지 가서 무슨 뭐, 거북이나 미꾸라지나 이런 거…, 이름 써서 갖다가 넣고선 그것도 또 잘해 달라고 해요.
이렇게 하다 보면 여러분은 귀신 아닌 귀신 짓을 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귀신 짓을 한다면 여러분이 죽어서도 그 의식이, 그 습성이 그대로 남아서 요다음에 또 나와도 그 습성 그대로 가질 겁니다. 그러니 그 습을 떼지 못해서 또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또 고생을 할 테죠. 사람으로만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털옷을 입을 수도 있고…. 만약에 뱀 허물을 쓸 수도 있는 거고 인간의 허물을 쓸 수도 있는 거지만, 인간도 얼마나 차원이 천차만별로 많습니까?
살아나가는 걸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상인은 상인대로,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화가는 화가대로, 또 과학자는 과학자대로, 철학자는 철학자대로 아주 자연히 누가 그거를 가리지 않아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끼리끼리 모여서 끼리끼리 장단 맞추고 끼리끼리 그렇게 모두가 정말 그 춤에 맞춰서 사는 거예요. 배추 장사를 하더라도 규모 있게, 이 주인공 자기가 있기 때문에 한다는 겁니다.
이 몸뚱이는 참자기의 시봉자밖엔 안 돼요. 즉 말하자면 시자다, 또는 심부름꾼이다 이렇게 말해도 되겠죠. 마음이 동하질 않으면 이 자기 마음 주인공이 고집이 세어 가지고요, 한 발자국도 떼어 놓지 않거든요. 내가 하기 싫고 내가 거기에 틀리다고 할 때는 아주 그냥 몸이 전혀 움죽거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게 누구의 심부름꾼이겠습니까? 자기의 자기가 심부름꾼이죠. 나는 관리인이요, 심부름꾼이다. 부지런히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는 이러한 바쁜 세월에서 ‘그대로 나는 내 주인공의 그 뜻에 의해서 부지런히 뛸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어떠한 걸 막론해 놓고 해결 못 하는 것도 없고 또 못 한다 할지라도 안 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되는 것도 고정되지 않으니, 그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주인공이 그렇게 진실하게 믿어진다면 나도, 모두가, 모든 일체 생명이 다 같이 호응을 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마음이 그렇게 없다면 인연이 없는 일이죠. 그러니 내 몸속에 있는 그 생명들도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일체 놓는다면 악업이나 선업이 다 자동적으로 녹아 버리고 바로 그 생명들이 바로 보살로 화해서 여러분의 털구멍으로 들고 나면서 여러분을 보호하고 간다 이겁니다, 오히려 나쁘게 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여러분은 바깥으로 끄달리지 말고 그 주인공을 진실히 믿어야 합니다. 내가 저 죽은 걸 보는 것도 주인공 때문이요, 남한테 따귀를 맞는 것도 주인공 자기 탓입니다. 자기가 눈에 보이니까 맞은 거지, 눈에 안 보이면 맞을 리가 있나요? 자기 탓이지. 나는 잘했는데 왜 저 사람이 때렸느냐고 하지 마시라 이거죠. 자기가 있기 때문에 맞은 거니까. 그러니 맞은 것도 자기 탓이죠. 어저께 어떠한 문제가 생겼으니까 맞는 겁니다. 꼭 때려야만 맞는 게 아니라 불손한 일을 했으면 불손하게 들어올 거고 선한 일을 했으면 선하게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깨닫는 데에 목적이 있는 거고 나의 병도, 나를 건강하게 끌고 가는 것도, 가난한 거를 끌고 가는 것도, 모든 게 여기 여러분이 체험하고 그것을 연구하고 또는 지혜를 기르면서 그렇게 해 나가신다면 스스로 그렇게 됩니다. 그 외의 말은 더 할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여러분을 발견을 해야 그때서부터 진짜 공부니까요.
그런데 깨치지 못했다고 해서 내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렇게만 해 나가신다면 오늘부터라도 내 마음이 편안하고, 바로 내 마음이 편안하면 남의 마음이 편안하고, 한 가정이 화목하고, 내가 밥을 굶어도 허허 웃을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생기고. 나로 인해서 옆에서 운다 하더라도 내가 거기다가 놓고 가면 거기까지 밝게 불이 들어와서 우는 것을 뚝 그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못 믿는 겁니다. 번연히 알면서도 못 믿는 사람, 그건 배냇병신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체험을 해 보고 ‘아하! 이렇게 신성하고 맛 좋은 것은 난 처음 봤어. 처음 먹어 봤어. 처음 느껴 봤어.’ 이러는 거지 남이 느끼는 게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내가 나를 보고 “여러분한테 내가 이익을 줍니다.” 또 “여러분한테 내가 특별히 무슨 뭐를 잘합니다.” 이렇게 해서도 아니 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알고 스스로 내가 목마를 때 물을 마실 수 있는 스스로 자유인이 돼야 됩니다. 스스로 정말이지 지혜로운 마음과 우주를 다 집어삼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러한 자유인이 되신다면 무엇이 걱정입니까?
관이 잘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질문 저는 지장기도를 하던 사람인데요, 인터넷상에서 대행 스님의 법문을 접하고 주인공에게 관하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잘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태양이 이렇게 있다거나 자가발전소가 이렇게 있다거나 그러면 여기 코드가 다 골고루, 관세음보살 코드, 지장보살 코드, 칠성 코드, 약사 코드 전부, 전부 코드가 박혔어요. 쉽게 말해서 산신의 코드도 있고 해신의 코드도 있고, 전부 있거든요. 그런데 인제 자기가 용도에 따라서 자기 앞에 닥친 거를 말을 하면 거기에 적합한 보살들이 응신이 돼서 나가죠.
그래서 안과 밖을 조복하라 이런 말이죠. 당신들의 그 한군데다가 모두 몰고 간다면, 그렇게 모두 이 의식들이 따라줘야 조복이 되지 한군데다 놓지 않는다면 조복이 되질 않아요. 이 의식들도 산란하게 막 돌아다니고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그 간수하기가 상당히, 우리들이 몸뚱이를 가지고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내 그 생명들의 의식들을 단속해서 가지고 가기가 상당히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마음공부 하니까, 거기 한군데에다가 믿고 놓으니까 다 단속이 되죠. 안과 밖이 다 단속이 돼요. 그러니까 자기가 경험을 할 수가 있는 거죠.
모든 게, 이 몸뚱이 움죽거리는 것도 전체 다 고놈이 하는 건데 고놈을 왜 못 믿고 그렇게 그래요? 그놈이 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얼른 쉽게 말해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그랬는데 대답을 안 할 때, “스님!” 그렇게 부를 때 “왜 그러느냐?” 그랬는데 아무 말 없을 때 그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하지만 “네가 나를 불렀고 내가 대답했으면 그뿐이지 뭐가 또 있느냐? 네가 있으니까 나를 불렀고 내가 있으니까 대답했지 않느냐.” 이런 거와 같죠.
그러니까 댁에서 지금 이렇게 이런 말을 하게 된 것도 당신이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의 모습을 형성시켜 놓고 거기에 들어 앉아 있는 본래의 자불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불의 주인공을 진짜로 의심하지 말고 믿으세요. 의심하지 말아야지 이 세상에 모두 누구를 믿을 데가 있습니까? 자기를 이끌어 가는 자기 주인공을 의심하면 거기에 별거 별거 다 붙어요, 그냥. ‘정말 그럴까? 정말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뭐, 이런 거 말이에요. 그리고 급한 일이 생겨도 ‘주인공 부른다고 뭐, 되나?’ 이렇게 하고 이런다면 그냥 영 그거는 소생을 못 하게 되는 겁니다.
사이비교주 능력도 기도로 생길까요?
질문 가끔씩 사람들을 잘못 현혹시키는 사이비 종교들이 생겨서 사람들이 거기에서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상들이 생기는데, 그런 교주들은 기도라도 해서 어떤 능력이 생기는 것일까요?
답변 기도해서 얻는 능력은 그만큼 능력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심성 천체물리학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천체물리학이라는 언어도 붙지 않아요, 이거는. 근데 그런 사람들은 거기까지 맛을 못 봤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서 자기 그 주처를 만약에 알았다 합시다. 알았으면 그때서부터 공부거든요. 그런데 알았으면 그걸로 족하게 그냥 모두들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지금 나 아닌 나와, 부와 자가 둘이 상봉을 했다고 합시다. 상봉을 했으면 하나가 돼서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렇게 됐다면 실험을 해야죠. 실험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둘이 아닌 도리를. 이 모든 우주가 전부 전기 가설되듯이 가설이 됐으면 실험을 해야 된단 얘깁니다. 이게 정말 이 실험도 해 보고 저 실험도 해 보고 다 둘이 아니게끔 실험을 해 봐서 내가 완전히 증득을 해서 그 결과를 얻어야만이 되는 거고, 그다음 또 얻어야 하는 것은 실험을 다 해 봤으면 그때 또 한 번 둘이 아니게…, 즉 말하자면 태양을 조절하려면 내가 태양이 돼야 될 거 아닙니까. 내가 무엇에 태양을 쓰려면, 태양과 내가 둘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그것도 나투는 방법이거든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초월해서 돌아가는 그것도 실험해야 될 거 아닙니까. 근데 그 실험을 안 하고 그냥 습이, 과거로부터 내가 하고 싶고, 욕심이 있고, 서로 살고 싶고, 예쁜 거 알고, 좋은 거 알고 이러니깐 남이 그 어렵게 돈 번 거를 생각을 못 하는 거죠. 그저 너희가 가져오면 나한테 정성을 다하는 거고 자기는 정성 대가를 받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숭배를 받으면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빠지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불쌍한 줄을 몰라요. 그래서 껌팔이도 시키고 뭣도 시켜서 크게 물건을, 나가 죽어도 ‘뭐 하나 이렇게 해 놓고 갔다’ 이런 소리만 들으려고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어느 가정이 파괴가 돼도 그건 아랑곳없어요. 사람이 자유스럽게 살게 해 주질 않아요. 그저 그냥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 종교 믿는 거까지도 고에서 휘달리고, 거기 가면 가는 대로 자기가 싫어도 결혼을 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이다 뭐, 그래 가지고…. 그건 제 뜻이지, 하나님의 뜻은 무슨 하나님의 뜻입니까. 자기 뜻이지.
그러니깐 모든 사람을 그렇게 현혹시켜서 그렇게 하는 건 제 뜻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겁니다. 자기 하나의 마음의 소견이죠. 하나님이 따로 있나요? 우리 마음을 둥글리면 하나님이지. 그래 “임이시여, 임이시여! 당신의 그 소식을 전달하니 당신은 내 소식을 전달하고 사랑하면서 서로 당신 오기를 기다린다.” 하는 그런 시도 있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을 내 자식같이 생각하고 내 몸같이 생각을 한다면 어찌 그럭할 수 있습니까. 집은 짓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삶을 좀 아리땁고 충분히 자유스럽게 살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을 불쌍히 생각해야지, 공장을 짓고 그래서 돈 많이 벌고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네들을 풍족하게 해 주나요? 그러나 나는, 틀리다 좋다 언짢다 이러진 않아요. 죄가 있다면 모르는 게 죄겠지요. 안 그렇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