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옥천사, 10월 26일 정토불교학술세미나서

청련암 만일계·사찰계 조명 ‘눈길’
만일계, 서응 스님 1919년 창립
“지리산 염불계 전통 계승” 주장

옥천사 鮮末부터 11개 사찰계 운영
재정·수행 도움… 배불 극복 동력

옥천사 청련암 만일계책 1권〈사진 왼쪽〉과 옥천사 칠성계책〈사진 오른쪽〉 표지. 모두 사찰계로 근대불교의 신행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고성 옥천사 청련암 만일계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1950년대 이후 잠시 휴지기가 있기는 했지만 만일계 전통을 이어 받은 수행공동체가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근현대를 관통해 지금까지 활동 중인 청련암 만일계를 학술적으로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고성 옥천사 성보박물관(관장 원명)과 정토불교학술세미나모임은 10월 26일 옥천사 자방루에서 ‘고성 옥천사 사찰계와 문화유산’을 주제로 제6회 정토불교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안경식 부산대 교수는 창립 100주년을 맞은 옥천사 청련암 만일계에 대해 조명했다.

안 교수는 만일계의 전말을 옥천사에 남아 있는 계원모집문과 계책을 통해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만일계 창립을 주도한 인물은 당시 청련암에 주석하고 있던 서응 스님이다. 스님은 1919년 7월 15일 쓴 모집문에서 “고(苦)의 윤회를 끊고 극락왕생”을 강조하며 염불수행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사찰에서는 법사 스님이 하루 4번 염불하도록 하고 봄 가을로 아미타불전에 불공을 올릴 것도 제언했다.

안 교수는 “이 같은 계는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지역에 있었던 만일계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뜻”이라며 “서응 스님이 발원문의 거의 대부분을 역사적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채웠다는 것은 옥천사에서 만일계를 만든 동기 중 하나로 읽을 수 있다”고 밝혔다.

옥천사에 소장된 〈만일계책〉에 대한 분석도 이뤄졌다. 총 6권인 계책은 일종의 계원 명부로 △거주지 △복위자 성명 △축원자 성명 △입계금 등이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만일계의 전말이 가늠된다.

안 교수에 따르면 시작은 1919년 10월 15일이며, 끝은 알 수가 없다. 만일결사로 가정했을 경우 계는 1947년 초에 회향해야 하지만, 계의 기록은 6.25한국전쟁을 지난 1957년까지 이어지고 있어서다. 

참여자는 약 500여 명이 동참했으며, 승속 구분없이 참여했다. 승려로는 옥천사 사중 스님들이 많았다. 지역적으로는 진주와 고성, 통영이 중심이었으나 서울과 만주, 외국에서도 동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입계를 위해서는 일정 금액을 헌납하는 입계금이 있었지만, 형편에 따라 자유롭게 기부한 것으로 확인됐다.

1957년 이후 잠시 단절됐던 만일계는 지난 9월 2일 입적한 故승욱 스님에 의해 다시 이어진다. 1996년 승욱 스님은 만일계를 ‘정토만일봉사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만일봉사회는 염불수행뿐만 아니라 사회봉사와 아동 복지 등의 사업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안 교수는 “옥천사 청련암 만일계는 신라시대 강주(현 진주) 전통을 바탕한 지리산권 염불계 전통을 이었다”면서 “현재의 만일봉사회는 이 같은 전통을 계승하고 대승보살행을 이루려는 원력도 세웠다. 8세기 강주에서 시작된 만일계가 20세기 초 기미년 만일계를 거쳐 21세기에는 정토만일봉사회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땅을 더불어 사는 극락정토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청련암 만일회는 21세기 한국 만일계의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한상길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는 ‘옥천사 사찰계 연구’를 통해 사찰계가 조선 후기 배불 정책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임을 조명했다.

그에 따르면 사찰계는 조선 후기 억불의 시대에 경제적 자구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전했고, 18·19세기 많은 사찰에서 각종의 계가 번성하면서 재정을 확충했다. 옥천사에서도 11건의 사찰계가 1744년부터 1966년까지 활동했다. 기록된 사찰계로는 동갑 스님들의 친목 모임인 갑계를 시작으로 불유계, 지계, 인경계, 장등계, 칠성계, 만알계, 정토계, 왕생계 등이 있었다. 이들 사찰계는 신앙활동과 보사활동에 주력했다.

한 교수는 “한 사찰에서 다양한 계가 성행했다는 것은 사찰 재정이 어려웠다는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부찰(富刹)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며 “실제 옥천사는 1920년대 임야가 540정보에 이를 정도로 많았고 이를 기반으로 불교전문강원을 운영했다. 또한 서울과 일본에 유학승을 보내고 부산대 설립기금을 기증했다. 옥천사의 사회·교육사업의 밑바탕에는 사찰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학술세미나에서는 김미경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이 ‘옥천사 청련암 아미타불도 연구’를, 정진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이 ‘옥천사 연대암 치성광여래도 연구’를 각각 발표했다.

주제 발표 이후에는 학교법인 동국대 이사장 법산 스님을 좌장으로 종합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자로는 이지중 한국복지대 교수, 김성순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이희정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등이 참여했다.

고성 옥천사 주지 원각 스님은 이번 학술세미나가 옥천사 19세기 신행활동의 단면을 상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면서 구체적인 신행공동체의 활동과 운영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는 오늘날 불자들에게 많은 귀감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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