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메이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1665〉, 캔버스에 유채, 44×39 cm,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네덜란드
〈 우유 따르는 여인 1658〉, 캔버스에 유채, 46.5 x 41 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네덜란드
〈 델프트 풍경 1661〉, 캔버스에 유채, 118 x 98 cm,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네덜란드

강 건너편 마을이 구름 사이로 내리는 아침 볕 속에서 기지개를 켠다. 드문드문 금빛 햇살을 머금은 흰 구름은 빨간 지붕들과 교회의 첨탑을 쓰다듬듯 나직하게 깔려 있다. 물 가에 아직 떠나지 않은 배들이 정박해 있고 잔잔한 바람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수면은 하늘의 미묘한 음영과 도시의 실루엣을 보듬어 안고 유유히 흐른다. 이편 기슭에는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선착장 주변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교회의 첨탑에 자그마하게 보이는 시계바늘은 아침 7시가 막 지난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

시간이 멈춘듯한 감도는 정적
빛과 어둠이 불러오는 ‘신비감’
잔잔한 평화와 질서 감각 찾게 해

모든 정경은 고유한 표정과 정서적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풍경화는 작가의 마음이 느낀 이러한 울림을 화폭을 통해 공유하게 한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델프트 풍경 Gezicht op Delft, 1661〉은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걸작 중 하나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함께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트하위스 미술관(Mauritshuis, The Royal Picture Gallery)에 소장되어있다.이 그림을 통해서 페르메이르는 대가다운 섬세하고 정밀한 필치,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와 더불어 고요하고 명상적인 화가 특유의 내면적 정신성으로,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불러 일으킨다. 이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으면, 17세기 네덜란드의 어느 마을에서 조용한 아침을 맞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페르메이르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와 함께 네덜란드의 황금시대인 17세기를 대표하는 세 명의 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남긴 작품도 많지 않다. 페르메이르는 델프트 지역에서 화가로서 약간의 명성을 지녔다고는 하나, 당시 바로크의 대가들처럼 크게 주목을 받은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망각의 어둠 속에 감추어졌던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이 다시 재조명 받은 것은 200년이나 지난 19세기 중반의 일이다. 당시 유럽, 특히 프랑스 화단은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추구하는 다양한 움직임들이 일어났다. 페르메이르의 재발견에는 프랑스의 문인이자 미술 비평가인 테오필 토레 뷔르거(Thophile Thor-Brger, 1807-1869)의 글들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평론에 주목하여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새로이 접한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인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후 마르셀 프루스트도 “헤이그의 한 미술관에서 〈델프트 풍경〉을 본 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 바 있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페르메이르의 이 그림에 관련된 한 작가의 이야기를 소설적 상상력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현대화가 중 유달리 페르메이르에 대한 경의를 품은 대표적인 사람이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 1904~1989)였다. 그는 페르메이르의 작품 〈레이스를 뜨는 여인 De kantwerkster, 1670〉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도 했고,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받은 감명과 인상을 자신의 여러 초현실주의 작품에 차용했다. 심지어 한 인터뷰에서 달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벨라스케스, 피카소, 라파엘로 등의 대가들과 비교할 때도 페르메이르가 모든 측면에서 월등히 우수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페르메이르에 대한 달리의 대표적인 오마쥬작품이 바로 〈델프트 마을의 출현 Apparition de la ville de Delft, 1936)이다. 물론 이 작품에 대한 작가 자신의 별다른 설명은 없다. 의식으로 해명될 수 있는 그림 설명이란 무의식을 토대로 한 달리의 초현실주의와는 모순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델프트는 네덜란드 남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페르메이르는 이곳에서 나서 자랐다. 그는 다작을 하는 작가도 아니었으며, 작업방식 역시도 매우 더디었다고 전해진다. 19세기에 발간된 어떤 목록에는 40여 점의 작품들이 기재되어 있기는 하나, 현존하는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총 37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델프트 풍경〉과 더불어 〈작은 거리 Het Straatje, 1658〉을 비롯해서 모두 3 점의 풍경화를 그린 것으로 확인되지만, 나머지 하나의 풍경화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남은 페르메이르의 풍경화는 단 2점 밖에 없다.

흔히 풍경화에서는 그 작가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델프트 풍경〉에서는 그 시대 네덜란드 사람들이 가졌던 신앙의 변화, 나아가서 근대 사회를 향해가던 당시 네덜란드의 복잡 다양한 사회 변화 양상의 한 단면이 읽혀진다. 〈델프트 풍경〉에서도 작은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의 양 편에 구교인 카톨릭 교회와 신교인 프로테스탄트의 교회 첨탑들이 각기 배치되어 있는데, 잘 살펴보면 구교의 교회 건물은 구름이 드리운 음영으로 어둡게 채색되어 있는 반면, 신교의 교회건물은 아침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선착장에 정박한 배 옆에는 부르주아 풍의 정장을 입은 세 명의 남녀와 아기를 안고 서 있는 평민 차림의 여성이 보인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는 두 명의 평민 여성이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런 정경에서 델프트 사회 공동체의 조화로움과 평화가 느껴진다.

페르메이르가 살았던 17세기의 네덜란드는 대양 항해를 통한 세계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나라였으며, 당시 델프트는 도자기의 산지로 유명했다. 델프트 도자기는 하얀 바탕에 아름다운 파란색 그림이 수공으로 그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용어로는 ‘청화백자’인데, 서양에서는 일반적으로 ‘델프트웨어(Delftware)’ 또는 ‘델프트 블루(Delft blue)’라고 말한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수입되던 중국의 청화백자는 당시 유럽에서 인기 높았던 고가의 소장품이었다. 청화백자는 먼 항해를 거쳐 어렵게 구해야 하는 희귀한 물건이었기에, 중국 도자기의 특성을 모방하여 만든 비교적 구하기 쉬운 델프트의 파란 도자기는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델프트에서 일생을 지냈던 페르메이르의 여러 그림들에서도 특유의 깊고 매혹적인 파란색이 눈길을 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 특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Het Meisje me de Parel, 1665〉에서 모델이 머리에 두른 천의 파란색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페르메이르가 유난히 애착을 가졌던 이 파란색의 안료가 ‘울트라마린(Ultramarine)’이다. 〈델프트 풍경〉에서는 오른쪽 도개교 옆에 정박한 두 척의 배와 그 뒷편 햇빛에 밝게 빛나는 큰 건물의 지붕이 페르메이르 특유의 ‘울트라마린’으로 채색되어 있다. 〈물주전자를 든 여인 Vrouw met waterkan, 1662〉, 〈우유 따르는 여인 Het Melkmeisje, 1658〉 등 많은 작품에서도 이 섬세하고 미묘한 ‘울트라마린’의 파란 색은 그림 속의 정경에 신비한 깊이감을 부여한다.

당시 천연 울트라마린 안료는 전세계적으로 산출되는 지역이 극히 협소한 매우 희귀한 광석인 청금석(靑金石)으로부터 제조되었기 때문에, 금과 마찬가지로 매우 값비싼 최고급의 재료로 취급되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이 안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묘사할 때,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의상을 채색하는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던 귀한 안료였다. 오늘날 울트라마린은 다른 대부분의 안료들과 마찬가지로 화학적 합성을 통해서 제조된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여관을 경영하면서, 생전 여러 차례 빚에 시달리기까지 했다고 전해지는 페르메이르가 당시 그처럼 귀했던 값비싼 안료를 어떻게 자신의 여러 작품에서 사용할 수 있었을까?

상당수의 연구가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익명의 다수 소장가들을 위해 다작을 하였던 상업적 화가들과 달리 페르메이르는 특정한 후원자의 의뢰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였기에 울트라마린과 같은 고가의 재료 구입 또한 대부분 후원자에게 의탁할 수 있었다는 점과, 무역이 발달한 당시의 네덜란드에서는 그 전 시대, 다른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안료의 재료가 되는 희귀한 광물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델프트 풍경〉을 포함하여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에서 선명한 색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꼼꼼한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화폭에 묘사된 인물들은 정적인 균형 속에 안정되어 있으며, 정교하고 세밀한 필치는 더할 수 없는 몰입감을 불러 일으킨다.

바로크 회화의 대가들은 모두 제각기 극단적인 운명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았다. 카라바조가 마치 그리스 고전 비극의 주인공처럼 돌출적이고 이단아적 개성을 가진 비극적 영웅이었다면, 루벤스나 렘브란트는 종교적 이상과 인간의 정념을 예술로 승화한 회화사의 거인이었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영웅도 거인도 아닌, 네덜란드 작은 도시의 소박한 화가였으며 그저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조용한 삶을 살았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정적이 감도는 작은 화면이 많은 이들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루스트는 자신의 소설에 등장인물인 작가 베르고트의 입을 빌어 〈델프트 풍경〉의 ‘노란 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어린 아이가 노란 나비를 잡으려 애쓰듯, 노란 벽의 작은 자락에 시선을 집중했다. ‘나도 이렇게 글을 썼어야 했는데... 내가 마지막에 쓴 책들은 너무 건조해. 이 노란 작은 벽의 작은 자락처럼 내 문장도 그 자체로 귀중해질 수 있도록 색을 여러 층 입혀서 칠해야 했는데...’하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중에서)

비슷하지만 매일 매일이 새로운 우리의 일상처럼 페르메이르의 붓 터치는 캔버스 위를 무수히 오고 갔으리라. 화가는 색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덧칠을 하기도 하고, 좀 더 선명한 색감을 얻기 위해 또 한 번 칠을 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또 어쩌면 미리부터 계획된 정교한 디자인에 따라 여러 번 색을 칠하여 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삶이 크고 작은 많은 일들과 켜켜이 쌓인 일상의 흔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프루스트는 〈델프트 풍경〉에서 무수한 붓질과 서로 미묘한 차이의 물감이 겹쳐진 그 노란 벽의 마티에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페르메이르의 화면에서 이 반짝이는 작은 벽은 바로 세상의 모든 아침이 시작되는 장소가 된다.

남아 있는 두 점의 풍경화를 제외하고는 페르메이르는 대부분 실내에서 무언가에 집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과 매일 반복되는 조용한 일상의 정경을 그렸다. 열린 창으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부드러운 빛은 실내의 어둠과 대립하고 조화하며 미묘한 깊이와 알 수 없는 신비감을 불러 일으킨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서 창은 그것을 통해 외부에 위치한 먼 곳을 내다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세상의 빛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일종의 장치처럼 보인다.

이상향은 창 밖의 어떤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정적과 고요함 속에서 일깨워지는 명상적 진리, 그리고 일상의 소중함과 평범한 삶의 아름다움을 그리고자 했던 페르메이르의 작은 그림들에서 우리는 잔잔한 평화와 질서에 대한 감각을 찾는다.

페르메이르의 그림 앞에 서면, 여러 번 덧칠하여 완성된 그림의 세부처럼, 수없이 고쳐 쓴 뒤에야 얻은 단단한 한 줄의 문장처럼,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아득하게 느껴지는 삶에서도 변함없는 지속적이고 순수한 가치인양 조용히 빛나고 있는 순간 순간들, 매 순간 정성을 다하여 빛나는 오늘로 채우고 싶어진다.

“삶은 놀라울 만큼 깊고 넓은 그 무엇이다.

하나의 위대한 신비이고,

우리들의 생명이 그 안에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나라다.

먹고 살기 위한 돈벌이에 그친다면,

우리는 삶 그 자체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Jiddu Krishnamurti, 1895~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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