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이해의 길 17

인간은 주위 환경이나 문화에 영향을 받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종교 내에서도 시대나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이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게 되면 사람들은 논쟁을 벌이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서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이것을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류는 다양한 사상과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불교 역시 예외는 아니다.

붓다의 입멸 후 100년 동안 교단은 별다른 문제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붓다의 가르침도 그 원형을 유지하면서 비교적 잘 전승되고 있었다. 불멸 후 100년까지의 불교를 근본불교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 변형 없이 이어져왔다는 의미도 담겨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교단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존의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와 시대에 맞는 개혁을 주장하는 진보는 대립해왔다. 불교 내에서도 그랬다. 불멸 후 100년이 지나자 상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인도 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인도 서쪽 시골 지역에 살던 야사라는 이름의 장로(長老)가 동쪽의 바이살리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바이살리의 젊은 승려들이 붓다가 제정한 계율을 어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곳은 예전부터 문물교환도 활발하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그래서 계율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융통성 있게 적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골의 보수적인 문화에 익숙한 야사는 도시의 젊고 진보적인 비구들의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였고 급기야 7백 명의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게 되었다. 야사는 바이살리의 비구들이 범하고 있는 계율을 10가지로 정리하여 제출하였고, 회의에서는 이것이 모두 법에 어긋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고 부른다.

이 10가지는 승려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사항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먼저 염사정(鹽事淨)이라고 해서 당시 도시의 비구들은 소금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먹곤 했었다. 그러나 붓다 당시에는 탁발에 의존했기 때문에 음식을 보관했다가 먹는 것은 계율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오후불식(午後不食)에 어긋나는 이지정(二指淨)이란 것도 있다. 정오가 지나면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붓다 당시부터 지켜왔던 계율이었다. 그런데 특별한 사정으로 12시를 넘기는 경우에는 해 그림자로 손가락 두 마디(二指)에 해당되는 시간, 그러니까 오후 1시 정도까지는 먹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화폐 경제가 발달한 도시답게 금이나 은을 보관하는 것도 허용하자는 금은정(金銀淨)도 있다. 모두가 계율을 시대에 맞게 적용하자는 취지였지만 전통을 지키려는 입장에서는 쉬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십사비법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젊고 진보적인 승려들은 이에 따르지 않고 더 많은 대중들을 모아 별도로 회의를 열었다.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비구들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계율을 적용하는 문제로 서로 대립하다가 결국 교단은 두 개로 분열하고 말았다. 기존의 전통을 고수하는 장로 중심의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비구들 중심의 대중부(大衆部)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두 개의 부파로 분열된 것을 근본분열(根本分裂)이라고 한다.

분열은 분열을 부르기 마련이다. 계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분열된 교단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리의 차이로 인하여 상좌부에서 10개, 대중부에서 8개가 분리되어 독립적인 부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처럼 20여 개의 부파로 분열된 것을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 하는데, 근본분열 이후 4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부파불교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불교의 분열은 계율과 교리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결국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적 배경이 생각의 차이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각자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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