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 법회

〈선문답〉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추구하려는 노력서 출현한 선수행의 결과물이다. 이런 선문답에 대한 담론이 불교계서 펼쳐진다.

서울 삼보사는 9월 22일부터 11월 3일까지 ‘2019선문답 특별대법회’를 진행중이다. 이중 10월 6일 삼보사 창건 36주년 기념 법회서 법사로 나선 前 조계종 포교원장 지원 스님(삼보사·육지장사 회주)의 선법문을 지상 중계한다. 정리=김주일 기자

前 조계종 포교원장 지원스님(삼보사·육지장사 회주)이 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胡子無鬚(호자무수)라? 혹암 스님은 서천 달마는 왜 수염이 없다고 했을까요? 흥미 진지한 화두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혹암 스님은 서천서 건너온 달마는 왜 수염이 없는가(西天胡子, 因甚無鬚) 하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서천은 중국서 바라보면 인도 서쪽이라서 칭하였고, 또한 호자란 오랑캐 호자에 아들 자로서 옛부터 중국 사람은 중국 국경 밖 사람을 오랑캐라고 불러 왔습니다.

무문관 제 4칙 ‘호자무수’

지원 스님 前 조계종 포교원장

“화두는 당처 이해하고 참구해야

참선은 학문이 아닌 실재적 수행”

“화두 참구 진면목 찾기위한 방편

선문답 병행해야 수행 효과 극대”

달마대사를 지칭하는 말인 ‘무수’란 수염이 없다는 말인데, 이 문장을 의역하면, 달마 대사는 왜 수염이 없는가란 의미이고, 직역하면 “서쪽서 온 오랑캐는 왜 수염이 없는가”입니다.

화두는 이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목에 칼을 들이 대듯 숨 돌릴 틈 없이 몰아 부치는 것이죠.

화두란 이론적으로 풀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따라 하기만 해서도 안됩니다. 그 화두가 이야기하는 당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이해하고 참구해야 합니다.

달마대사는 중국 선종서는 초조로서 부처님 같은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혹암스님은 서쪽서 온 오랑캐로 아주 불경스럽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게 무례한 언어들로 된 공안 화두로 종종 등장합니다.

이는 달마를 우상화 하지 말고 흉내 내지 말며, 일상화되고 개념화된 기본 인식을 내려놓고 스스로 부처와 달마가 돼야 한다는 깨달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마도에 나오는 대사의 모습은 위엄이 넘치고, 수염을 뽐내는 그야말로 수염 투성입니다. 이렇게 달마에게는 수염이 있는데도, 혹암 스님은 달마에게 수염이 없다고 했습니다.

달마대사는 선가 전통에 새로운 가풍을 도입한 창시자입니다. 선종의 종지라는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과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을 선언 했던 분으로 유명하죠

예나 지금이나 달마는 대중의 우상(아이콘)이 되어 버렸습니다. 혹암 스님의 충격적인 화두 앞에 달마에 대한 기존 관념의 집착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혹암 선사는 이 화두서 던진 달마 우상화 따라 하기 흄내 내는 노릇 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부처와 달마임을 체험해보라는 의미에서 거침없이 쏟아 낸 말씀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화두란 마음을 깨닫기 위한 방편으로, 고정관념서 탈피하지 않으면 평생 따라 하기에 벗어나지 못하며 그물 안에 걸린 고기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맙니다.

중국 한국 일본 등 수많은 달마도를 찾아 봐도 수염 있는 달마는 있어도 수염 없는 달마도는 없습니다.

몇해 전 우리나라서도 유행처럼 달마 우상 사상이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달마를 신성시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부처가 되기보다는 달마를 흉내 내려고 했다는 점이죠. 바로 이런 상황서 간단한 질문 하나로 혹암 스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이콘 달마’를 넘어 ‘실제 달마’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로 답해보세요. “무슨 이유로 달마에게는 수염이 없는 겁니까?”

무문 혜개 스님께서는 ‘서천의 달마는 왜 수염이 없는가?’란 화두에 대한 공부법 힌트를 주고 계십니다.

참선(禪)은 학문이 아니고 실재적 수행입니다. 즉 실참을 체험해 보는 것이죠. 실참함으로써 진실을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실참 실오의 자리는 ‘본래면목’ 굳이 말하자면 ‘참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심 버리면 망념도 진성도 없죠. 있고 없음에 머물지 말고 경계를 초월하세요. 오직 그대 자신만이 달마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 여러 공안을 사유하다 보면 진퇴양난 은산 절벽과 같은 화두가 있는가하면 매우 흥미롭고 박장대소할 선문답도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선문답하면 동문서답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마음 공부 한 수행자라면 선지식의 말씀을 한순간에 간파해 버리게 됩니다. 공안 화두는 약 1700개, 벽암록100칙과 무문관 48칙이 있으며 모두 마음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선문답도 있습니다.

마조와 석두 두 스님사이를 오가며 수행한 방거사가 석두 스님을 뵙고 가르침을 구하는 말씀에 “만법과 짝하지 않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하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석두 스님은 손바닥으로 방거사의 입을 틀어 막았습니다. 방거사는 다시 강서 지방에 살고계시는 마조 스님을 찾아가 석두 스님께 하듯이 “만법과 짝하지 않는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자네가 서강에 흐르는 물을 모두 마시고 오면 그때 내가 말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앞서 석두스님이 보이신 입을 틀어 막는 행동이나, 마조 스님이 말하신 것이나 똑같은 대답입니다. 서강에 물을 다 마시는 것이 불가능 한 것처럼, 스스로 깨달아야 할 몫이지 말로서는 설명이 안됩니다. 오직 피와 땀을 흘리는 가행 정진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운문 스님과 한객승의 선문답도 석두 스님과 마조 스님의 선문답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하루는 한 객승이 운문 스님께 찾아와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 입니까?”하자,

운문 스님은 호병 호떡이라고 했습니다. “擧 僧問 雲門 如何是 超佛越 祖師之談 雲門 ?餠”(벽암록77측)

이 문답 대로면 분명 동문서답입니다. 부처님과 조사스님 보다도 더 높은 해탈, 그것을 뛰어넘는 깨달음을 물었건 ‘호떡’이라 말했으니 세상사 이치로 보면 동문서답 이라고 할 수 밖에요. 그러나 이 선객은 내가 봐도 건방진 중병에 걸린자 임을 간파 할 수 있습니다.

천오백년전 이나 지금이나 피나는 수행정진 없이는 절대 언어와 문구로서만 본래면목을 알 수 없습니다. 호떡을 입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입 닥치고 가서 실천해 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조주 스님의 선문답 하나 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주 스님에게 한 스님이 묻기를 “무엇이 도(깨달음) 입니까?”하자, “도란 너 내 집 담 넘어에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듣고 객승은 다시 묻습니다. “그런 도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그러면 무슨 도(道)를 물었느냐”고 하자, 객승은 “큰 대도(大道)를 여쭌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에 대한 조주 스님의 대답은 아주 냉담 합니다. 큰 길은 임금님이 사시는 서울(장안)에 가면 있다고 말이죠.

여러분 들은 이 말을 알아 들으셨나요? 조주 스님의 이 말은 아주 친절한 해설입니다. 대도까지 말 할 줄 아는 자가, 말로서 도를 얻을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가소롭다는 메시지이죠.

그래서 조주 스님께서는 천방치축으로 도를 찾아 헤매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겁니다.

선 수행 한답시고 부처가 어떻고, 조사서래가 어떻고, 달마가 어떻고 하는 담론이 돼버린 틀에 박힌 생명력 상실한 수행을 하지 말라는 준엄한 꾸지람인 것이지 결코 동문서답이 아닙니다. 이렇듯 화두참구는 본래면목을 찾기 위한 방편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인식의 대전환’ 없이는 결코 깨우침은 없습니다. 인식이란 자기 경험서 보는 것이죠. 그러므로 인식이란 각자에 따라서 각기 다른 것입니다. 인식으로 참 자아에 이룰 수 없는 것은 인식이 바로 업식이기 때문입니다. 업식은 경험이죠. 경험에 의해서 인식되었다가 자락자득(自業自得)과 업의 축적에 의해서 좋고 싫음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달마대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을 보면 부처요, 마음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다. 그러나 불성은 중생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중생의 마음을 떠나 따로 불성이 있다면 부처가 이제 어느 곳에 있겠는가? 중생의 마음이 곧 불성이다.”라고요.

이렇게 우리가 마음 마음 하면서 모든 것이 마음이 만든다고 했지만 어디 내 뜻대로 되든가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가슴 아프게 괴로워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알면 괴로움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자성이 없는 상(相)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죠.

다시말해 깨달았다고 한는 것은 諸相이 相이 아님을 알아차라는 것이고, 내가 무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비실천이 자동적으로 따르게 되어 고통 없는 세계에 이르게 되죠. 결론적으로 마음이라고 하는 정신세계를 불교에서는 수상 행식으로 나눠 말하고 있습니다. 감각 세계 의식을 받아들인 감각 작용 의식과 과거 생각 등을 떠올리는 표상의 작용, 움직이려는 의지적 작용, 모든 것을 분별하는 인식작용으로써 몸이 사라지면 이 또한 사라집니다. 나라는 주체가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서 증득 체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드린 이런 원리를 잘 생각해 피나는 정진을 게을리 하지 맙시다. 모두들 성불하시길 발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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