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와 손

알브레히트 뒤러,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 1500〉, 목판에 유채 , 67.1 x 48.1cm,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알브레히트 뒤러, 〈기도하는 손, 1508〉, 종이에 드로잉, 29.1× 19.7cm, 비엔나 알베르티나 미술관
오귀스트 로댕, 〈대성당, 1908〉, 64 x 29.5 x 31.8cm, 대리석, 파리 로댕 미술관

손의 인상은 우연한 순간에 홀연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경우가 간혹 있다. 그것은 오래도록 존재해 왔으나, 의식의 여백 어딘가에 밀쳐져 있다. 어느 순간 작은 섬광처럼 인지의 영역 안으로 불쑥 들어서는 낯선 방문객과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할 때 시선은 가장 먼저 얼굴로 향한다. 시간이 흐르고 짧지 않은 대화의 한 모퉁이에서 시선의 언저리에 무심히 방치되어 있던 손은 의도하지 않았던 시점에, 불현듯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현대 미술에서는 굳이 예술가가 손을 사용하지 않아도 작품을 제작할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예술가의 손은 작품을 제작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상당수의 화가들은 자신의 작품에서, 아니면 습작에서라도 손을 즐겨 그렸다.

강한 자아 의식의 표출 특징
자화상 일환 자신의 손 그려
인간 고뇌와 기원 등 표현해

종이 위에 기도하는 손이 그려져 있다. 그림은 옷소매까지만 그려져, 파란 어둠 속에 손이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란히 모은 두 손을 통한 고요한 침잠 속에서 그 무엇을 기원하는 심상이 잔잔하게 전해진다.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옷소매의 재질감과 손등의 주름, 그리고 거기에 비친 미세한 빛은 역설적으로, 보는 이에게 어떤 비현실적인 신비감을 불러 일으킨다.

일반적으로 손동작이나 손의 위치는 의미를 가진다. 가령 두 팔을 벌려 손을 높이 쳐드는 동작은 간절한 청원의 표시라면, 손바닥을 마주하여 합장하는 동작은 감사나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고 특히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기는‘명상’을 의미한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 독일)의 작품 〈기도하는 손, 1508〉은 500년도 더 된 오래된 그림이지만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애호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은 프랑크푸르트의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Order) 성당 제단화 제작을 위해서 일종의 사전 준비를 목적으로 그린 여러 스케치 혹은 드로잉 중 하나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원본인 제단화는 1729년에 소실되었고 지금은 이 드로잉 작품만 남아 있다. 그러나 요스트 하리흐(Jobst Harrich)라는 작가가 1614년에 원본을 모사한 작품은 현재까지 전해져 뒤러가 그린 원본에 대해서 상상해 볼 수 있다.

뒤러는 손의 표현에 대해 여러 습작을 남겼는데, 이 그림도 그 중 하나이다. 하리흐의 모사작을 보면, 이 습작의 손은 실제 제단화에서는 한 수도사의 손으로 표현되었다. 비록 이 드로잉이 제단화에 사용되는 실제 밑그림은 아니며, 단지 사전 준비에 필요한 일종의 구상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뒤러는 모든 세부 디테일을 완벽하게 묘사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낸다.

이 손의 실제 모델은 누구인가하는 여러 추측들이 있다. 혹자는 이 그림의 두 손은 각각 여자의 손, 남자의 손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이 손이 뒤러 자신이 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혹은 뒤러 어머니의 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론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어떤 추측이든 확실한 근거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이야기는, 이 손이 뒤러의 친구인 ‘프란츠’(어떤 버전에서는 뒤러의 동생)의 손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뒤러가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친구 프란츠가 일에 전념하여 뒤러의 학비를 대줬다. 후에 유명한 화가가 된 뒤러가 친구를 찾아갔을 때, 프란츠는 그때까지도 그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뒤러가 그린 것이 바로 프란츠의 ‘기도하는 손’이라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내용 그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지만, 이 역시도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기도하는 손〉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많은 추측과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이 그림이 가진 보편적인 호소력을 말해 준다. 이 손은 특정한 ‘그 누구’의 손일 수도 있지만 ‘그 누구나’의 손이다. 이처럼 기도하는 손은 보편적인 인간 본질인 영적인 차원의 자비심을 불러 일으킨다.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울퉁불퉁한 혈관의 굴곡과 손등의 질감, 그리고 굽이치는 손가락의 모습은 현실 속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특정 종교를 막론하고 하늘을 향해 합장한 두 손은,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로서의 고양하고자 하는 인간 내면의 숭고한 영성을 느끼게 한다.

신성로마제국시기,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뒤러는 어릴 때부터 천부적인 그림 재능을 갖고 있었다. 장인인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금세공사가 되는 편이 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그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기보다는 화가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13세의 뒤러가 그린 자화상을 보면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뒤러의 작품은 특히 판화가 많다. 그 당시의 판화는 생산성이 높은 일종의 대중매체였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까지의 전통적인 화가와는 달리 뒤러는 특정한 의뢰자나 패트론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뒤러는 동료 작가들과 함께 판화 공방을 운영하였다. 뒤러가 드로잉을 완성하면 그것을 토대로 다수의 고용인들 혹은 제자들이 판화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형태의, 일종의 집단 제작 체계를 갖추어 작업을 하였다. 이러한 체계를 통해서 뒤러는 화가로서의 이름을 알렸으며, 판화 판매를 통해 꽤 돈을 벌기도 했다.

물론 뒤러가 판화만 제작한 것은 아니었다. 두 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전성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큰 감명을 받은 뒤러는, 그 경험을 자신의 회화에 반영하였다. 여행지 곳곳의 풍경들을 그린 뒤러의 수채화 작품들은 이후 유럽 풍경화의 흐름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주었다.

뒤러는 판화, 유화 등을 비롯한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중 1500년에 제작한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은 그의 화가로서의 강한 자아의식을 잘 표현하는 작품으로 전해진다. 조용하고도 단호한 시선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 자화상은 얼핏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정면 초상은 관습적으로 신분이 높은 왕족, 귀족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포즈였다. 뒤러는 이러한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자신의 자화상에 사용함으로써 이단아의 기질을 보여주었다. 뒤러 이후 렘브란트를 비롯한 당대의 대가들이 점차 자화상을 통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실험하고 예술 정신을 표현하게 되었다. 화가에게 있어서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도 같다.

새삼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뒤러는 자화상을 회화의 한 분야로 정립한 최초의 화가이다. 뒤러가 살던 시대 독일 지역에선 화가는 후원자의 경제적 지원으로 작품을 의뢰 받아 제작하는 낮은 신분의 존재였기에,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는 일은 비록 가능은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화가의 명성으로나 별 도움이 안 되는, 현실적으로는 쓸모 없는 작업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뒤러는 예술가의 낮은 지위에 의문을 품었다. 뒤러가 여행했던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에서는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는 종종 자연을 창조한 신과 비교되었고, 학식 높은 인문주의 지식인과 같이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뒤러가 살던 뉘른베르크는 그렇지 못했다.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양식을 대표하는 뒤러는 실제로 <인체 비례론>및 <원근법에 관한 고찰> 등 이론서를 낸 미술이론가이기도 했다.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에서 뒤러의 오른 손은 가장 전면에 배치되어 있고, 빛이 내리 비치는 하이라이트인 이마와 함께 가장 밝은 톤으로 채색되어 있다. 뒤러는 그림의 오른쪽에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몸소 나를 고유한 색채로 28세의 모습을 그렸다.” (Albertus Durerus Noricus ipsum me propriis sic effingebam coloribus aetatis anno XXVIII)라는 라틴어를 빛나는 금색으로 기록하고, 왼쪽에는 제작 연도와 자신의 서명을 했다. 천재성과 이단아 기질을 동시에 지닌 뒤러는 자화상에서 모피를 쓰다듬는 손을 통해 ‘이 손이 바로 예술가 뒤러의 손이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손이 사물과 존재에 관한 명상적인 진리를 열어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 프랑스)의 조각 〈대성당, 1908〉이 있다. 서로 약간 엇갈려 마주하고 있는 두 손은, 찬찬히 살펴보면 동일 인물의 왼손과 오른손은 아닌 듯하다. 혹은 연인의 두 손으로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묘한 형상의 두 개의 오른쪽 손은 뒤러의 〈기도하는 손〉과 마찬가지로 깊은 영적 울림을 전한다.

기독교적 신앙에서 종교적 성소인 대성당은 한편으로 인간 내면의 영성과 천국의 구원이 만나는 예배의 장소이기도 하며, 절대자의 진리 앞에 홀로 앉은 고요한 명상의 자리이기도 하다. 즉 현세의 길과 도피안의 길이 교차하는 지점이 바로 대성당이다. 성스러운 장소가 반드시 신의 영광을 찬미하듯 솟은 웅장한 열주와 아치, 그리고 고딕 양식의 높은 첨탑일 필요는 없다.

사람의 손만으로 만들어낸, 닿을 듯 닿지 않는 이 작은 공간 또한 하나의 성소이다. 평범하고, 소박하며, 단순한 인간의 손짓에도 대성당의 거룩함이 깃들어 있기에, 인간의 손도‘초월적 영성으로 이끄는 내면의 성소’라고 로댕은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 누구의 손인지, 로댕의 〈대성당〉에 묘사된 손의 주인공이 본질이 아니다. 사람의 손, 그리고 그것을 묘사한 예술 작품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고뇌와 기원, 그리고 인간이 세속적 존재로 살아갈 때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자잘한 삶의 편린들이 담겨 있다. 뒤러와 로댕의 작품에서 마주치는‘손’의 이미지는 ‘이름없는 자의 묵상’이다.

예술가가 평범하고 투박한 인간의 손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일까? 항상 우리 의식의 변방을 배회하지만 결코 우리의 관심에 들어오지 않는, 그러나 인간의 본질로 다가가는 길을 본 것은 아닐까? 뒤러도 로댕도 인간의 손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의 경이로움을 발견했을 것이다.

‘손’은 말없이 인간 존재의 깊이와 독특함을 부여한다. 바로 꾸준하고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단단하게 삶의 깊이를 더하고 영혼을 맑히는 일이다. 뒤러와 로댕의 작품에서 ‘손’은 소리 내어 외치는 그 무엇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천둥과 번개가 지나갔고 모든 소리는 잠잠하다. 다만 ‘기도하고 일하라!’

고단하게 땀 흘려 ‘노동하는 손’과 눈물 흘리며 가만히 포개어 ‘기도하는 손’은 둘이 아니다. ‘손’은 우리가 슬픔과 상실로 점철된 삶 속으로 관통하여 들어가 신성을 만나는 방법이다.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되지 마세요.

수행자가 되지 마세요.

깨달음을 얻지 마세요.

앉을 때, 있는 그대로 두세요.

걸을 때, 있는 그대로 두세요.

아무것도 붙잡지 마세요.

아무것도 거부하지 마세요.

깊이 울지 않았으면, 명상하지 않았습니다.

아잔 차(Ajahn Chah, 1918-1992, 태국)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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