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감정의 동기 찾기

이유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그 사람이 그냥 싫은 경우 있다
하지만 싫음의 원인을 찾아내면
삶은 그로부터 한결 가벼워진다

싫은 사람의 장단점 글쓰기
살다보면, 별다른 이유 없이 그 사람이 싫을 때가 있다. 까닭 없는 눈물처럼 슬그머니 지우고 싶은 사람.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외면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며칠 전 논쟁으로 인해 아예 꼴 보기 싫은 친구도 있다. 내가 왜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나 싶으면서도, 막상 만나면 둘도 없는 사이처럼 호들갑 떠는 관계도 있다.

나는 왜 싫어하면서도 싫다고 못하는 거지? 내가 싫어하는 거 맞긴 해?’

싫은 사람의 장단점 찾기는 그런 점에서 내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 제대로 살펴보자는 의도가 깔려있다. 그를 싫어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나. 그의 말본새? 아님, 행동거지? 몸 냄새? 걸음걸이? 이런 품목 중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형성됐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자주 듣다보니 부지불식간에 퇴적된 악감정일 수도 있다. 타인의 말이나 소문에 노출된 경우, 그 말을 전해주는 이에 대한 신뢰감이나 그와의 권력적 상하관계, 인간적 교류 정도에 따라 당신의 평가는 흔들릴 수 있다.

싫은 사람의 장단점 찾기는 미처 나도 모르는 내면의 진영논리(陣營論理) 드러내기작업이기도 하다. 전쟁터의 병사처럼 덮어놓고 피아(彼我)가 명백한 상황이라면, 이런 작업할 이유조차 없다. 당신은 선택의 여지를 상실한 기계 상태이므로. 그러나 당신 스스로의 자존과 자율, 자유의 덕목을 소중히 여긴다면 이 작업의 가치는 크다. ‘내가 왜 그를 싫어하는지’ ‘그의 장점은 무엇인지를 통찰함으로써 그에 대한 부정성이 어떤 동기로 형성됐고, 왜 그를 마음의 적군으로 치부하는지, 치밀하게 비춰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당신 감정의 주인이 되는 작업이다.

이를 통해 당신은 싫은 사람에 대한 마음의 원인이 본인의 오해나 결핍, 트라우마에서 기인됐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질식할 것처럼 숨넘어가는 어린 시절의 당신과 조우할 수도 있다. 증오와 무력감, 좌절, 수치심 따위의 부정성 집하장 같은 어느 한 시절과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싫음의 원인이 나였구나.’

그 시절 내 상처가 투영된 것이었구나.’

이런 글쓰기를 통해서 마음의 적군(敵軍)이 나를 자각하는 매개체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면 삶은 그만큼 가벼워지지 않겠는가.

- 본인이 현재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나에게 싫은 사람, 나에게 좋은 사람, 나에게 싫지도 좋지도 않은 사람을 분류해본다.

- 왠지 모르게 싫거나 거부감이 드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의 표정, 태도, 말투, 걸음걸이, 미소 띤 모습, 웃음소리, 언젠가 듣게 된 말 등을 세세히 적어본다.

- 좌우 대칭 표를 만들어서 싫은 사람의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것과 단점이라고 생각되는 점을 나열해본다. 장점을 적기 싫으면, 그의 키, 생김새, 표정, 말투 등 알고 있는 내용을 사실 그대로 적어본다. 그가 언제, 어느 순간에 싫어졌는지 구체적으로 적어본다. 그런 후, 그의 싫은 점이 내 기억 속 어떤 사람, 어떤 시기, 어떤 상황 등과 겹쳐지는지, 하나씩 적어본다.

- 자신이 싫거나 거부감을 갖는 사람을 떠올려서 그에 대해 직접 보거나 경험한 사실과 제3자에게서 들은 말 등을 분류해본다.

- 자신의 기억 속, 부정적 사건이나 상황을 떠올려본다. 그 일에 대한 주관적인 장·단점을 간략하게 적어본다.

이쪽저쪽, 편 가름하는 나의 감정선은 돌쇠처럼 재빠르고 충직하다. 그럴 법도 하다. ‘좋고 싫음이라는 느낌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불가결한 윤회의 한 축이다. 싫고 좋고의 느낌은 생명 탄생기부터 세포 하나하나에 유포된 천부적 분류 감정이다. 갓 태어난 영아도 싫거나 낯선 감각은 밀어내려 한다. 유전 공학이나 뇌 과학의 관점에서도 좋고 싫음은 유전자의 흐름을 타고 내려온다. 그러므로 실망할 일 아니다. 내 탓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파충류의 뇌 시절부터 이어져온 핏줄 탓이고 조상 탓이다. 그들은 그런 느낌에 의존하여 맹수를 피하고, 적을 피하고, 재해를 피해 살아남았다.

수십만 년 전 조상의 돌도끼를 지금도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도끼 시절의 감정을 걸핏하면 휘두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상대의 생각이 내 철학과 맞지 않으면 즉시 싫은 사람, 불온한 사람으로 분류하는 내 안의 돌도끼. 이 케케묵은 원시 감정의 화신이 되어 먼 조상의 춤판과 접신된 상태를 우리는 전쟁이라고 명명하는 게 아닐까.

잘 살펴보면, 좋고 싫음의 감정은 회색처럼 모호할 때가 잦다. 사회적 쟁점에 대한 친구와의 논쟁에서 가끔 듣는 말이 있다. “왜 싫은지 설명이 필요해? 싫으면 싫은 거지. 나는 그냥 싫어!” 이처럼, 말인지 감정인지를 함부로 내던지는친구는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싫은 이유는, ‘어떤 사안에 대한 일도양단식 무관용에 대한 거부감이다. 좋은 이유는 그런 단순, 직설, 담백의 언어를 내던져도되는 친밀한 관계의 확인이 즐겁다. 어찌 보면, 이런 두 감정의 교직이 오래 묵은 인연의 특성 아닐까. 내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회색 같은 모호함이라니. 내 안의 자괴감을 주시하면서 이런 질문을 다시 해본다.

당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타인들도 모두 싫어합니까.”

타인들도 싫어한다는 근거를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좋고 싫음 감정은 향후 얼마나 가는 것입니까.”

관점 바꿔 글쓰기
관점 바꿔 글쓰기는 당신이 일시적으로 조물주가 되는 글쓰기 기법이다. 비록 세상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더라도 당신은 하나의 사안을 두고 다양한 관점을 체험함으로써 낯선 생각과 의미의 탄생을 주도하게 된다. 관점을 바꿔본다는 것은, 내가 타인 혹은 물건이 돼보는 도전성이 개입하는 일이다. 관점을 디자인하라의 저자 박용후는 관점 바꾸기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듣고, 느껴지지 않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관점 바꿔 글쓰기나라는 자아의 일시적 소멸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공감 강화 연습이다. 내가 나를 떠나 그 사람이나 사물이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변환이 익숙해지면 상대에 대한 이해나 수용 근육이 튼실해진다. 나를 섭섭하게 하거나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 그의 입장이 돼보는 힘을 갖추는 일이다. 어떤 사건 당사자로서 그의 마음을 잘 소화한 후, 그의 거친 행위에 대해 평화롭게 살펴보는 힘 갖추기 학습이다. 아직 덜 떨어진 인간적 감성 수준에서 말하면, 적진 내면으로 들어가 내안의 불꽃조차 태워버리는 탁월한 복수법이다.

관점에 관한 불교명상적 체계가 있다. 불교는 소위 나라고 하는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망해보는 일에 공부의 중심을 둔다. 불교명상은 모든 존재의 연결성이라는 관점에 방점을 찍는다. 눈으로 보기에는 분리돼 있지만 아뢰야식이라는 깊은 의식 속에서는 당신과 나 그 어떤 것도 본질적으로 분리돼있지 않다는 연기(緣起)적 관점이다. 서양 심리학자 칼 융의 이론에서도 엿보이는 연결성과 전체성 논의는 현대 양자물리학을 통해 과학적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관점 바꾸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뭘까. 변명할 만한 사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처럼 갖게 된 귀중품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면 당신의 관점은 귀중품에 묶이기 십상 아닐까. 이 문제는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인의 삶을 귀중품으로 대체하면 분명해진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현대문명 전반을 내면화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내적 정서는 소위, ‘속도와 물질과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가득하다. 이런 의식이 강하다보니, 이 흐름에 대한 반동적 사유 또한 팽창하게 된다. ‘느림과 평정과 죽음공부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이것은 자아 성찰적 삶을 기본 지표로 삼는다. 글쓰기명상과 자기상담또한 느림과 평정과 죽음공부의 실천적 한 쪼가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느 언어 쪽으로 가는 편인가. ‘속도와 물질과 죽음에 대한 저항인가 아니면, ‘느림과 평정과 죽음공부쪽인가. 관점을 바꾼다는 것은, 이와 같은 시대적 거대 담론을 직시하며 삶의 진정한 방향성을 탐색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소한 사안을 연습하는 것 또한 이 시점에서는 실속 있는 자기사랑이기도 하다.

- 나를 혹은 당신으로 바꾸어 오늘의 일기나 메모 작성하기

- 나를 혹은 그녀로 바꾸어 일기나 메모 작성하기

- 나를 화나게 한 그 사람이 되어, 나에게 말하듯이 글쓰기

- 지금 내가 당면한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의인화하여 나에게 글쓰기

- 나를 다른 사물이나 하늘의 입장으로 바꿔서 나 자신에게 말 하듯이글쓰기

- 내가 기르는 반려동물이 되어 나에게 말하듯이 글쓰기

- 지나간 내 삶의 어느 한 시점을 의인화하여 지금의 나에게 글쓰기

- 죽음을 앞둔 내가 되어 지금의 나에게 글쓰기

관점 바꿔 글쓰기는 막연한 생각이나 상상하기와는 다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의 흐름을 문자로 드러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손에 펜 따위를 쥐지 않고 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그냥 입장 바꾼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나 상상만으로 그의 입장이 돼 보는 것은 강한 정신력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런 훈련에 익숙해져 있으면 상관없다. 다만, 자신의 입장이나 견해가 더 강하게 작용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자세는 유지하는 게 좋다. 자칫하면 자신의 입장이나 변명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수행하게 된다.

글쓰기는 그런 오류를 줄일 수 있어서 권한다. 지금의 사유를 문자화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관점을 조망하고 있는지 일관성과 지속성과 심화성을 담보할 수 있다. 당신은 단 한 어휘를 쓴 후에도 멈춰서 돌아볼 수 있다. 관점 바꾸기의 상대가 만약 사람이라면, 평소 그의 말투, 표정, 태도, 습관 등을 계속 떠올리면서 적어보는 데 무리가 없다. 모든 기억과 상상력을 총동원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 자신이 그에게 동화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상대의 입장과 나의 내면이 동일시되는 것이다. 동일시 된 자신을 알아차리면서 적어가는 일. 그의 심중과 감성이 당신 가슴의 진동판이 하나의 맥놀이를 하게 될 때, 당신은 그때 알지 못했던 그를 만난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옮아왔음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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