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자 작가 (81)

 

최혜자 작가는… 경기여중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1973년 태국으로 이주했으며, 마하짜끄리시린톤 공주의 〈법구경〉 해설 시집 〈불교 격언에 따른 시〉를 번역·출판(86년)하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1988년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살다가 2018년 가을 한국에 돌아왔다. 30대 말부터 질병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불교 공부와 그림 작업에 매진했다. 2018년 부처님 그림 63점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으며, 〈아들에게 남기는 어머니의 마음공부(올해의 불서 10)〉, 〈아픔을 다스리는 마음공부(세종우수도서)〉, 〈아름답게 늙어가는 지혜〉,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를 출간했다.

 

끝없는 생애 시련
태생부터 연좌제로 고난 시작
결혼 3년 만에 남편 사별
30대 말 병마와 투병 시작
1973년 아들과 태국 이주
1984년 〈법구경〉 번역서 출간
계기로 불교 공부 시작
불교공부 6년 만에 불교귀의
눈 수술 후 연꽃그림 시작

 

자신을 평생 괴롭힌 병마를 인생의 가장 큰 선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수행’일 것이다. 수행이라는 말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오늘날에서 그것을 수행이라는 말로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민망스러운 일은 아닐까. 조심스러운 마음이다. 자신을 ‘부처님의 영원한 학생’이라고 말하는 최혜자는 평생 자신을 힘들게 했던 병마를 공부로 받아드리고, 삶의 동기로 삼았다. 미술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불교계에 이름 하나 적은 바 없는 그녀는 병마 속에서 부처님을 그리고, 아들의 바른 삶을 위해 부처님의 말씀을 옮겨 적으며 살았다. 부처님을 2백 점 넘게 그려왔으며, 불서를 4권이나 출간했다. 지난해는 그 그림들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이제 작가으로 불리는 최혜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시련 또 시련
최 작가의 인생을 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그녀의 삶 전반에는 시련이 가득하다. 특히 삼십대 후반부터 겪어오고 있는 병마는 그녀의 삶 자체다. 하지만 최혜자 본인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그녀는 남들이 시련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려움들을 오히려 삶의 동기로 삼았다. 그리고 그 삶의 동기는 치열하고 열정적인 삶으로 이어졌다.

최 작가의 시련은 가족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념의 시대를 살았던 최 작가의 고향은 함경남도 영흥이다. 선대의 대부분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다음 선대는 대부분 왼편의 길을 걸었다. 당시 이 땅에서 왼편을 바라본다는 것은 힘겨움이었다.

우선 연좌제가 그녀의 청춘을 묶었다. 당시 이 땅에서 이념의 문제는 마치 선과 악의 문제와 다를 바 없었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그녀였지만 그녀는 번듯한 법조계를 비롯한 공직을 꿈꿀 수 없었다.

시련은 이어진다. 그녀는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다. 대신 그녀의 곁엔 소중한 아들이 있었다. 홀로 아들을 키워야했던 최 작가의 삶은 치열해진다. 여성 홀로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건사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기도했다. 자신의 삶에는 오로지 어머니로서의 삶만이 온전하기를. 그녀는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삼십대 후반부터 큰 병마와 싸우기 시작한다. 이십대 후반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던 그녀는 ‘신경성’으로 시작되는 많은 병들을 얻게 된다. 아픈 날들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병마가 자신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이라고 말했다.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 병마가 있어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수 있었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만나다
최 작가는 불교의 나라 태국에서 불법을 처음 만난다. 1973년부터 다섯 살 아들과 함께 태국에서 살게 된 최 작가는 한ㆍ태문화연구원을 만들어 문화와 관련된 일을 했다. 그리고 1984년이었다. 이미 그녀는 많은 병들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누워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던 그녀였다. 1주일 일을 하면 2주일을 누워있어야 했다.

하지만 오랜 태국에서의 생활로 그녀의 이름은 왕실에 닿아 있었다. 태국의 왕실은 최 작가에게 마하짜끄리시린톤 공주가 쓴 〈법구경〉 해설 시집 〈불교 격언에 따른 시〉를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해줄 것을 부촉했다. 최 작가가 왕의 나라, 불교의 나라 태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모른 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경만을 마음에 두고 살았던 최혜자에게 〈법구경〉이라는 그 이름은 너무나 먼 언어였다. 그야말로 불교의 ‘佛’자도 몰랐던 최 작가였다. 태국어를 아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최 작가는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대사관을 통해 〈불교성전〉이라는 책을 구했다. 부처님의 생애를 비롯해 주요경전의 내용 등 불교 공부를 위한 전반적인 텍스트가 들어있는 입문서였다. 최 작가는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눈이 확 떠졌어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삶과 진리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들이 하나 둘 풀리기 시작했어요. 그 책(불교성전)에 다 있었어요. 부처님 말씀에 다 있었어요. 새로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다가왔어요.”

최 작가는 일을 위해 보기 시작한 〈불교성전〉에 하루하루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깊이깊이 끌리기 시작했다. 최 작가는병마와 싸워야 하는 하루하루를 견디며 불교공부를 이어갔고, 이태 뒤인 1986년 마하짜끄리시린톤 공주가 쓴 〈법구경〉 해설 시집 〈불교 격언에 따른 시〉를 한국어로 출간한다.

 

병마와 함께한 귀의·수행
1988년 프랑스 파리 이주
2002년부터 부처님 그림 그려
아들 위한 불교 책 집필
12년 후 〈아들에게~〉 출간
화집 포함 4권의 불서 출간
2018년 귀국, 전시회 열고
〈마음의 ~ 〉 화집 출간
부처님 그림 200여 점 그려

 

귀의, 그리고 첫 불사
1988년 최 작가는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최 작가는 왕실이 부촉한 출간을 마친 후에도 불교공부를 이어갔다. 불교에 빠져 살았다. 그녀는 계속 아팠다. 완치될 수 없는 병마와의 힘겨운 싸움 속에서도 그녀는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최 작가는 마침내 부처님을 마음속에 들인다. 귀의였다. 계사도 연비와 계첩도 없었지만 그녀의 귀의는 조용한 출가와 같았다. 마음 깊은 곳에 오롯이 부처님을 모셨다. 최 작가가 불교공부를 시작한지 6년만이었다.

“불교는 사람을 철들게 하는 가르침이에요. 그래서 좋았어요. 철이 들어도 몇 번은 들었어야 할 그 나이에 내가 철들어가는 나를 볼 줄은 몰랐어요.”

최 작가는 불교를 그렇게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새롭고, 삶을 생각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그런 그녀를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그녀의 아들이었다. 30년 넘게 보아온 어머니가 달라지고 있었다.

“엄마, 엄마가 공부하는 거 말이야. 그거 내가 알아보기 쉽게 적어줘 나도 좀 해보게”

어느 날, 최 작가의 아들이 말했다. 그녀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아들이 보기에 엄마의 성격은 너무도 강하기만 했던 엄마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엄마에게 부드러움과 넓음, 수용, 포용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 못된 성격이 변해가는 거 보니까 그 공부 괜찮은 공부 같아.”

다섯 살에 고국을 떠나 병마로 힘겨워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아들이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기댈 곳이라곤 성경밖에 없었던 모자였다. 최 작가는 아들의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불법의 위대함을 알게 된 최 작가는 아들에게도 불법을 전해주고 싶었다. 최 작가는 아들이 해달라는 일을 시작했다. 아들을 생각하며 적기 시작한 작은 글들은 ‘집필’이 되어갔다. 그리고 2014년 집필은 출간으로 이어졌다. 책 〈아들에게 남기는 어머니의 마음공부-운주사〉가 세상으로 나온다. 집필을 시작한지 12년만의 일이었다.

“아들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설명해 주자는 의미에서 내가 하는 공부의 과정과 마음과 정신자세,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내가 받아들이는 방법과 나의 생각을 밝히고, 아울러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선배들의 선문에 의지하여 정성을 다해 썼어요. 한 마디로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노트라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책은 그 해 ‘올해의 불서 10’에 선정된다. 그리고 최 작가는 그 이후로 〈아픔을 다스리는 마음공부(세종우수도서 선정)〉, 〈아름답게 늙어가는 지혜〉, 그리고 화집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를 연달아 출간한다.

부처님만 그리는 화가
최 작가는 2002년부터 부처님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부처님만 그린다. 2018년 가을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경기도 용인 NC갤러리에서 63점의 부처님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림의 반응은 종교를 떠난 반응들이 많았다. 평온을 느끼게 한다는 최 작가의 부처님은 종교와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최혜자의 마음을 전했다.

1997년, 최 작가는 또 한 번의 큰 시련을 맞는다. 가을이었다. 그녀는 수술대에 눕는다. 안과 수술이었다. 잘못하면 두 눈을 모두 잃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수술실로 실려 가면서 생각했다. “운이 나쁘다면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마취를 하고 누운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세계에서 문득 생각했다. “연꽃을 그리고 싶다. 두 눈을 잃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받은 두 눈으로 연꽃을 그리고 싶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서원했다. 다행이도 최 작가는 두 눈을 잃지 않았다. 퇴원 후 그녀는 수술 전의 서원대로 연꽃을 그리기 시작한다. 반쯤 찌그러진 눈으로 종이와 붓을 찾아서 연꽃을 그려본다. 그림공부라고는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이 전부였던 그녀였지만 그녀는 정성을 다해 연꽃을 그린다. 느닷없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연꽃이 일어났다. 아니 피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만 피는 꽃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2002년, 최 작가가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아들을 위한 집필(책 ‘아들에게 남기는 ~’)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최 작가는 문득 부처님을 그리고 싶어졌다. 연꽃을 그리고 싶었을 때처럼 문득 마음속에서 부처님의 모습이 일었다. 그야말로 최 작가는 부처님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랬다. 그녀는 부처님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무작정 유화물감을 사들고 온 최 작가는 부처님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자꾸만 일어나는, 그냥 둘 수 없는 부처님을 그녀는 그림으로 그렸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부처님의 모습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미술사 어디에도 없는 화풍으로 최 작가는 최혜자만의 화법으로 부처님을 그렸다. 화법은 마음속에서 일어난 부처님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었다. 유화물감 한 번 개 본적 없는 최 작가는 캔버스에 자신이 마음속에서 본 부처님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화가 탄생이었다. 부처님만 그리는 화가의 탄생이었다.

“집 안에서 오직 나의 병마들과 함께 혼자서 지내는 형편이니 미술 수업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간절히 그리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인가를 그리고 싶었다. 그것은 부처님이었다. 처음부터 잘 되지는 않았다. 화판을 덮고, 다시 붓을 들었다. 어제 마음속에서 보았던 부처님을 그렸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서 보았던 부처님을 그려나갈 수 있었다.”

최 작가는 불경을 읽다가 기쁨이 가득할 때 그 기쁨으로 붓을 잡고 부처님의 미소를 따라간다. 불경과 그림 사이에서 매일같이 몇 시간씩 보내고 나면 저절로 충만함에 빠져서 그날그날을 중병에 걸린 사람 같지 않게 평화스러움 속에서 보냈다. 그림을 그린 것이라기보다는 부처님의 학생으로서 부처님의 고요한 미소와 편안한 세계를 돌아다녔다. 우선 마음부터 가다듬었다. 깊은 고요에서 붓을 잡았다. 그리고 그려낸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을 느낀다. 그녀는 병마의 고통과 그로 인한 외로움을 그 부처들로 지나올 수 있어서 행복했다.

최 작가는 언제부턴가 아프리카 부처님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삶 전반을 지배했던 것은 ‘고통’이었다. 고통을 안고 살았던 최 작가의 마음이 아프리카의 고통에 가닿았다. 최 작가는 아프리카에도 부처님이 나투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닿았다. 최 작가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프리카 부처님을 그려내고 있다. 검은 얼굴의 아프리카 부처님은 최혜자만의 부처님이다. 최 작가는 그렇게 아프리카 부처님을 그리고 나서 좀 더 확장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게 됐다. 최혜자에게 있어 그림의 확장은 공부의 확장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려낸 아프리카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만중생의 곁에 머무는 부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됐다. 그로 인해 최 작가는 많은 경전의 가르침들을 새롭게, 더 깊이 있게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최 작가는 200여 점의 부처님을 그렸다.

올해 봄, 최 작가는 전시회에서 선보였던 부처님 그림과 글들을 묶은 책 〈마음의 평온을 찾아서-운주사〉를 출간했다. 부처님 공부 중에 얻은 최혜자의 공부와 그 공부로 그려낸 부처님 그림을 엮은 책은 최혜자라는 부처님의 학생이 쓴 그림일기처럼 보인다.

최 작가는 지금도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는다. 하지만 그의 얼굴 속엔 늘 부처님의 얼굴이 살고 있다. 늘 부처님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그리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불교공부라는 것이 그런 것이었다. 늘 부처님을 그리는 것, 그것이 불교공부였다. 최혜자는 오늘도 부처님을 그리고 있다. 아프리카 부처님을 넘어 또 어떤 부처님을 만나게 될까.

최혜자의 첫번째 부처님 그림(2003년 作)
최혜자의 ‘아프리카 부처님’
2018년 NC갤러리 전시회 모습. 중앙 최혜자, 좌 두번째 덕현 스님.

 

 

 

 

 

 

 

 

 

 

최 작가가 출간한 도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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