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이해의 길 15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있다. 붓다는 삶이 고통인 근본 원인을 집착에서 찾았고 이에서 벗어나면 열반, 즉 행복이 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집착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안내서가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이다. 팔정도는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가리킨다.

먼저 정견(正見)은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이는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내가 쓰고 있는 빨갛고 파란 편견의 안경을 벗어야 한다. 빨갛게 보인다고 해서 세상이 빨간 것은 아니다. 그저 착각일 뿐이다. 편견의 안경을 벗을 때 비로소 눈앞의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상을 알 수 있다. 정견은 곧 연기적 세계관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정사(正思)는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며, 정어(正語)는 바르게 말하는 것이다. 생각은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바른 말과 행동이 나오는 바탕이다. 언젠가는 밖으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각(意)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가운데 하나로 중시한다. 정어는 거짓말(妄語)이나 아부하는 말(綺語), 이간하는 말(兩舌), 험악한 말(惡口)이 아니라 진실 되고 곧은 말, 화합하고 부드러운 말을 가리킨다. 요즘처럼 TV나 신문, 인터넷 등 미디어가 중시되는 상황에서 정론(正論)을 펼치는 것은 정어의 중요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언론이 가짜 뉴스를 양산하여 국민의 눈과 귀를 흐리는 것은 심각한 망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다. 이는 곧 생명을 죽이거나 도둑질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서로 베푸는 일이다. 한마디로 악업(惡業)을 버리고 선업(善業)을 짓는 실천이다. 정명(正命)은 보통 바른 생활로 번역되는데, 특히 바른 직업윤리가 강조된다. 예컨대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에게 임금을 착취하는 것은 정명에 어긋나는 행위다. 정정진(正精進)은 글자 그대로 바른 정진을 의미한다. 붓다의 마지막 유훈도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것이었다.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마음을 훈련하는 수행으로 정념과 정정이 있다. 정념(正念)은 바른 관찰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한자 ‘염(念)’은 정사(正思)의 ‘사(思)’와 그 의미가 다르다. 정사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는 것이라면, 정념은 분명하게 ‘보는(觀)’ 것이다. 즉,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위빠사나(Vipassana) 수행법이 바로 정념이다.

마지막으로 정정(正定)은 바른 선정을 의미한다. 이는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수행이다. 마음이 산란하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바르게 볼 수 없다. 이는 마치 흔들리는 물결 속에서는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요동치던 물결이 고요해져야 그 안의 사물이 분명하게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고요해야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 즉 삼매(三昧, Samadhi)가 강조된다. 정념과 정정은 ‘수행의 길’ 부분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지금까지 행복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방법을 살펴보았는데, 이는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이다. 예컨대 양치를 하면서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했던 거짓말이나 상처 주는 말을 함께 씻어낸다면 아주 훌륭한 정어 수행이 된다. 평소 욕을 많이 하는 이들에게 양치 수행은 매우 좋은 실천이다. 산책하면서 산란했던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면 이는 곧 걷기 선(walking meditation)이 된다. 이뿐만 아니라 밥 먹고 일을 하며 잠자는 모든 것이 수행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선택해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팔정도는 출가자나 산속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곳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천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