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과천 연주암

 

 

해발 629M 벼랑 끝에 오르면 속세의 모든 미련과 그리움을 끊어낼 수 있을까. 그 옛날, 사라진 고려를 잊지 못했던 고려의 마지막 신하 셋은 그 그리움을 끊어내기 위해 절벽 끝으로 올랐다. 세상이 바뀌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에는 보위에 오르지 못한 조선의 두 왕자가 시절의 미련과 그리움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같은 곳을 찾았다. 하늘인지 땅인지 모를 그곳은 나한의 도량이었다. 기도가 전부인 하루와 멀어진 시간이 전부였던 그들은 나한의 품에서 한 시대를 잊었다. 그리고 시절과 함께 사라졌다. 도량은 관악산(해발 629M) 정상에 자리한 연주암이다. 그리고 도량의 끄트머리 기암절벽에는 마지막 그리움을 태우는 자리 연주대가 있다.

그리움으로 걷는 길
짙어가는 가을 하늘 아래 관악산 봉우리가 가을꽃처럼 피어있다. 10월에 접어든 하늘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가고 숲엔 단풍의 예감이 보인다. 산 밑의 등산로 입구에서 연주대가 있는 관악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약 3.5KM 길이다. 걸어서 약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코스가 있다. 과천향교쪽 등산로에서 시작한다.

그 옛날 그리움을 끊어내기 위해 고려의 신하들과 조선의 왕자들이 걸었던 발자국을 따라 길을 시작한다. ‘먼 길’이라고 생각하니 몸과 마음이 팽팽해진다. 길을 시작하면서 산 정상을 바라본다. 아직 암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벌써 암자의 마당을 거닐고 있다. 가슴 속으로는 법당의 향 내음이 다가온다. 백구나 황구도 한 마리 쯤 도량을 거닐고 있을까. 스님의 염불기도소리, 응진전 나한의 분명한 눈빛들, 연주대에 서있을 누눈가의 그리움, 이 생각 저 생각이 마음속에 빼곡히 들어찬다.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오르며 그 옛날 고려의 신하들과 조선의 대군들을 생각해본다. 그 시절은 어디에도 없는데 그 옛날은 분명 길 위에 있었다. 그들이 품었던 그리움도 함께 따라가 본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가을바람을 따라 숲으로 사라진다. 숲에는 가을이 오고 있다. 나뭇가지가 가벼워지고 나뭇잎은 늙어간다. 모든 것들은 이제 덜어내고 덜어지고 있다. 그리움을 생각하기에 좋은 길이다.

그 옛날 그들의 그리움은 시대가 만든 그리움이었다. 그리움이 되지 않은 시대가 있을까. 모든 시대는 언젠가 저물고, 저문 시대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시절 속에서 소소한 그리움들로 살아간다. 숲의 한 시절도 저물어간다. 모든 것들은 이제 그리움이 되는 일만 남았다.

그 옛날 고려의 신하는 기울어가는 고려의 충신 강득룡, 서견, 남을진이었다. 세 신하는 연주대에 올라 고려의 도읍 쪽을 바라보며 저무는 한 시대와 한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그리움을 이내 씻었다. 이들 셋이 그 옛날 연주암을 찾았을 때는 연주암의 편액이 ‘관악사’였다. 연주대의 이름도 지금과 달랐다. ‘의상대’였다.

두 왕자는 조선 태종의 두 아들 양녕과 효령대군이었다. 태종이 창녕대군에게 보위를 내주자 두 왕자는 왕좌의 미련과 왕조의 그리움을 끊기 위해 멀리 멀리 걸었다. 그 때도 역시 연주암은 관악사였고, 연주대는 의상대였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두 왕자의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해갔다. 두 왕자는 할 수 없이 왕실이 보이지 않는 자리로 관악사를 옮겨 짓는다. 지금의 연주암 자리는 그 때 옮겨 지은 도량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두 왕자는 그리움을 끊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그 어떤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에는 어떤 시비도 없다. 문자로 남는 것만이 기록은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기록은 오히려 튼튼했다. 불에 탈 염려도 없고 바람에 날아갈 일도 없었다. 그 이야기 속에는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의상대를 연주대로 바꿔 부르게 된 연유가 들어있다.

관악사의 바뀐 이름 연주암은 고려를 잊지 못한 신하와 시절의 선택을 받지 못한 조선의 두 왕자의 심정을 후대의 사람들이 도량의 이름으로 바꿔 부른 것이다. ‘연주암’은 그리움의 도량이다. 그것도 한 시대 한 나라를 잊지 못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머물고 그리움을 끊어낸, 참으로 애틋한 도량이다. 후대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 것이다. 암자의 이름은 그렇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애틋하게 살아낸 자리라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 내일을 물어볼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의상대에서 의상의 시절을 지우고 대중의 그리움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연주암은 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관악사가 시작이다. 연주대가 의상대였던 것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연주암중건기> 등의 자료에는 의상 스님이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했으며,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현존 유물이라든가 의상 스님 관련 문헌 등에서 이 같은 내용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현존하는 경내의 3층석탑이 고려후기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창건 연대를 최소한 고려부터 시작할 수 있다.

길은 어느덧 산문에 가까워진다. 남은 길보다 지나온 길이 더 많아졌다. 남은 길보다 지나온 길이 많아진다는 것은 뒤돌아 볼 것이 생겼다는 뜻이다. 뒤돌아 볼 것이 많아진다는 것, 그것은 그리움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677년 의상대사 관악사 창건
고려신하·효령 전설로 개명
고려충신 강득룡·서견·남을진
조선 양녕·효령 마지막 거처

해발 629M 절벽에 응진전
삼층석탑 효령대군이 조성
연주대 이성계·무학대사 조성
이성계 조선왕조 번창 기도
명성왕후도 중수불사 지원
억불시대서 불교 명맥 지켜

 

연주대에 서다
가을꽃처럼 보였던 관악산 봉우리가 눈앞에 다가온다. 마침내 연주암이다. 마지막 돌계단을 오르면 바로 마당이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팽팽했던 몸과 마음이 꽃잎처럼 흩날린다. 백구나 황구는 보이지 않는다.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이 중심을 잡은 도량엔 스님의 기도소리가 들려온다. 산 정상에 열어놓은 아담한 도량은 단정하고 한가롭다.

연주암은 의상대사가 관악사로 창건한 이후 고려 말까지 거의 폐사되다시피 했다.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가 의상대와 관악사를 중수하고 조선왕조의 번창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뜻을 따라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마련한 암자다. 연주암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1868년(고종 5) 중수 때에는 명성왕후의 많은 지원이 있었다. 1918년에는 경산 스님의 불사가 있었고 1928년에는 재운 스님, 1936년에는 교훈 스님의 불사가 있었다.

연주암의 백미 연주대로 간다. 연주대로 가는 길에는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신 효령각이 있다. 전설 속의 양녕과 효령 이야기는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효령이 불교에 마음을 쓴 것은 사실이다. 그는 배불의 조선 속에서 수륙재를 열고 회암사의 중수를 이끌고 흥천사 탑전을 보수하는 등 유학자들의 온갖 비난을 무릎 쓰고 배불에 동참하지 않았다. 연주암 삼층석탑을 조성했으며 원각사 조성도감도제조를 맡기도 했던 그는 1465년에 <반야심경>을 언해했으며 주로 사찰에서 칩거하며 수행했다. 배불과 억불로 나라를 이끌려했던 조선은 끝내 불교를 버릴 수 없었다. 아니 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불교는 사라질 수 없었다. 효령이 아니더라도 그 예는 조선사 전반에 걸쳐 꾸준히 있어왔다.

연주암 큰마당에서 약 400M를 올라가면 연주대다. 연주대 법당으로 들기 위해서는 바위틈으로 난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한다. 스님의 독경소리가 벼랑 끝에서 들려온다. 3평도 안 되는 응진전에는 스님과 불자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스님의 독경소리를 들으며 응진전 앞에 선다. 산 아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연주암도 한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 들어온 세상은 왠지 다른 세상처럼 보인다. 아마도 전설로 남은 그들의 이야기 때문인 듯하다. 그 옛날 고려의 신하들과 조선의 왕자들은 이곳에서 그리움을 바라보았고 그 그리움과 작별했다. 그리움을 향해 달려가고 싶어도 달려갈 수 없는 나한의 품을 짓고 그 애틋한 시절을 끊어냈다. 그들은 이곳에서 그 그리움의 세상을 잘라냈다.

많은 산새들이 응진전 앞을 드나든다. 그 옛날, 그 날도 새들은 날고 바람은 불었을 일이다. 그들이 들었던 산새 소리와 그들이 맞았던 바람 소리를 들으며 그리움, 그 필수불가결의 단어에 마음을 던진다. 중생의 삶에서 필수불가결인 그리움, 그것은 끊어내야 할 것인가. 아니면 간직해야 할 것인가. 스님의 기도염불 소리가 산 아래로 내려간다.

지금의 연주암은 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관악사가 시작이다. 효령대군이 조성했다고 알려진 연주암 3층석탑과 연주암 전경.
연주대 응진전에서 스님과 불자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연주암 가는 길>
길은 많다. 방법은 하나다. 걸어서 가야한다. 대표적인 코스는 과천 쪽에서 오르는 길과 서울대 쪽에서 오르는 길 두 가지다. 과천 쪽은 과천역 7번 출구에서 시작한다. 과천향교 쪽으로 이동해서 등산로를 이용한다. 서울대 쪽은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려서 버스로 서울대 공대로 이동해 등산로를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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