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해의 길 14

지난 호에서 마음과 현실의 간극이 집착을 낳고 이로 인해 괴로움이 생기는 구조를 살펴보았다. 한마디로 삶이 괴로운 것은 집착 때문이라는 것이 붓다의 진단이다. 따라서 집착을 버리면 고통도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집착의 불이 꺼진 상태를 열반(涅槃, Nirvana)이라 하는데, 사성제의 세 번째인 멸성제(滅聖諦)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다.

그런데 집착을 버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던가. 우리가 단순히 집착을 없애야 한다는 당위(當爲) 차원에 머물지 않고 생각과 현실의 괴리를 성찰하는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집착을 놓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집착이 일어나는 구조를 이해하고 ‘아하, 그렇지.’ 하고 나의 실존적인 문제로 인식될 때 비로소 생각과 현실의 간극은 조금씩 줄어들며 집착의 불은 꺼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생각과 현실의 간극을 줄이는 방향에 있다. 먼저 현실이 마음을 쫓아가면 당장엔 괜찮을 것 같지만, 고통의 근본 원인이 치유되지 않기 때문에 재발할 위험성이 크다. 흔히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젊다고 말하곤 한다. 요즘처럼 고령화된 사회에서 젊게 살려는 노력에 딴죽 걸 생각은 없지만, 이것이 지나쳐 집착으로 이어지면 고통이 뒤따른다. 여기에도 마음은 젊은데, 현실의 몸은 늙었다는 간극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주름을 제거해주는 보톡스나 성형수술은 늙은 몸이 젊은 마음을 따라가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삶의 활력소로 적절하게 활용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젊음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면 상황이 간단치 않다. 영원히 젊어지는 샘물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진통제일 뿐, 근본적인 치유라고 할 수 없다.

반대로 마음이 현실을 따라가면 어떨까? 젊은 마음이 늙은 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을지 몰라도 마음도 늙기 마련이다. 마음 역시 무상하기 때문이다. 이를 쿨하게 받아들이고 늙은 몸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지나간 젊음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느끼는 일이기 때문이다.

늙음에는 젊음이 범접하기 힘든 삶의 의미들이 담겨있다. 노인의 이마에 새겨진 주름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식들을 잘 키워냈다는 자부심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를 어찌 젊음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젊음은 근육이 만들어낸 인연이지만, 늙음은 주름이 만들어낸 인연이다. 복서의 주름에는 링과의 인연이, 정치인의 주름에는 유권자와의 인연이, 농부의 주름에는 흙과의 인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모두 지나온 삶의 소중한 역사다. 그 역사를 이끌고 온 주름은 또 다른 인연을 만들 것이며,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될 때 행복은 다가올 것이다.

이처럼 마음이 현실을 따라갈 때 고통의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다이내믹한 흐름을 읽지 못하면 자꾸만 과거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괴롭힐 뿐이다. 마음이 과거권력이라면, 현실은 현재권력이다. 과거권력이 현재권력을 이길 수는 없다. 이를 쿨하게 받아들으면 단번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훈련이 필요하다. 사성제의 네 번째인 팔정도(八正道)는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실천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젊어지는 샘물은 동화 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신비의 약이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생명수 또한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어리석은 믿음, 즉 미신(迷信)이다. 아들을 잃은 키사 고타미도 이런 믿음에 기초해서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수없이 찾아다녔다. 붓다는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직접 느끼도록 죽은 사람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 한 톨을 얻어오면 자식을 살려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냉정해보이지만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이 현실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불교는 순간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진통제가 아니다. 힘들더라도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서 제거해야 한다. 붓다는 미신에서 정신(正信), 즉 바른 믿음으로 안내하는 길잡이(導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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