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사

종로 봉익동에 위치한 대각사. 대일 항쟁의 산실이었던 이곳은 근대 역경불사를 이끈 곳이기도 했다.

용성의 대각사 창건

창덕궁 돈화문에서 종로 3가 쪽으로 조금 걷다보면 왼쪽 상가건물 뒤로 기와지붕의 처마가 살포시 드러난다. 이곳이 종로 봉익동으로 이 곳에는 용성 선사가 세운 대각사가 있다. 대각사는 여느 도량처럼 넓은 마당과 고풍스런 당우는 없다. 주변 지역 역시 상가와 민가가 밀집한 탓으로 숲과 어우러진 사찰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도심 한복판에 사찰이 존재하는 것 같은 어색함마저 있지만 대각사는 대일 항쟁의 산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이곳에서 한용운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걱정하였으며,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하였던 까닭에 광복 후 그 고마움에 김구 선생이 이곳을 방문하여 선사의 뜻을 높이 기렸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대각사는 규모는 작지만 역할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선사가 대각사를 세운 계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1864년 5월 8일 전라도 남원에서 출생한 선사는 14세 때 꿈에 부처님을 뵌 것이 인연이 되어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전국을 다니면서 안거와 운수생활을 통해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선풍을 확고하게 다지는 한편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깨달음을 구하였다. 한때 중국에서 건너가 선지식을 친견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귀국하면서 대중들을 위한 불교운동을 생각하였다.

용성, 대각사서 삼장역회 결성해
1960년대 대장경 역경 시작 
불교 대중화로 민족 정체성 지켜

그런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 1911년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은 신도 집에서 법회를 하다가 53세인 1916년 이곳의 민가를 구입해 대각사를 창건하고 불교 개혁을 통해 민족중흥을 발원하였다.

용성에게 있어 불교를 믿는 것은 삼계의 大夢을 깨달아 생사를 해탈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조 배불정책의 영향으로 수행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그런 병폐를 없애고 새 시대의 종교로서 그 가치성을 인정받고자 시작한 것이 대각교 운동이다. 이 운동을 전개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도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佛을 번역하면 大覺이기 때문에 대각교를 창립하여 우리나라 불교도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운동은 세계와 중생이 모두 밝은 성품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번뇌가 일어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천지와 내가 하나이며, 知覺의 성품이 잠복되어 있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 중생의 본심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하였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법회가 상설화되는 것이 최선이었다. 법회를 통한 불교교육과 신앙심 고취만이 신도들의 신앙적 자세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방안이 불교가 급변하는 사회에 주체적인 자세를 견지할 수 있으며, 타종교와의 경쟁에서 불교가 앞설 수 있다고 용성은 생각한 것이다.

용성의 삼장역회 설립과 譯經 의의

대각사는 근대 역경의 발원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지금은 많은 어려움 끝에 고려대장경의 한글번역이 완결되었지만 그 연원을 보면 이곳에서 시작한 삼장역회가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그 후 60년대 대한불교청년회의 한글대장경 번역 사업이 발원되고 마침내 대장경의 완역을 이루었으니 그 의의가 결코 작지 않다.

용성이 경전 번역의 서원을 세운 것은 불교계 대표로 3.1운동에 참여 후 옥중 생활에서 한글로 된 불교서적이 없다는 사실과, 타종교의 한글번역이 상당히 앞서있음을 뼈저리게 느낀 다음이다. 그가 수감된 서대문 감옥에 여러 종교의 대표와 신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하는 종교 서적을 청구하여 공부하며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책 모두가 한문이 아니라 우리 글로 번역된 것이었다. 그것을 본 용성은 경전번역이라는 큰 원력을 세웠다.

그런데 그 생각을 여러 사람과 논의하였지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적었다. 교단적인 차원에서 실행해야 할 과제라는 생각해서 각 사찰에 공문을 보냈으나 협조하는 사람은 없고 비방하는 사람만 많았다. 주변의 협조가 없자 혼자라도 실행할 것을 결심한 용성은 1921년 출옥하자 대각사에 三藏譯會를 결성하고 번역을 시작하였다. 

실제 용성은 예전부터 한문 경전으로 포교하는 어려움을 지적하였다. 우선 한문 공부를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인류가 생존경쟁의 현실에 직면하여 경제적 가치에 관심이 많은데 어떻게 한문 공부에만 수십 년의 세월을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한 미래는 불교학만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인류가 처한 현실은 철학, 과학, 천문학, 정치학, 경제학 등등 배울 것이 많은 시대인 탓에 한문만을 공부하는 것은 문명 발달의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도들이 보는데 편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 누가 보더라도 즉시 알 수 있도록 번역되면 보급하기가 수월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불교 대중화와 연구의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용성은 이곳에서 금강경 번역을 시작으로 1927년 11월 화엄경 번역을 마칠 때까지 매진하였다. 척박한 사막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처럼 외롭고 힘든 일이지만 그는 평생을 거쳐 경전의 한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경전의 한글화와 전산화 작업이 진행됨을 볼 때 그의 안목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용성은 그런 자신의 작업이 당대에 끝날 것을 염려하여 유훈으로 10事目 가운데 일곱 번째 불경과 어록을 100만 권이 넘도록 유포시킬 것을 당부하였다. 실로 애정을 갖고 실행한 불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용성의 번역 작업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지니고 있어서 더욱 가치가 있다. 첫째, 그의 경전번역은 항일적 의미를 담고 있다. 용성은 3.1운동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처럼 독립정신을 강조한 수행자로 민족의 글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두 번째는 불교의 사회적 이미지를 높이려 한 것이다. 용성의 경전번역은 단순히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불교의 용어를 신선한 이미지로 재편하는 작업이었다. 경전 상의 게송을 우리말로 설법하듯이 바꾸고, 문어체의 딱딱한 표현을 구어체로 바꾸면서 언어를 통해 불교의 사회적 이미지를 높이려 하였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불교학의 발전이다. 경전이 읽기 쉽게 번역된다면 대중은 물론이고 전문가의 이해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중국불교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역장을 갖추고 지식을 갖춘 수행자들이 경전을 번역하면서 급속도록 발전한 것을 보면 용성의 생각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불교 持戒精神의 천명

일본불교가 진출한 이후 계율에 대한 문제는 한국불교의 논쟁거리였다. 한국에 온 일본 승려의 생활은 확실히 달랐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畜妻營室의 분위기가 지속되었다가 명치 5년에 승려의 대처식육은 승려의 임의에 맡기게 되는 것으로 결정되어 그 문제에 있어서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각 본말사법이 제정될 때에는 각 본말사의 주지를 비구계를 수지한 자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비구계를 수지할 때 대처식육한 자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대처식육에 관한 것은 사법이 제정될 때까지 대략 철저하게 지켜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일합방이후 일제의 강점이 오래 지속되자 한국의 승려들은 일본 승려와 같이 점점 계율에 대해 관용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분위기는 1919년 1월에 이르면 일제에 협력하던 수원 용주사 주지는 일본 승려와 한국 귀족의 여자 그리고 한국 승려는 일본 귀족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포교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을 할 정도로 불교계에 만연되어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널리 퍼진 것은 일본에 유학한 한국 승려 가운데 대처의 분위기가 현저하게 증가한 것도 한 몫 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1926년 5월 본말사법을 개정해서 대처식육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의로 이어졌다. 총독부는 불교의 사회화라는 미명 아래 승려에게도 육식대처의 자유를 허락하여 그들의 생활 결함을 보충하고 내적 생활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사법을 개정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런 결정은 법규상으로 시대에 순응한 조치이며, 이로 인하여 종교계의 인생관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불교가 더욱 사회화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논의는 당시 불교계 대부분이 찬성하였다. 당시 한국 승려들은 이런 개정에 대해 1,500여 년의 因習制度를 혁신하는 일이므로 승려와 일반신도들로 하여금 종래의 종교 습관을 버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므로 시대에 시운에 순응한 조치로 여겼다.

그렇지만 이런 개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한국불교의 청정성을 유지하려는 수행자들이 단결하여 대처식육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용성이 있었다. 그는 1926년 5월 석왕사 주지 이대전, 그리고 해인사 주지 오회진을 포함한 127명의 승려들과 함께 한국불교의 장래를 위해 대처식육의 생활을 금지해달라는 건백서를 총독부 당국에 제출하였다.

이들은 서양의 종교가 들어오고 불교계도 바뀌는 상황에서 간혹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기 시작하여 취처하는 승려들이 점점 많아졌지만 지금은 아주 펼쳐놓고 그와 같은 생활을 하겠다고 선전하는 것은 불교 교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를 망하게 하는 일로 생각하였다.

1차 건백서에 대한 응답이 없자 용성은 9월 2차 건백서를 제출하였다. 사법개정으로 승려의 대처화를 막을 수 없다면 대처와 비구를 구분하고, 비구를 위한 사찰을 할애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사법 개정의 논의는 대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처식육의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1926년 10월 총독부는 각 본말사법 제16조 주지자격 규정 ‘비구계를 구족’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승려의 嫁娶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개정 전 사법의 본사 주지에 대한 조문을 보면 연령이 만 40세 이상 되는 자, 비구계를 구족하고 다시 보살계를 수지한 자, 법랍이 十夏 이상 되는 자, 修學이 고등과 졸업 이상 되는 자였다. 이를 개정하면서는 제2호 ‘비구계 이하 15자’를 삭제하고 또 제16조 말사 주지 자격 가운데 제2호도 역시 삭제하여 주지는 비구계와 보살계를 구족하지 않아도 피선거 자격이 인정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한국불교의 정체성은 희미해졌고, 광복 후 정화운동으로 그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많은 손실이 생겨난 것을 볼 때 선지식의 예견이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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