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이 남긴 숙제, 상대 포용하기

무더위 끝에 그나마 남은 기운을 쏙 빼고 정신을 사납게 뒤흔들고 간 광풍은 태풍 링링 탓만은 아니었다. 여름 내내 식탁의 화제를 달구고 모임을 소란하게 한 정치인의 자질에 대한 시시비비는 9월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장관 지명을 두고 적합하니 못하니 천 만 국민이 한 마디씩 말씨름을 벌이느라 친구끼리 돌아서고 가족이 대립했다. 한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안의 무게로 보면 비교가 안 될 일인데도 몇 년 전 촛불집회와는 또 다른 반목과 갈등의 격랑이 모두를 지치게 했다.

공감 얻으려면 경청부터 해야
선한 호기심 상대호의 일으켜
분별 떠난 포용의 자세 필요

스트레스가 유난했던지 몇몇 지인이 코치이니 모범답안을 달라면서 이런 경우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고 하소연을 해왔다. 평소에는 정답기만 했던 친구와, 한 지붕 식구와 가볍고 무거운 입씨름에 몇 번 시달려본 지라 충분히 공감이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리라.

뉴스 따라 시작하는 말싸움

이른 저녁 텔레비전에서는 오늘도 그 뉴스가 오프닝을 장식한다.

“저 사람도 도덕군자인 척 하더니 별 수 없네, 표리부동이야. 제도를 이용해서 자식을 일류대학에 넣고 말이야.”

“입시제도가 그런 걸, 위법도 아닌데 뭘. 스펙 좋고 환경이 좋으니 자연스럽게 그 조건을 이용한 건데 지나친 비난 아니야?”

“법은 어기지 않았더라도 서민에게 박탈감을 주잖아. 배신감 들지.”

“다른 정치인에 비하면 별 것 아니네. 그 정도 먼지로 장관이 될 수 없다는 건 심하잖아.”

이렇게 시작하다가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기 위해서 상대의 평소 신념이나 가치를 헐뜯기 시작하면 본질과 달리 감정싸움으로 변한다.

“당신은 말이야, 지나치게 기울어 있어. 무조건 이 정권 편이냐”

“상대적으로 덜 나쁜 걸 똑같이 취급하니까 그렇지. 그러는 당신은 언론 보도를 너무 믿는 거 아니야. 동창 단톡방에 올라오는 가짜뉴스까지 그대로 읊어대고 있네.”

“뭐야? 남 말을 무조건 듣는다고? 이것저것 다 읽어보고 나름대로 생각을 말하는 거야. 당신은 현명하고 나는 무지하다는 거야?“

“결국 변화를 원치 않는 기득권의 저항에서 정도 이상으로 떠드는 거라니까. 뉴스를 너무 믿지 말라는 뜻이야.”

“그러는 당신도 입맛에 맞는 정보만 찾아보고 지금 그 논조로 말하는 거잖아.”

이러다가 한 쪽에서 소리를 질러대면 파탄 나는 극단의 대립이 된다.

“됐어, 됐어. 그만하자고, 말이 통해야 말이지.”

“먼저 소리 지른 건 당신이야. 대화를 안 하고 주장만 되풀이하잖아.”

결국 한바탕 소란 후 당분간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결론짓는다. 마치 정치가 우리 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세상의 일인 양.

정치라는 게 일상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이슈가 아니다. 자녀 입시부터 당장 부담하는 세금 액수와 환경 문제까지 바로 영향을 준다. 우리의 권리를 정치인에게 대신 맡겨서 힘을 주고 칼을 쥐어주는 것이니 결코 각자 인생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자니 정치 얘기를 하지 말자고 하지는 말자. 매일 먹고 싸고 입는 모든 게 다 정치 행위와 관련되니 말이다.

설득은 거리를 좁혀 다가가기

문제라면 경청하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방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우리들이 할 말은 쌓이는데 들을 줄을 모르는 탓이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곰곰이 듣고 있으면 이쪽에서 설득을 당하는 것 같다. 그래서 제대로 듣고 어떤 이유로 저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고 거기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반론을 펼칠지 차분히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 말을 빨리 끊고 이쪽 말을 할 시간만 노리고 있으니 대화는 겉돌고 목소리를 높여 주장을 되풀이 하게 된다.

상대를 조종하여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말고 거리를 좁혀 다가가려 할 때 참다운 설득이 된다.

의견이 다른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첫 번째 덕목은 참을성이다. 상대가 공감할 때까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려는 마음가짐이 우선이다. 직관으로 알건 논리로 알건 확고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차근차근 설명하고 상대의 피드백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소중하다.

다음으로 자신의 생각과 상대의 의견이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고, 자신의 주장과 그 근거를 상대방이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각자 추구하는 가치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관의 차이를 생각해 보자. 등수를 매기고 줄을 세우더라도 모두의 학습을 향상시키려면 경쟁이 필요하다는 믿음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이 첫 번째이며 그러다보면 진정한 학습이 된다고 보는 신념의 충돌이 있을 수 있다.

이럴 때는 그 가치를 서로 인정하면서 대화를 마무리할 수도 있고, 장점과 단점을 설명하고 나누면서 그 차이를 이해하고 상대의 가치에 따를 것인지 자신의 가치를 계속 주장할 것인지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가치의 차이에 관해 논하지 않고 선택을 서로 강요하는 경우 그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는다.

백트래킹으로 경청의 느낌을 알게 한다

의견이 다른 이와 대화할 때 공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코칭대화의 기술을 간략하게 정리해본다.

1. 늘 강조하지만 먼저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상대를 이기겠다는 생각 이전에, 왜 저 사람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지 선한 호기심을 가지고 듣는 태도가 필요하다. 진정한 호기심이 있으면 선량한 지성의 마음이 생겨난다. 이쪽의 선한 의지는 상대에게도 전달되어 이쪽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야겠다는 호의를 갖게 한다.

2. 경청이 끝났으면 상대의 주장을 짤막하게 되짚는 백트래킹을 하고 자신의 의견과 다른 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런 뜻이구나.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이해하는데 내 생각은 이래. 그 이유는 뭐냐 하면…”

3. 자신의 주장을 말할 때는 항상 그 근거를 구체화해서 쉽게 설명하자.

거창한 이론보다는 실증의 사례나 경험이 더 큰 공감을 일으킨다.

“주변에 이러한 경우가 있던데 그건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 혹은, “이렇고 저런 경험을 했는데 그 일을 당해보니 어떻더라.” 와 같은 식으로.

저명한 이론이나 전문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다 보면 그 말이 옳다는 사실을 근거를 들어 또다시 증명해야 한다. 게다가 유명한 이의 말이라고 반드시 옳다고 할 수도 없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자신의 삶이나 가치관을 토대로 주장해야 설득력이 생긴다.

이렇게 하는데도 상대가 자주 말을 끊고 자신의 주장만 계속한다면 참을성 있게 최소한 세 번 정도는 같은 시도를 해보고 안 되면 다음과 같은 말로 화제를 바꾼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오늘은 좋은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아.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어.”

이런 마무리가 무례하지 않게 상대를 배려하면서 자신도 존중하는 태도다. 감정에 치우쳐서 혹은 논리가 딸려서 고집스러운 태도만 계속하다가 유쾌하지 못하게 대화를 끝내면 되짚으면서 후회하게 된다.

‘아 그때 이렇게 말해야 했는데 왜 성난 태도로 고집만 부렸지?’

자신이 충분히 상대를 존중하면서 성숙한 대화를 하지 못했다는 자각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느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분별하지 말고 포용하는 법

붓다께서는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고 하셨다. 불교에 입문하고 가장 어려운 실천이 분별하지 않음이었다. 그러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라는 말인가. 진리가 있으면 진리가 아님도 있을 터인데 어찌 분별하지 말라는 말씀인지.

분별의 무용함을 알기 위해서는 불교철학의 근본인 공과 무아에 다가가야 했다. 불변하는 자아는 없다는 무아를 깨우치면서 자의식에 대한 집착이 분별의 마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데 익숙한 자아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방법이 분별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자, 분별하지 않음의 참다운 의미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분별하지 않음은 이기의 잣대로 판단하고 비판을 앞세우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옳지 않음을 받아들이라는 게 아니라 자기와 입장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상대를 너그럽게 포용하라는 뜻이 아닐까.

옳고 그름은 자신의 기준이나 사회 집단이 가진 통념의 기준에서 비롯한다. 새로운 기준이나 변화가 다가올 때 우리는 그 상황을 충분히 느끼지 않고 회피하기 위해서 자의식의 불꽃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불교가 추구하는 마음의 안녕과는 점점 멀어진다.

이 글은 사실 반성문이다. 나 역시 의견으로 대립하는 상대를 포용하지 못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대상에게 저항하면서 분노라는 부정의 에너지가 온 몸을 뜨겁게 하는 경험을 했다. 상대를 미워하고 그 비판을 되돌려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강퍅한 마음을 가졌다.

성찰은 늘 뒤늦게 일어난다. 명색이 코치이면서도, 공감하고 경청하지 못하고 목소리만 높인 지난 계절의 성숙하지 못했던 대화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과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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