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수행, 구법하는 마음으로 정진”

권탄준 원장은? 1950년 출생. 중학교 시절 축구선수였지만 감독들 눈에 들지 못하고 결국 고교 입시에 낙방했다. 할머니 49재를 위해 들린 문경 김룡사에서 성철 스님과 만나서 7일간 매일 삼천배를 하며 인생이 변했다. 2년여 행자 생활을 했던 그는 1972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한 이후 화엄을 전공하는 불교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동국대 불교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을 거쳐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2003년 금강대 불교학부로 자리를 옮겨 교편을 잡은 그는 대학원장, 불교문화연구소장 등의 보직을 맡았다. 2015년 정년퇴임했으며, 현재는 금강대 명예교수이다. 지난 8월 대행선연구원 제2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화엄경〉의 본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대방광’은 진리, ‘화엄’은 보살이 여러 가지 꽃으로 부처님의 연화장 세계를 장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화엄경〉은 선재동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오는 선재동자는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깨달음을 구한다. 그는 구도의 공덕으로 아미타불의 국토에 왕생해 입법계의 뜻을 이뤘다. 선재동자는 가장 모범적인 구도자이면서 이상적인 인간상이기도 하다. 그의 구법 원력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던지는 메시지가 크다.

대행선 연구로 인생 2막
8월 대행선연구원 2대 원장 취임
〈한마음연구〉 등재지 추진 과제
“‘대행선’ 정체성 바로 세울 것”
원력과 정성으로 연구 불사 매진

불교는 내 운명
유망 축구 선수였지만 진학 실패
할머니 49재서 성철 스님과 만남
“재 참석 말고 절 올려라” 질책해
이후 불교에 심취… 행자 생활도

대행선 연구, 불교학 지평 확장
권탄준 대행선연구원장(금강대 명예교수)은 학문과 수행에서 높은 구법 원력을 보여준 화엄학자다. 대행선연구원 제2대 원장으로 지난 8월 임명·취임했다.

9월 21일 대행선연구원 사무실에서 만난 권탄준 원장은 취임 소감으로 원력과 정성으로 연구 불사에 임할 것을 밝혔다.

“대행 선사의 삶과 사상을 학문적으로 조망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지난 2016년 창립된 대행선연구원은 지금까지 5차례의 계절발표회와 2차례의 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불교학계에서는 생소한 분야였던 대행선에 대한 객관적 담론의 장이 마련돼 관련 연구·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입니다. 이제는 대행선에 대한 학술연구의 외연을 넓히고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대행선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확립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떠한 사상을 학술적으로 올바르게 정립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집안의 모든 일은 정성과 원력으로 하는 법이라고 했으니, 정성과 원력이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면서 원장 소임을 시작하려 합니다.”

권탄준 원장은 약 17년 전 청도 운문사에서 인사한 것이 대행 선사와 인연의 전부였다. 본격적인 인연은 〈현대불교신문〉에 ‘화엄경 입법계품 강의’ 연재를 하며 대행 선사 지상 법문 ‘길을 묻는 이에게’를 접하며 시작됐다. 처음에는 ‘비구니 스님이 어떤 법문을 하셨나’라는 생각으로 읽었지만 이내 스님을 존경하게 됐다.

“수십 년간 불교서적을 보아왔으니 일반인보다 조금 더 이해가 빨랐죠. 난해하지 않은 평이한 선사의 법문들을 읽으면서 부처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행선연구원 제2대 원장으로 임명된 직후 가진 기념촬영. 사진 왼쪽부터 한마음선원 안양본원 주지 혜솔 스님, (재)한마음선원 이사장 혜수 스님, 권탄준 원장.

선지식과의 만남 그리고 변화
대행 선사와의 짧은 만남은 이제 대행선연구원장이라는 큰 인연으로 이어졌다. 앞서 권탄준 원장은 그의 인생을 뒤바꿔 놓은 강렬한 만남이 있었다. 바로 선지식과의 만남이었다. 그 선지식은 가야산 호랑이 성철 스님이다.

본래 권탄준 원장은 경북지역 축구 명문 춘양중학교에서 축구부 주장으로 센터포워드를 맡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당시 권탄준 원장은 축구에 인생을 걸었고, 고등학교 역시 축구로 진학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권탄준 원장을 원하는 고교 축구부는 없었고, 고교 입시에 실패하게 됐다. 선수 생활을 하느라 학업을 게을리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해 2월 중순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49재를 지내기 위해 문경 김룡사에 가게 됐다. 그곳에는 성철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49재에 나이 어린 학생이 오는 것이 의아했는지 성철 스님은 시자 스님에게 누구인지를 물었고, 시자는 “고교 입시에 낙방해 집에서 놀고 있다”고 답했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성철 스님은 불같이 화를 냈다. 성철 스님은 권탄준 원장에게 이 같이 불호령을 내렸다.

“못난 놈, 불알을 떼어 내삐리라. 명색이 사내대장부가 되어가지고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으면서 자기 앞길도 못 닦는 주제에, 죽은 너의 할머니 극락길을 닦아준다고 왔나? 너는 49재를 지낼 자격이 없으니, 49재에 참석하지 말고 앞으로 일주일간 매일 삼천 배를 하라.”

그렇게 시작한 삼천 배가 잘 될 리 없었다. 절을 할 때마다 스님에 대한 원망이 욕설과 함께 나왔다. 이것을 일주일 동안 한다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결국 소년 권탄준은 성철 스님에게 찾아가서 죽어도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성철 스님은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지금 너 집에 가면 죽는다. 그래도 갈 테냐”고 물었다. 겁이 덜컥 난 권탄준 원장은 다시 절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 회향날 철야기도까지 마무리한 권탄준 원장을 성철 스님은 칭찬하며 짧은 법문을 설했다.

“사람들이 흔히 ‘죽도록 해보았지만 안 되더라’는 말을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죽도록 해보지 않고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목숨을 떼어놓고 죽도록 하면, 공부든 사업이든 도 닦는 일이든 어떠한 일도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것이 힘들 때에는 ‘그렇게 힘든 절도 일주일이나 해냈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하며 분심을 내어라.”

집에 돌아온 권탄준 원장은 공부에 매진했다. 독을 품고 공부하니 잠도 오지 않았다. 오로지 ‘공부하다 죽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부했다. 집중해서 공부하니 책의 내용이 머리에 저절로 들어왔다. 그러기를 몇 달, 권탄준 원장은 서울 명문 경복고등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공부의 기초도 없던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성철 스님께서 가혹하게 절을 시켜주셔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마지막 날 철야정진이라는 특별선물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공부를 목숨을 걸고 죽도록 해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진학한 고등학교였지만 수업보다는 불교에만 관심이 갔다. 고등학생 당시 권탄준 원장의 별명은 ‘도사’였다. 실제 그는 진짜 ‘도인’이 되고 싶었다. 성철 스님을 찾아가 출가시켜달라고 졸랐으나 스님은 “요즘 세상에는 중도 대학을 나와야 하니 대학 졸업하고 군대 제대하고 오라”고 거절했다.

결국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 태백산 각화사에서 2년여 간 행자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만난 수좌 휴암 스님도 그에게 대학 입학을 권했고, 권탄준 원장은 1972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하게 됐다.

권탄준 원장의 행자시절 사진. 뒷줄 가장 오른쪽이 권탄준 원장이다.

“보현행원, 화엄 핵심”… 韓불교 실천 나서야

화엄학자로 살아가다
화엄 전공, 성철 스님 주신 화두
“中화엄, 철학적 측면이 강하지만
한반도 ‘해동화엄’, 실천행 강조해”
대행선사 한마음주인공 사상과 상통

한국불교학계에 대한 단상들
금강대 HK 교수 징계 안타까워
인물 연구, 일회성 그쳐선 안돼
불교, 이론·구호 아닌 실천 필요

화엄에서 길을 찾다
권탄준 원장은 동국대 입학 직후 성철 스님을 찾았다. 무슨 공부를 할 건지를 묻기 위해서다. 그의 질문에 성철 스님은 “교(敎)를 하려면 화엄을 하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화엄의 근본은 보현행원”이라고 했다. ‘화엄’과 ‘보현행원’은 권탄준 원장의 평생 연구 과제이자 화두가 됐다.
그래서인지 권탄준 원장은 화엄의 근본 정신은 철학적 교리가 아닌 실천행에 있다고 봤다.

“화엄(華嚴)은 ‘꽃으로서 부처님을 장엄한다’는 의미인데 구체적 의미는 아름다운 꽃에 비유할 수 있는 여러 보살행을 실천해 스스로 부처님의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참생명을 일깨우는 보살행을 실천함으로써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꽃피워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이유로 권탄준 원장은 중국화엄과 한반도의 해동화엄은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중국화엄은 철학적·이론적·관념적 성격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사상이라고 하면 관념철학이라고 하는 경향이 많다. 이 같은 성격이 형성된 것은 중국에 〈화엄경〉이 전래된 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적 성격이 짙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성립한 종파불교가 종학(宗學)의 사상 체계를 수립하면서 화엄사상이 정리된 것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해동화엄은 다르다는 게 권탄준 원장의 주장이다. 해동화엄은 관념 철학이 아닌 실천운동이라는 것이다.

“해동화엄의 초조인 의상 스님은 화엄사상의 이론 체계 구축보다는 화엄사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천적 성격에 주목해 수행과 교육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해동화엄의 실천적 성격이 꾸준히 이어지게 된 것이죠. 중국화엄이 부처님을 철학적 측면에서 파악·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해동화엄은 부처님을 인격적 측면으로 접근해 자신을 동화하려고 합니다.”
    
 

2015년 열린 한국불교학회 동계 워크숍에서 권탄준 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학문도 수행도 ‘실천행’
그는 한국불교가 ‘실천’이라는 덕목이 부족하다고 봤다.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올바른 법을 배우고 법을 바탕으로 실천적으로 살라”는 것이었지만, 현재 한국불교는 부처님 말씀처럼 살고 있지 않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에게 불교는 실천이다. 학문도 수행도 마찬가지다. 권탄준 원장은 스스로 해이해졌다 싶으면 혼자 또는 부인과 함께 삼천배 수련을 한다. 또한 금강대 개교 때부터 봄·가을 학기에 한 번 씩 삼천배 대회를 열기도 했다.

또한 한국불교학회장과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원장을 역임하며 불교학의 실천적 과제들을 다뤄왔다. 그는 2014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불교학회장을 맡아 △화엄사상과 실천 △불교와 세계종교 △퇴옹 성철의 불교전통 계승과 현대 한국사회 주제의 학술대회 개최를 이끌었다.

“학문은 이론과 구호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불교에 필요한 것은 실천하는 지성들입니다.”

최근 들려오는 금강대 소식에는 안타까워했다. 금강대의 인문한국(HK)를 이끌었던 중진학자들이 징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장 불교문화연구원이 발행하는 〈불교학리뷰〉에 인력이 부족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연구원을 인물 연구 모범으로
이야기는 불교계의 인물 연구로 넘어갔다. 최근 불교계는 문도를 중심으로 한 인물 선양 연구들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권탄준 원장은 가르침을 전하고 이를 계승하는 불교의 특성상 인물 연구는 중요한 연구 주제임은 분명하지만, 일회성 행사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찰과 문도에서 선지식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선양 행사를 위해서 이뤄지는 일회성 학술대회는 지양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마음선원이 창립한 대행선연구원은 불교계 인물 연구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매년 정기 학술대회와 계절발표회 개최, 학술지 발간 등이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행선 연구는 이제 권탄준 원장의 연구 주제가 됐다. 그는 화엄사상과 대행 선사의 한마음 주인공 사상이 상통한다고 봤다.

“스스로의 본성을 보살행을 통해 일깨우는 화엄과 수행과 실천을 강조한 한마음선원의 주인공·오공 사상들은 서로 맞닿습니다. 그래서 화엄과 대행사상의 상통점을 연구해 관련 논문을 연구원 학술지 〈한마음연구〉에 게재할 계획입니다.”

이제 백발의 노학자는 회향을 준비 중이다. 그 회향은 대행선 연구를 통해 이뤄지려고 한다.

“우선 연구원 학술지 〈한마음연구〉를 등재지로 만드는 것이 우선 과제입니다. 그리고 대행선의 본질적 성격과 정체성을 밝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대행 사상의 핵심을 불자나 시민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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