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 언어습관 관찰 버릇 있어
그럴 듯이 거짓말하는 사람 비판
‘윤리학자’로써 일종의 직업병일까

불망어계 따르면 구업 4가지 분류
‘욕·거짓말·이간질·아첨’ 해당

불교계 덕담, 구업들로 점철 많아
대화가 선문답처럼 들려서는 곤란
우리의 언어습관 다시 생각해보길

누구에게나 나름의 편견과 선입견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이 하는 일과 관련이 있을 때에는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유독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상대방의 언어습관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못된 버릇이 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읽은 책이 대부분 인간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혹은 좋고 나쁨의 가치 기준을 다루는 내용이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아무데서나 상식적인 수준 이상의 도덕잣대를 들이대려고 하는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다. 윤리학은 모든 사람에게 불보살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인간적 삶을 제안하고 있을 뿐이다.

주변에서 그럴듯한 말의 형식을 빌려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의 이런 태도를 비판했고 당연한 결과지만 그들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그러는 너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못마땅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비판의 대상은 동료와 선후배를 구분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나의 입바른 소리는 윤리적인 직업병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불망어계의 가르침에 따르면 입으로 짓는 악업의 종류는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우선 남에게 사나운 말(惡口)을 해서는 안 된다. 육두문자를 오남용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가슴에도 깊은 회한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거짓말(妄語)은 아예 처음부터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은 인간관계의 기본전제가 되는 신뢰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은 사람들 사이에 오해와 이간질을 불러올 수 있는 말은 특별히 삼가라고 하셨다. 화합중을 깨뜨리는 불화의 원인을 경계하신 것이다. 양설(兩舌)의 금지가 나온 배경이다.

마지막으로 의도를 가지고 듣기 좋은 말로 상대방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꾸밈말이 있다. 별다른 생각 없이 습관처럼 기어(綺語)를 남발하는 불자들은 이제 제발 자신의 구업짓기를 중단하기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불교계에서 흔히 주고받는 덕담(德談)이라는 말이 사실은 위에서 열거한 네 가지 입으로 짓는 잘못을 아주 교묘하게 배합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덕담이라는 이름으로 건네는 말이 도반이나 신자로 하여금 중요한 결정을 그르치게 한다면 그것은 이미 덕담이 아니라 악구고 망어며 양설이고 기어에 지나지 않는다.

덕담은 그 취지대로 연초에 한 해 동안의 건승을 기원하는 인사말로써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우리 불교계의 언어문화는 솔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타락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질이 낮은 수준이다. 일상의 대화가 잔뜩 멋을 부린 무슨 선문답처럼 들려서는 곤란하다.

독일의 윤리철학자인 칸트는 우리에게 거짓말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을 때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 확실할 때조차도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다그쳤다. 어떠한 외부조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런 마음가짐을 가리켜 칸트는 선의지(善意志)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선사했다.

덕담문화의 만연이 역설적으로 칸트의 선의지를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은 불망어계에 대한 모독이자 훼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의 언어습관을 한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볼 시점이 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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