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옥 총림 수행가풍을 체험하다

꼬비다 스님과의 수행점검 시간
삼매 없이 여실지견 불가능 확인
스승들 교리에 상통한 견해 가져
빠옥·마하시 가풍 차이도 느껴

필자의 수행점검 인터뷰를 담당하신 꼬비다(Kovida) 스님이 경내 탁발을 하는 모습.

오늘은 미얀마 수행처에 빠옥 총림의 일곱째 날(2012년 1월 28일)이다. 3시 30분 전에 일어나 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선방에 오를 준비를 하고 올랐다. 오늘은 6일간 숙소를 함께했던 스페인 요기가 이곳을 떠난다. 아침 공양 마치고 한국 스님의 꾸띠에 들러 커피 한 잔과 치약을 가지고 빨리 돌아왔다. 스페인 요기를 환송하면서 언제 다시 이 수행처에 올 것이냐 물으니 그는 곧바로 “과거는 역사이고, 미래는 신비이고, 현재는 선물이다(The past is history, the future is a mystery, the present is a present)”라는 명언을 던진다. 앞으로 어떻게 인연이 이어질지 자신도 모른다 한다. 배낭을 메고 한손에 짐을 든 그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홀로 길을 내려가는 그를 보고 간밤에 자기 전에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독일 등의 유럽이 자국어로 불교 경전을 거의 옮겼는데 스페인은 어떠한지를 물으니 아주 적은 분량의 경전만이 옮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 번역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하며 안타까워한다. 어제는 수행상황을 점검해주는 선생이 스페인에는 없어 슬프다는 말도 떠오른다. 그는 늘 자신의 공부 상황을 수행점검 스님께 보고하고 지도를 받았는데 진지한 그의 태도에 인터뷰 해주시는 스님이 저서도 한 권 주셨다고 자랑한다. 앞으로 전자메일을 통해 서로 소식을 주고받자고 하고 헤어졌다. 선방에 다시 오르면서 사진이나 같이 한 장 찍어 두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스페인은 남미 등을 식민지화하였지만 다른 유럽나라들과 달리 불교권 아시아 나라를 식민지로 두지 않은 이유로 불교문헌에 대한 번역이 저조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오늘은 수행점검의 인터뷰 시간이다. 꼬비다(Kovida) 스님에 실제 수행과 관해서보다는 교리적인 점에 계속 질문 드리는 것 같아 오늘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본다. 먼저 스님께 “사마타 혹은 삼매 수행의 확신을 위해 드리는 질문이니 양해를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전번 첫 인터뷰 때 스님이 경전과 〈청정도론〉의 전거를 들어 “삼매만이 여실지견할 수 있다는데,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더 나아가 “불교 수행이 아닌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고도의 집중훈련(intense concentration)을 하면 여실지견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부연의 말도 덧붙여 보았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오래전부터 모르는 바는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국내에서 나의 논문으로 지관차제 논쟁을 유발하게 한 이유이다. 하지만 나는 삼매가 바탕되지 않는 여실지견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경전의 경구를 도식적으로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사마타나 삼매 바탕 없이 위빠사나가 처음부터 가능하다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빠옥 총림은 삼매가 바탕한 여실지견을 강조한다. 스님은 삼매 즉 ‘집중(concentration)’은 어두운 밤에 불빛과 같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게 해주는 기능을 해준다 한다. 그래서 그 삼매의 불빛이 몸과 마음을 ‘관통(penetration)’할 수 있다고 한다. 비유적인 설명으로 현미경의 예처럼 삼매는 마치 우리 마음을 현미경과 같이 되게 하여 존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비유를 들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쩌면 내가 수업시간에 하는 비유적 설명과 똑같이 해 줄 수 있는가’하고. 답변에 대한 정리하는 말로 결코 삼매나 사마타 없이 위빠사나 또는 여실지견은 불가능하다고 이해해도 되겠느냐 물으니, 단호하게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Yes”라고 한다.

계속해서, 그러면 왜 경전이나 주석서에서 마치 사마타에서 위빠사나의 차제수행만이 아닌 위빠사나에서 사마타 수행도 가능한 것처럼 나타나는가를 질문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경전과 주석서에는 ‘사마타 행자’와 ‘위빠사나 행자’라는 두 종류의 수행자가 언급된다고 한다. 그리고 불교수행에는 색(色)와 명(名)에 대한 집중이 있는데, 등 등 자세한 설명을 해주시려한다. 그래서 순간 “스승이시여(Acariya)! 지금 많은 스님들이 인터뷰를 위해 기다리고 계시고 지금 이 설명은 좀 길 것 같으니 따로 시간을 내주셨으면 감사하겠다”고 말하고 물러났다.

많은 스님들이 차례로 입구까지 순서를 기다리며 자신의 수행상황에 대한 점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예를 표하고 뒤로 물러서 나오려니 승가사무실에 머무는 스님이 뒤에서 다 들었던지 나에게 두 번이나 엄지를 들고 활짝 웃어주셨다. 뒤에 기다리는 스님들을 위해 시간을 배려 잘해 주었다는 것이다. 가끔 법에 대한 대화는 더 없이 감격하게 한다.

빠옥 선원! 앞선 인터뷰에 이어 오늘에 이르러 이곳 스승들은 수행의 문제, 예를 들면 사마타 위빠사나의 문제 등에 있어 서로가 통일된 견해가 있음을 알았다. 즉 교리 이해와 수행문제에 있어 모두 상통하는 통일된 견해가 있고 그러한 입장을 분명히 제시한다. “아! 이것이 바로 불교공부의 가풍이란 것이구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왜 삼매만이 진리의 여실지견이 가능한가? 이 문제는 내가 불교공부를 선정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입문하면서부터 줄곧 쉬지 않은 질문이다. 결국 초기불교로 돌아가서 해결하려고 했던, 그리고 나름 해결했다고 자부했던 문제였다. 보통 삼매는 정(定)이나 삼매(三昧)로 번역되어 있고 (정신)집중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한다. 그래서 ‘집중이 어떻게 진리를 본다’는 것인가?  ‘집중이 생명의 근본 질을 뿌리부터 질적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이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고도의 집중력만이 생멸(生滅)의 무상(無常) 제대로 포착할 수 있다‘는 이유이다. 고도의 집중력이란 인터뷰 스님의 비유와도 같이 ’현미경 같은 눈‘을 갖추는 것이다. 평상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생명의 이면을 넘어볼 수 있는 또는 관통할 수 있는 법안(法眼) 또는 혜안(慧眼)을 말한다. 마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의 활발한 움직임을 전자현미경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듯이. 몸과 마음의 존재현상, 즉 끊임없이 쉬지 않고 찰라생멸하는 무상(無常)을 보는 것이다. 생멸의 무상을 보는 것 또는 볼 수 있는 단계가 바로 위빠사나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단순히 감각기관의 기능과 작용 또는 활동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다.”

빠옥 선원은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장소에서 수행을 한다. 낮 시간이지만 개인 공간처럼 모기장 안에서 좌선을 하는 출재가 수행자들.

일주일 간의 생활을 통해 빠옥선원의 특징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첫째,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장에서 공부한다.

둘째,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마하시의 경우 외국인은 다른 선방이 주어졌다.

셋째, 참선 일과표가 있지만 우리처럼 죽비 들고 경책하는 사람이 없다. 자율적이다. 따라서 억지로 시간 때우기 식의 좌선이나 오래 앉아 있기 경쟁은 없다. 우리의 경우 뚝심으로 오래앉아 있기 경쟁에 병 얻었다는 이야기도 가끔 들었다.

넷째, 낮 시간도 개인 공간처럼 모기장 안에서 좌선한다. 밤 시간은 완전 소등으로 캄캄한 편이다. 마하시의 경우, 희미하게 조명을 하였다.

다섯째, 행동이 자연스럽다. 이는 마하시와 비교되는데 마하시는 일거수일투족은 느리다 못해 마치 굼벵이와 같이 꿈 뜬 슬로우 모션이 강조된다. 여기서는 오히려 걸음걸이 등에 활력이 느껴진다.

여섯째, 앞에서 말한 비처럼 참선 일과표가 있지만 상당한 자율성이 부여된다. 앉고 일어서는데 경우에 따라 중간에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이 있지만 대단히 조용하게 앉고 일어서고 나가고 들어온다. 이러한 자율성은 졸리거나 흐리멍덩한 의식 상태에서 억지로 앉아있게 하지는 않는다.

일곱째, 이곳에서는 좌선하면서도 책은 물론 경전 공부와 조석 예불을 한다. 마하시에서는 독서와 기록이 원칙적으로 자제하도록 권장한다. 그리고 외국인 수행처에서는 조석예불을 하지 않았다.

여덟째, 이곳에서는 출가스님이나 재가자나 경내의 탁발이다. 이러한 장소를 초기경전의 ‘탁발(pinapta)’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마하시에서는 공양청의 둥근 탁자에 준비된 밥상에서 공양을 한다.

많은 스님들과 재가자 그리고 사미니 등 칠중이 함께 모여 공양을 드는데 ‘공양 중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계율 때문에 공양의 분위기는 조용한 가운데 장엄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나중 먹는 사람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라 먹는 대로 먼저 일어나 버린다. 그리고 이곳은 채식이 기본인 반면 마하시는 육류와 생선도 제공된다.

그리고 마하시 선원과 빠옥 선원의 일과표는 새벽 3시 또는 3시 30분으로 해 뜨는 시간에 따라 조금 달라진다고 한다. 이로 보면 우리나라와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비구들의 일과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같은 새벽 3시의 시작은 이번에 필자가 생각되는 바로는 오후 불식과 함께 일찍 잘 수밖에 없는 상황에 따른 일과표가 아닌가 싶다. 따라서 오후 불식하지 않는 한국의 경우 조정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 대표 종단인 조계종의 한 해 출가자 수는 1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이에 교계의 한 재가지도자는 새벽 3시에 일어나는 우리나라 사찰의 일과를 좀 완화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을 교계언론을 통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완화해야 하는 이유를 중국의 도교 영향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재고가 필요하다. 사실은 초기불교로부터 기원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불교권도 이와 비슷하다.

오후 좌선을 마치고 처소로 내려오는 길목에 일곱 여덟 살 먹은 남자애와 여자애들이 공부하고 내려오는 스님들과 재가자들에게 각각 사탕수수 즙을 낸 것을 패트병을 재활용하여 담아와 보시한다. 나도 하나 받아와서 아주 맛있게 마셨다. ‘미얀마는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애들에게 보시 공덕의 공부를 시키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스님과 재가도 어렸을 때부터 보시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며, 이는 불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