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 교수, 19일 불교평론 열린논단서 강연

세종·가족·학승 창제의 주역
서역의 역경승들 만들어 낸
‘反切’과 높은 관계성 ‘증거’
파스파 문자·梵字 영향 많아

비가라론에 정통한 신미대사
중성 11자 추가·언해에 일조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9월 19일 열린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한글 창제와 신미대사'를 주제 강연했다.

한국인에게 한글은 공기와 같다. 자연스럽게 사용하며 자신의 의사를 글로 전달하거나 말로 이야기한다. 세계에 유례없고 독창적 문자 한글에 대한 자부심도 크다. 그와 함께 이를 창제한 세종대왕을 ‘희대의 성군’으로 칭송한다.

이 같은 한글이 어떻게 제정됐고, 배경이론은 무엇이며, 주변문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에 대한 물음을 던진 것이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다. 

9월 19일 ‘한글 창제와 신미 대사’를 주제로 열린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정광 교수는 이런 합리적 의심과 의문을 청중들에게 먼저 제기했다.

‘영명하신 세종대왕이 유례가 없는 문자를 독창적으로 만드셨다’는 프레임에서 학자나 대중은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정광 교수는 “세종대왕의 독창적 창제라는 주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우리말·글의 연구에서 이 주장이 특별히 강조됐기 때문”이라며 “제왕인 세종이 혼자서 백성들을 위해 새 문자를 만들어줬다는 이야기는 신화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9월 19일 열린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한글 창제와 신미대사'를 주제 강연했다.

훈민정음은 인도의 비가라론 성명기론과 중국의 성운학, 파스파 문자, 범어 등을 깊이 연구해 만들어진 결과물이며, 이는 세종과 세종의 친족, 학승 등의 긴밀한 팀플레이를 통해 이뤄질 수 있었다는 게 정광 교수의 주장이다. 정광 교수에 따르면 한자를 표음하기 위한 파스파 문자 등 주변 문자와의 관계성은 이미 선학(先學)들이 조명해 왔던 일이다.

유희는 ‘언문지’(1824, 〈문통〉제19권)의 ‘전자례’에서 “언문은 비록 몽고에서 시작해 우리나라에서 이뤄졌지만 실제로 세간에 지극히 오묘한 것이다”라고 기술돼 있다. 이는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훈민정음의 몽고문자 기원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정광 교수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파스파 문자는 많은 지식인들이 알고 있는 한자음의 표음문자였다. 역관들의 과거인 역과에서는 파스파 문자를 시험 봤다”면서 파스파 문자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한자음 표음에 편리한 문자로 널리 알려졌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문제가 된 것은 당대(唐代) 장안의 서북방언을 기반으로 형성된 우리 한자음이 원대(元代) 이후 재편된 북경의 동북방언으로 발음되는 한자음과는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면서부터다. “세종은 같은 한자의 발음이 우리 발음과 중국의 발음이 서로 다른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고심했다”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반절(反切)’이다. ‘반절’은 서역 역경승들이 불경 한역(漢譯)하기 위한 한자를 학습할 때 한자의 발음을 표음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범자(梵字)를 반자(半字)로 나눠 배운 것처럼 한자도 발음을 첫 자음의 반절상자(反切上字)와 나머지 반절하자(反切下字)로 2자로 표음해 배우도록 했다.

정광 교수는 “훈민정음으로 불리는 언문은 ‘반절’로 인식했다”면서 “한글의 ‘ㄱ’·‘ㄴ’을 처음 보여준 〈훈몽자회〉 ‘언문자모’에서는 ‘반절27자’라고 했다. 언문을 반절로 본 것이다. 훈민정음은 새로운 동국정운식 한자 표음 기호라는 뜻”이라고 밝혔다.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는 9월 19일 열린 불교평론 열린논단에서 '한글 창제와 신미대사'를 주제 강연했다.

또한 정광 교수는 신미 대사가 새로운 문자의 제정에 가담한 것은 초기 반절상자를 언문 27자로 만든 이후라고 봤다.  

정광 교수는 “범자와 고대인도에서 발달한 비가라론의 성명기론을 전공한 신미 대사가 창제 사업에 참여하면서 범자의 모음자인 마다(摩多)에 이끌려 중성자 11자를 추가했다”면서 “이로부터 초성, 중성, 종성이 구비돼 이 문자로 우리말도 표기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미대사를 세종에게 추천한 것은 효령대군”이라며 “김수온의 〈식우집〉에 따르면 속리산 복천사에 주석하며 범자와 성명기론에 정통한 것으로 유명한 신미를 세종이 수양대군을 보내어 불러올렸고, 효령대군의 집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신미와 학승들은 언해 작업에서도 활약했다. 정광 교수는 “세종은 신미의 새 문자에 대한 지식을 인정해 수양대군, 김수온과 더불어 〈증수석가보〉를 언해하고 〈석보상절〉을 편찬하게 한다. 한자음만 아니라 우리말도 기록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세종 자신도 〈월인천강지곡〉을 저술하며 이를 확인했다”며 “이를 합편한 〈월인석보〉의 제1권 권두에 훈민정음 〈언해본〉을 붙여 간행해 우리말을 표기하는 새로운 문자를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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