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사상 詩 통해 세상에 보이다

당대 禪·詩 조예 깊은 학자 많아
두보·이하·왕유·이고 등 대표적
육조 비문 쓴 왕유 ‘詩佛’로 칭송
인간 긍정 사상 풍조로 이끌어

중국 쓰촨성 성도에 위치한 두보초당. 그는 선에서 삶의 진지함을 찾으려 노력했다.

앞선 연재서 백낙천(白居易, 772~846)을 언급했었다. 낙천은 당대(唐代) 문장가로 젊을 때는 선을 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정토를 신봉했다. 이처럼 낙천과 비슷한 시대에 재가불자 중에는 선과 시 모두 조예가 깊은 이들이 많았다. 곧 두보·이하·왕유 등인데, 이들은 불교적인 관점에서 많은 선시를 남겼다.

당시(唐詩)는 중국문학사상 최고 수준이요, 문학사에서 찬사를 받는다.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문화평론가인 위치우위(余秋雨, 1946~)는 세계적인 작가이다. 중국에서 그의 서적 해적판이 넘쳐날 정도이고, 우리나라에도 그의 책이 몇 권 번역되어 있다. 위치우위는 문화대혁명(1967~1976) 당시 혹독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는데, 자국에서 당시를 읽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다. 이렇게 시가 발달한 즈음, 유학자들도 선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때 발표된 시와 문학에는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개인의 자유가 녹아져 있다. 선과 시의 접점을 찾은 몇 인물을 만나보자.

이하(李賀, 790~816)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귀재(鬼才)로 불리었는데, 요절하였다. 그의 시에는 〈능가경〉과의 접목된 사상이 드러나 있다.

두보(杜甫, 712~770)는 안록산의 난을 겪으면서도 선사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의 선시 2편을 보자.

몸은 쌍봉사에 맡기고, 문은 7조의 선을 추구하네.
돛을 내리고 옛날의 생각을 따라 거친 베옷을 입고
부처님의 참된 진리를 추구한다네.

허 씨는 일찍이 오대산에서 불교를 배운 사람으로
그의 고결한 수행은 분주의 석벽곡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네.
나도 일찍이 승찬과 혜가의 선을 배웠지만,
나는 여전히 선적(禪寂)에 집착해 있을 뿐이라네.

전자의 시 구절에서 7조는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후자의 시에도 두보는 선사들과 교류하며 선을 추구했는데, 선의 고요함에 관념 두고 있는 자신을 비판하고 있다. 두보는 선을 통해 삶의 진지함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유(王維, 700~761)는 스스로 ‘왕마힐(王摩詰)’이라고 자처했는데, 자를 마힐이라 한 것도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따왔다. 그는 이 경을 독송하고, 문학 작품 속에 경의 내용을 적용시켰다. 그의 어머니는 대통 신수(大通神秀, 606~706)와 의복(義福)을 30여 년 모신 신심 깊은 불자였고, 왕유 또한 선사들과 교류하며 선사들의 비문을 써주었다.

왕유는 북종 계통의 〈능사사자기〉의 편자인 정각(淨覺, 683~750(?))의 비문을 써주기도 하였고, 남종의 대표 선사인 혜능의 ‘육조능선사비명(六祖能禪師碑銘)’을 써주었다. 
왕유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사찰에 다녀 불심이 깊었고, 9세 때부터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했다. 그는 21세에 진사 합격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안록산의 난 때 반군 포로가 되어 곤욕을 치렀지만 그의 관료생활은 비교적 평탄해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후에 그의 이름 대신 ‘왕우승(王右丞)’이라 부르게 된 것도 그의 벼슬 때문이다.

그는 31세에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하지 않고 평생 홀로 살았다. 성품이 고요하고 한적한 것을 좋아했는데 병약한 어머니를 위해 장안에서 멀지 않은 종남산(終南山)에 ‘망천장(輞川莊)’이라는 별장을 짓고 운치 있는 생활을 즐겼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별장 망천장을 선사에게 보시하였다. 

왕유는 초현실의 세계에서 노닌 인물로서 선이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다. 왕유는 자연을 주제로 한 서정 시인이요, 화가로 한 시대 이름을 날렸다. 그의 작품에는 무심(無生)·도심(道心)·공문(空門)·야선(夜禪) 등 선사상과 부합되는 용어들이 많이 있어 후대에 그를 ‘시불(詩佛)’이라고 불렀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당대는 인간 중심의 자유를 갈구하는 선이 발달되었다. 이 점은 유교에 영향을 끼쳐 새로운 사상으로 발전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전통적인 사유에 길들여진 지식인들도 불교의 철리(哲理)에 가까운 그들의 합리주의를 근거로 새로운 사상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한유·유종원·이고 등이다.

한유(韓愈, 768~824)는 유명한 논문 〈오원(五原)〉을 남겼다. 오원이란 원도(原道)·원성(原性)·원훼(原毁)·원인(原人)·원귀(原鬼)이다. 〈오원〉은 모두 근원적인 인간의 이상을 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원도(原道)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더듬어 밝힌다는 뜻이며, 원성(原性)은 본질적인 인간성 탐구를 의미한다. 한유는 공자·맹자 이후 훈고의 학문으로 떨어진 유학 사상을 인간의 학문으로 재정립시켰다. 이런 토대 위에서 한유는 “인간은 누구라도 학문과 수행을 쌓으면 반드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유는 선사상을 토대로 자신의 유학사상을 전개했지만, 불교를 비판했던 배불론자이다.

유종원(柳宗元, 779~831)은 한유의 배불론(排佛論)과는 다르게 불교를 존중하고 불사를 기록하거나 승려들의 비문을 많이 남긴 유학자이다.

이고(李헗, ?~844)는 한유의 문인으로 그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고는 처음에 불교를 비판하려 했으나 경전을 보고 감탄하여 〈복성서(復性書)〉를 남겼다. 그의 사상은 유언불의(儒言佛意)로 유교에 새로운 뜻을 열었다. 〈복성서〉의 내용은 본심·본성으로 돌아가는 ‘반본환원’ 사상이다. 그의 이런 사상은 송대 유학의 복성복초설(復性復初說)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한유의 원도(原道)가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반면, 이고의 〈복성서〉는 실천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유학의 입장에서 새로운 인간학을 제창하였다는 점이다. 이고는 유학자 신분이지만, 한유와는 정반대로 불교에서 마음의 심요를 찾았다. 선사들과도 인연이 깊은데, 몇 기연(機緣)을 보기로 하자.

이고는 오래전부터 약산 유엄(藥山惟儼, 751~ 834)의 명성을 듣고 있던 차, 서신을 통해 마을로 내려와 법문해주기를 청했다. 선사가 이고의 간곡한 청을 들어주지 않자, 결국 이고가 약산을 직접 찾아갔다. 마침 이때 약산이 경전을 읽고 있었다. 시자가 달려와 이고의 내방을 알렸지만, 선사는 들은 척도 않고 경전을 읽었다. 기분이 상한 이고는 발길을 돌리면서 선사에게 말했다. 

“얼굴을 보니, 천 리 소문만 못하군요!”
“어째서 귀만 소중히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십니까?”
이고는 감정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선사님, 도란 무엇입니까?”
선사가 손으로 위를 한번 가리키고, 다시 아래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들든 수그리든 숨길 것이 없음이요,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속에 있네.(低頭仰面無藏處 雲在靑天水在甁)”  
-〈전당문 336〉   
                 

이고는 약산의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그 뜻을 알아채고, 선사에게 예를 올리며 게송을 지어 바쳤다. 

“수행하신 풍채는 학과 같고, 천 그루 소나무 아래 두 상자의 경(經)이로다.
내가 와서 도를 물으니 다른 말은 없고,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고 하시네.(鍊得身形似鶴形 千株松下兩函經 我來聞道無餘說 雲在靑天水在甁 )”
-〈전당문336〉 

이고는 약산을 참문하고 마음을 깨친 후 선사의 유발상좌가 되었다. 한번은 이고가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을 찾아가 물었다. 

“옛날 어떤 사람이 병속에 병아리를 키웠습니다. 그런데 병아리가 점점 커서 마침내 병에서 꺼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병을 깨뜨리지도 않고, 병아리를 다치게 하지 않게 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스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자기 남전이 장관을 불렀다. “장관!”
이고는 엉겁결에 “예”하고 답을 했다.
“야, 나왔다.”
-〈전등록〉

앞에서 본대로 문인들은 선의 인간중심과 자유사상에 영향을 받아 수많은 선시를 남겼고, 유학자들도 불교를 비판하기 보다는 선의 영향을 받아 유교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즉 당나라 때의 선은 육조(六朝) 이래 귀족사회의 전통과 권위주의 혹은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문화를 인간 긍정의 사상 풍조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것이 송나라 이후의 문학과 철학의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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