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사 중심 ‘관음신앙’ 전개 터전
거사 중심 ‘관음신앙’ 전개 터전
  • 김경집 교수
  • 승인 2019.09.0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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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암

 

삼각산 화계사 뒤편으로 낮은 언덕을 넘으면 삼성암이 나온다. 삼성, 즉 독성, 산신, 칠성을 모신 곳이다. 1943년에 쓴 김태흡의 〈화계사 삼성암 중건기〉에 1872년 창건되었다 하니 아직 150년이 못된 연혁이다. 그렇지만 독성기도로 가피를 받은 불자들이 많아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청도 운문사 사리암과 함께 중요한 나한도량으로 꼽히는 곳이다. 중건기 제목을 보면 창건 당시 화계사 산내 암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거사신행활동 활발
고종 9년 묘련사 결사 거행
“내세적 구원사상 사회 전개”
거사에 의해 창건된 삼성암

삼성암의 가장 큰 특징은 거사들의 발원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신행 상황이 반영된 모습이다. 한국불교에서 거사불교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조선후기이다. 이 무렵 불교계는 종명마저 없어진 채로 산중에 은거하면서 선교를 겸수하면서 지냈던 무종단 시대였다. 사회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산중시대라는 한계적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교단 차원의 불교활동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여건 속에서 거사들의 개별적 신앙 활동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교단이 번성할 때 남자 신도들의 활동을 거사불교라 하지 않는다. 불교가 탄압받거나 교단이 쇠락해져 신앙 지도가 어려워질 때 생겨난 신앙 활동을 그렇게 부른다. 삼성암 역시 교단이 어려운 시기 거사들의 발원에 의해 세워진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창건기에 의하면 거사 박선묵은 16세에 발심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한양의 신도 유성종, 서윤구, 고상진, 이원기, 장윤원, 유재호 등 함께 고종 7년(1870) 봄 화계사 뒤 천태굴에서 3일 동안 지성껏 독성기도를 드렸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천태굴 아래 반석에서 쉬면서 고상진에게 말했다.

“나 같은 범부의 눈으로 보더라도 이곳은 그윽하여 아주 빼어난 신령스런 구역이라 할 만합니다. 만약에 암자 하나를 지어 여러 도반과 틈을 내어 참배하며 때로는 기도하고 때로는 양성도 한다면 이 어찌 대장부로서 통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암자를 짓자는 박선묵의 말에 고상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임신년(1872) 봄에 고상진이 몇 칸의 정사를 얽어 ‘소난야(小蘭若)’라는 현판을 걸고 부근의 산지를 사들여 절의 땅으로 삼았다. 박선묵은 고상진의 행동에 느낀 바 있어 10년 뒤인 1881년에 독성각을 새로 지으면서 암자의 면모를 갖추었다.

삼성암의 시작인 천태굴은 오래전부터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도선 스님이 삼각산을 살펴보다가 석굴에 이르러 그 기이함을 매료되어 여러 달 동안 머물렀다. 이 때문에 후세에 일반인들이 스님의 자취를 추모하여 석굴에서 기도하거나 숨어 수행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때로는 암자 터에 몇 칸의 초가집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세월엔가 빈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도선 스님이 수행했다는 전설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석굴이 ‘천태굴’이다. 나반존자인 독성이 부처님으로부터 혼자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수기를 받고 남인도 천태산에서 도를 닦아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내용으로 볼 때 이곳은 독성기도처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거사불교의 거점이었던 삼성암

조선후기 거사불교의 모습을 전하는 것은 여럿이다. 그 가운데 특별한 것으로 거사들 스스로 결사를 맺고 활동한 묘련사(妙蓮社)를 들 수 있다. 고종 9년(1872)에 한성에 사는 거사들이 관세음보살의 신묘력을 감응하고자 결성한 묘련사는 결사의 주체가 모두 거사였다.

묘련사가 시작된 것은 고종 9년(1872) 11월이었다. 그 후 고종 12년(1875) 여름까지 4년에 걸쳐 삼각산 주변의 암자와 거사의 집 등 일곱 곳을 옮겨 다니며 모두 11번의 법연을 가졌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사격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 바로 삼성암이다. 1872년 봄 거사들에 의해 창건되었고, 그 해 가을 거사들의 신행결사가 있었으니 당시 삼성암의 역할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런 신행 목적으로 모인 묘련사 거사들은 자신들의 신행담을 정리하여 책으로 발간하였다. 그것이 ‘관세음보살묘응시현제중감로’(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이다. 보통 제중감로라 불리는 이 책은 내세의 미타정토를 희구하는 신앙관, 선과 정토가 결합된 경향, 그리고 도가적인 성향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앙적 경이감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며, 묘련사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이러한 이야기가 모두 고종 15년(1878) 인가 거사가 쓴 제중감로의 연기문에 전해지고 있다. 이런 내용들로 볼 때 조선후기의 거사불교운동이 시대적 여건에 의해 일반적인 관음신앙을 표방하기보다는 신비적인 도가적 취향과 내세적인 신앙관 그리고 선정 결합과 같은 혼합적 성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삼성암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신행활동을 전개한 묘련사 결사가 주목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먼저 이런 거사불교를 통해 조선후기 같은 시대적 상황에서 불교가 지향해야 할 역할을 가늠할 수 있다. 묘련사가 결성된 1872년은 조선후기에 해당된다. 이 시대의 사회상은 우리가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절망의 극한상황이다. 정치의 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적인 여건의 붕괴로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웠다. 이 같은 현실은 고통의 세계이다. 이러한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듣고 일심으로 칭명한다면 보살이 즉시 그 음성을 듣고 관하시어 모두를 해탈케 한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관세음보살은 서원에 의해 생하여 서원에 의해 살고 항상 서원을 실천해 가는 보살이기 때문이다. 즉 현실고난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을 본원으로 하고 중생의 고뇌를 없애 안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관음신앙의 특징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과 의미를 담고 있는 묘련사 결사는 개항을 전후한 시기 종단의 활동이 미비한 상황에서 불자들이 자신들의 신앙관을 유지하고 아울러 중생들의 구제를 도모하여 불교를 지속시킨 힘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 지니고 있던 거사들의 신앙관이 표현된 점에서 당시 거사불교의 신행 모습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다음으로 묘련사 결사는 국가적인 차원이나 종단주도의 신앙형태가 아니고 거사들의 순수한 신앙운동에 속한다. 신앙결사가 국가의 의해 주도되면 결사의 본래 의미가 상실되고 국가를 위한 하나의 조직체로 변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대중적인 서원의 완성이 아닌 왕실을 위한 기복연명과 제재초복(除災招福)에 많은 비중을 두는 기복단체의 성격이 나타나게 된다.

묘련사의 경우는 그 소속 인원의 부류나 신앙적 경향에서 국가적인 차원이 아니다. 민간적인 차원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당시 대중 불교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불교가 발전하려면 교단이 국가적인 정책과 일치되어 사회를 주도해 가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상황이 되지 못했을 때 묵묵히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가는 대중 활동은 그 부족함을 메우는 방편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묘련사 결사가 현실의 고통을 없애고 보다 나은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내세적 구원사상을 배경으로 한 것은 바로 그 시대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함께 그 시대의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조선사회와 같이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평민이나 하층계급이 구제된다는 사상은 그들로 하여금 내세는 물론 현세에서도 신분 차별이 소멸된 듯 법열 속에 지낼 수 있는 기쁨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일반대중들이 신앙에 의지하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강한 신념을 가질 수 있다면 이것이 불교가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삼성암은 비록 작은 암자에 불과하지만 힘들었던 시절 불자들의 희망이 타오르게 한 도량이었던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삼성암의 재해와 가피, 그리고 영험

거사들의 서원으로 건립된 삼성암도 몇 번의 자연재해로 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1942년이었다. 그해 7월 유난히 장마가 심했다. 폭우가 계속되면서 산사태가 일어나 절이 무너졌다. 이 때 상황을 김태흡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맑은 밤이면 부처님의 이마 위로 별들이 빛나고 폭우로 신중탱화에 물이 흐르니 한갓 사람들만 슬퍼할 뿐만 아니라 신들도 울었으며, 산이 찡그리고 시내가 울부짖기에 이르렀다.”

자연재해로 전각의 지붕이 사라져 밤하늘이 보이고, 폭우가 들이쳐 탱화가 젖어 너덜거리는 모습이다. 이를 지켜보는 사부대중의 찢어질 듯 아픈 가슴과 자연의 애절함이 전해지는 듯하다. 삼성암의 재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회경이 중창의 뜻을 세웠다. 김용태 거사가 목재를 화주하였다. 삼성암 대중들도 힘을 보탰다. 원근 각처의 사찰과 신도 역시 동참하였다. 그 덕분에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의 전각이 세워졌다.

현대에도 삼성암에 위기가 있었다. 1984년 여름 장마로 산사태가 일어났다. 많은 물과 토사가 함께 밀려와 칠성각과 산신각이 무너질 위기를 맞았다. 그런데 뿌리 채 뽑혀 내려오던 나무 한 그루의 줄기와 뿌리로 법당을 감쌌다. 마치 문어가 다리로 감싸는 모습이었다. 그 덕분에 전각은 붕괴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신이한 광경을 본 대중들은 비가 멈추자 나무를 치우고 정성들여 3일간 산신기도를 봉행했다.

그밖에도 삼성암은 명성에 걸맞듯 나반존자의 가피를 받아 난치병을 고쳤다거나 아들을 낳았다거나 하는 등의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오고 있다. 그 가운데 공주에서 미곡상을 하는 임선달의 아들 수동이가 삼성암에서 지성으로 기도를 하고 꼽추가 된 몸을 고쳤다는 이야기는 대표적이다.

또한 1955년 3월 종로에 사는 황명휴가 한의사 시험을 앞두고 50일 동안 삼성암에서 독성기도를 올리고 가피를 받아 시험에 나온 양의학 문제를 푼 사례도 인구에 회자되는 영험담이다.

사진 : 북한산 삼성암 전경. 조선후기 거사들의 묘련사 결사가 진행된 곳으로 민간신앙으로의 불교 전개를 살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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