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과 저승도 한군데밖엔 통할 데가 없습니다

참자기를 발견하려면

질문: 인간으로 태어나서 내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되겠는데 참자기를 발견하는 지름길은 무엇인지요.

답변: 모든 걸 주인공에 맡기고 살아라. 맡겨 놔라. “맡기고 살아라.” 이러면 여러분이 더 실감이 날 거 같아서 맡기라고 그랬습니다. 한군데다 맡겨라. 믿고 맡겨라. 믿지 못하면 맡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맡겨라.” 이렇게 했죠. 무조건 맡김으로써 그것이 맡기게 되면 어디로 통과가 되느냐 하면 벌써 시각부터 통과가 되고 청각이나 촉각, 후각이 발로가 돼요. 그래 감각이 아주 영리하게 이 안의 심안이 밝아지죠. 또 그거 심안이 밝아졌다고 해서 도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꾸 밝아지고 이 뜻이, 자기가 생각하는 뜻이 쪼끔쪼끔 자꾸자꾸 이끌려 가는 거기에 의해서 이 다섯 가지가 자꾸 발로가 됨으로써 그때는 지견으로 들어가고 지각으로 들어가요. 그럼으로써 오신통을,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를 같이 쥐고 그대로 조끔조끔이라도 체험을 하면서 갈 수 있다는 얘기죠.

여러분이 항상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조상님들도 그 뜻을 알고 들고 나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몸체를 위패 삼아서 말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자기가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면 그걸 발견해서 자꾸자꾸 체험을 하고 가는데 또 그것 되는 것만이 이게 공부다, 잘된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안 되는 거, 되는 거를 다 놓지 않고 이걸 모르면, 내가 만약에 누구를 구해야 할 텐데, 과거로 돌아가야 내가 현실을 구할 텐데 과거로 돌아갈 줄 모르면 어떻게 현실을 구합니까.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안 되는 것도 되는 것도 양면을 다 놔야, 안 되는 거는 과거의 업으로 인해서 안 되는 거고 되는 것도 선업으로 인해서 되는 거니까, 그러니까 선업과 악업이 다 한데 합쳐져서 녹아 들어가서 자기가 그것을 자유자재할 수 있는 지혜와 심안이 밝아져야 하고 오신통이 다 밝아져서 그 오신통이라는 이름조차도 없이 자유자재권을 가져야만이 된다는 얘기죠.

그렇게 될 때까지는 자기가 체험을 하면서 자꾸 놔야 됩니다. “놔라” 하는 거 어폐가 있는 거 같지마는 다 자기 주인공에서 하는 거니까 거기에 모든 걸 맡기고 감사해야지 딴 데다간 안 되죠. 그게 바로 자기 나기 이전 조상이니까. 자기 아비니까요. 자기가 현재에 생각하고 사는 거는 아들이라면 그건 아버집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체가 없고 가만히 능력만 있기 때문에 움쭉을 하지 않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능력만 있는 겁니다. 여러분을 꿰어 가지고 굴리는 능력만 있어요. 그래서 심력이라고 해도 됩니다. 원심력이라고 해도 되고. 에너지라고 해도 되죠. 그렇게 한다면 바로 마음 내는 거는 자꾸 그걸 역할을 해서 굴려서 쓰거든요. 그것이 법이라고 보죠. 우리가 몸이 활용하고 이러는 것도 활용이고요. 그러니까 이 삼위일체를 공전하면서 돌아가면서 체험하면서 놓는다. 감사하게 놓는다. 이렇게 한다면 그게 바로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 둘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불자들에게 추석의 의미는

질문: 선원에서는 해마다 정월 촛불재나 백종 외에 한가위인 추석에도 합동 천도재를 올리고 있는데, 불교 명절도 아닌 추석이 불자들에게도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요.

답변: 우리가 농사를 지어서 밥을 먹을 때에 농사짓는 사람 혼자서 쌀농사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나 태양을 내려 주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일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추수를 하였겠습니까? 그러니 팔월 추석은 만물이 공생하는 작용에 감사하는 마음을 올리는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귀중하게 생각하고, 즉 말하자면 사람들 사는 것뿐만 아니라 천지가 다 그렇습니다. 우주가 다 살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해서 해 줬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더불어 같이 감사를 올리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당연히 조상님도 포함되는 것이죠. 그렇게 더불어 같이 부모님의 은혜도 생각하는 거고요. 자기를 낳아 줘서가 아니라 낳아 줄 수 있는 인연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이 맞겠지요.

그래서 팔월 추석을 지내는 그 뜻을 우리가 한 번쯤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분이든지 밥 먹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옷 입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물 안 마시고 사는 사람 없고, 불 쓰지 않고 사는 사람 없고, 땅 딛고 다니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가 팔월 추석이라고 하는 것은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서 그 첫 곡식을, 밥을 지어서 놓든 떡을 해서 놓든 무엇을 해서 놓든,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일체 만 중생과 더불어 같이 지수화풍, 또는 무정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마음들을 한데 둥글려서 마음으로 깊이 그 감사함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이것을 따로따로 얘기하는 것보다도, 몰아서 얘기하는 것이 간단하고 쉬울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런 마음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것입니다. 무한량이라고 하면 무한량일 수 있고, 작으면 바늘구멍 하나 안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것을 잘 생각해서 감사함을 느끼고 해야 할 텐데 진실하게 감사함을 느낄 줄을 모두 모릅니다. 더군다나 가깝게 있을수록 더 감사함을 모릅니다. 당장에 이런 것들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 못 하는데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생각을 안 하는 거죠.

물 쓰는 거와 불 쓰는 거와 땅을 딛고 다니는 거와 공기를 마시는 것에 그렇게 감사함을 느껴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낳아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일체 만물을 보니까 공부를 할 수 있고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고, 또 상대성 원리로써 개발을 할 수 있는 창조력을 기를 수도 있고 창조를 해 낼 수도 있는, 그러한 모든 여건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감사할 줄을 모르니 그 은혜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일체 만물만생 전부가 다 흙이든지 무정물이든지 식물이든지, 지수화풍을 막론하고 더불어 모두가 평화스럽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끔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이 그렇질 못합니다. 평화스럽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여하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질세계의 50%에만 전전긍긍하니 거기에까지 마음이 미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내가 산다느니 내가 했다느니 내가 말했다느니 그러면서 망한 거는 타의에서 망하게 했다느니, 저 사람 때문에 내가 못 살게 됐다느니 이러한 문제 등등이 모두 여러분의 마음에 사무치기 때문에 밝게 내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꼭 뭐를 많이 차려 놓아서가 아닙니다. 하다못해 초 한 자루 켜 놓고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향 한 개비를 피워 놓더라도, 절을 일배를 올린다 하더라도, 아주 깊은 생각으로 일배를 올리면서 그 감사함을 생각한다면 조상님의 은혜를 갚고 또 자식들한테도 은혜를 베풀어 줄 수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몸뚱이만 귀하다고 애를 쓰고 사는데, 심어 놓은 나무가 거죽만 좋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데는 별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조상의 어떤 문제도 배척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고 끌어안는 마음으로,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때로 어떤 집안에서는 총에 맞아 죽은 분들도 계시고, 물에 빠져 죽은 분도 계시고, 맞아서 죽은 사람도 계시는 그런 경우가 옛날에는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들을 무섭게 생각을 하고 오히려 자기네들을 해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면 안 되죠. 더 불쌍하게 생각하고 정월에나 백중, 팔월 추석 때 잘 모셔 드린다면, 자기 조상이라면 자기네들 뿌리나 똑같은데 그분들을 은혜로이 생각하고 받들어 모시는 마음을 갖는다면 서로가 서로를 돕게 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둘 아니게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모두를 가릅니다. 시아버지는 이랬고 시어머니는 이랬고, 뭐가 어떻고 저떻고 이렇게 다 갈라 놓으니깐 갈라 놓는 대로 갈라지는 거죠. 그렇다면 그 집안이 뭐가 되겠어요? 자손들도 쌈박질이나 하고 나가서 일이나 저지르고, 이렇게 하다 보면 집안이 편안하지 못한 거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런 자식들을 낳아 가지고 이렇게 고생을 하느냐고 한탄을 하지만, 그거는 한탄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자기네들 생각에 의해서 모두가 그렇게 되는 거니까요. 마음으로 짓는 건데 천 냥 빚은 못 갚겠습니까? 마음으로 하는 거 얼마든지 자비하고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고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건데도 그걸 못 해요.

그래서 추석이 되면 자연스럽게, 물론 하루도 삼천 년 전이나 삼천 년 후나 어떤 하루밖엔 더 없지만, 추석이다 하면 지수화풍과 일체 만물과 더불어 같이 감사하고, 하나도 감사하지 않은 게 없는 마음이어야겠죠. 일차적으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차적으로는 법의 조상이나 육의 조상이나 모든 조상님들과 일체제불에게 또는 일체 권속, 일체 중생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내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마음의 회향을 할 때 한데 합쳐서 회향을 하게 되는 거지요

간편한 재사 상차림의 뜻

질문: 다른 사찰에서 천도재 지낼 때 보면 매우 많은 진수들이 차려져 있는데 한마음선원에서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깔끔한 상차림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상차림을 간편하게 하는 뜻이 무엇인지요.

답변: 요즘 항상 신도들한테도 “제사 지낼 때 거푸장스럽게 지내지 마라. 간편하게 지내라.” 또 여기서도 천도를 시키고 재사를 지낼 때 간편하게 하라고 항상 그럽니다. 그건 왜냐하면 첫째, 방편으로 할 때는 그렇게 합니다. 초, 향, 물, 과일, 위패, 또 어렵지 않은 사람은 꽃 한 다발을 거룩하게 해 놓고 그 꽃 앞에 위패를 세우는 거죠. 그렇게 해서 지내는 데는 언제나 상 옆에 큰 그릇에 물 한 그릇 떠 놔라. 그것은 내 몸을, 즉 말하자면 의식에서 그 집착이나 관습이나 이러한 욕심, 이런 거를 다 씻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말로 이렇게 하는 것도 되지마는 이 주인공에다 관하고 진실하게 그렇게 한다면 모두가 통합니다. 지장은 지장대로 통하고 또 칠성은 칠성대로 통하고 관세음은 관세음대로 통하고, 일체 제불 여래가 다 통합니다. 이게 전화라고 한다면 전부 전화가 없는데 전화기가 여기밖엔 없다고 할 때 그런 말입니다. 한군데밖에 통할 데가 없거든요. 저승과 이승은 한군데밖엔 통신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하느냐. 이것도 여러분들은 방편으로써 그렇게 해 드리고 이래야만 그게 됩니다. 또 우리가 그냥 길에 다니면서도 방편 없이 그대로 천가를 시킵니다. 그대로도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다를 다기로 삼거든요. 아시겠어요? 모든 이 우주 공간에 있는 거는 다 자기 걸로 다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향이나 초나 다, 이 세상의 게 다 자기 건데 무엇을 더 달라 덜 달라 하겠습니까? 그래서 오고 가다가도 천도를 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서 아주 어렵고 극난한 사람이 천도를 해 달라고 목을 매고 붙들 때, 길에서, 거기다 그런 거 차려 놓고 하겠습니까? 바다를 다기 삼고 또 과일을 향기 삼아서, 또는 향을 양식 삼아서 모든 걸 그렇게 해서 그냥 천도를 하는 것이 더 일품이죠, 아주.

그런데 여러분이 이 공부가 시답지 않다고 생각을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항상 이 공부를 하시게 되면 조상님들도 그 뜻을 알고 이웃집에서도 그 뜻을 아는데요, 그러니까 들고 나면서 공부를 하게 돼요. 댁의 몸체를 위패 삼아 말입니다. 체가 없는 거니깐 항상 체가 있는 데에 접근을 해야만이 공부를 하게 되죠. 그래서 여러분이 공부를 하면 조상 대 12대 종손까지 그 공부가 된다 이런 말입니다. 건져진다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깐 들고 나는 데는 조상 하나만이 아니라 수억겁이라도 내 주인공에다 넣으면 두드러지지도 않고 꺼내도 꺼내도, 거길 거쳐서 천도가 돼도, 나가도 나가도 줄지 않는다는 얘기죠.

이러한 아주 고귀하고 광대무변한 묘법이 여러분들 가슴에 다 있는데 그것을 희미하게 생각한다면 내 그 아프게 살던 부모들, 내 아프게 살던 형제들, 수억겁을 통해서 내가 그 아프게 살아온, 진화되고 형성되고 이러면서 자식이 되고 부모가 되고 이래서 아픔을 견뎌 왔던 그 사정, 그 모두를 다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면 한 찰나지만 모르면 수억겁 광년이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왜 반찬도 밥도 안 해 놓고 그러느냐. 이거를 말씀하신다면 이 떡은 이게 그냥 사람이 먹는 떡이 아니라 우주를 삼키는 떡입니다. 그 떡 하나에는 모든 일체 생물이 다 들어 있는 떡입니다. 그래야만이…, 모든 걸 벗어나게 하기 위해섭니다. 또 밥상을 놓고 반찬을 차려 놓는다면 그 앞서에 살던 습이 도로 성한단 말입니다. 먹는 데, 입는 데, 집을 원하는 거 이런 것이 다, 자기 몸뚱이 아끼고 그냥 이러는 것이 다 합쳐져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의식이 감동해서. 그러니까 그 의식을 벗기기 위해서 안 보이는 데서는 설법을 하고 보이는 데서는 그렇게 하고, 그 의식이 다, 모든 것이 멸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안팎에서 지내 주는 거죠. 안과 밖을 다 그렇게 해서 해 드리고 또 자손들도 이 공부를 하니깐 자손들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우리가 위패를 해 놓는 원인이 거기 있죠. 체가 없는 영령들은 거기에 응접을 해야만이 아시니까요. 그래서 이 우주떡이라는 것이 말로만 우주떡이 아니라 우주의 삼세가 다 들어 있는 우주떡입니다. 과거나 미래나 현실이나 모두가 현실의 한 떡에 들어 있다는 뜻을 보이지 않는 데서 설합니다. 그냥 목탁이나 치고 염불이나 한다고 생각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스님네들이나 또 여러분들이나 다 그렇게 인식을 하고 그 영령들을, 조상님네들을 다 이렇게 리드해 보세요. 얼마나 집안이 편안해지고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조상님네들도 마음이 흥락해서 좋으니까 가정이 좋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 하나가 천지를 건지는가 하면 마음 하나가 천지를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법이라는 것이 공법(空法)이라야지 그냥 법이라고 한다면, 잘되고 잘못된 걸 딱 따져서 이거는 지옥으로 보내고 이거는 천당으로 보낸다 이런다면 부처 될 자격이 없죠. 왜냐. 그 잘못된 사람도 본래에 잘못된 게 아니라 몰라서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방망이 때린다 하더라도 일깨워서 사람 되라고 해 줘야지 그 말과 뜻이 어긋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래도 건지는 거고 저래도 건지는 거죠. 그러니까 누구나가 다 평등하게 그렇게 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 살아 있을 때에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개구리를 잡아서 많이 먹었다. 이런 사람들 가끔 내가 봅니다. 그런데 죽을 때도 뱀이 꼴리듯이 그렇게 죽는가 하면 그 뱀에 자기 모습을 수없이 또 만들어 놓습니다, 새끼들을 낳아서. 그렇게 한다면 그 모습을 언제나 벗겠습니까, 또. 생략해서 뱀으로만 얘길 했는데 전후사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첫째, 살생하지 말라. 깨치지 못한 사람은 살생하지 말라. 깨친 사람은 살생을 해도 살생이 아니고 건지는 거다. 만약에 깨친 사람이 소를 건질 때에 소고기가 들어온다고 그것을 안 먹겠습니까? 닥치는 대로 한 점 먹어서 만약에 소가 환토가 된다면 그건 의당히 먹어야 됩니다. 그래서 가는 거 잡지 않고 오는 거 막지 않는다는 그 뜻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재사 지내고 천도시키고 하는 데에 문제가 너무 많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람들은 한 번 해서 뱀의 허물을 그냥 벗는 게 아닙니다. 자식들을 통해서 들고 나면서 남편이든지 자식이든지 들고 공부를 해야, 들고 나면서 이런 거를 알아서 차차차차 그것이 벗어나게끔 되는 겁니다. 물론 만약에 부처님이 계시다 해도 단박에 부처님도 건져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 건져 주기만 하면 뭘 합니까? 뱀의 습이 있어서 자꾸 글로 들어가는데. 그러니까 뱀의 습을 벗겨 주기 위해서 그 차차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기다 놓고 해라. 꼭 안 죽이면 안 될 때는, 닭이나 뭐라도 안 죽이면 안 될 때 그때는 주인공에다 맡기고 해라. 그러면 자기는 죽인 사이가 없고 안에서도 죽인 사이가 없다. 왜? 자기가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가 재사 지낼 때 그렇게 안 차려 놓는 원인이 영령들이나 산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좋지 않습니까? 집에서 제사 지내는 것도 말입니다, 둘이 같이 일을 나갔다 하더라도 저녁에 떡 가게에다가 전화해서 맞춰서 놓고 일하고 퇴근하고 오다가 그거 찾아 가지고 와서 지내면 아, 얼마나 좋습니까! 그 떡은 먹는 떡이 아니라 전체가 먹는 떡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향이나 초나 뚱그런 떡이나, 사람이 식구가 많으면 셋을 놓고 지내고 나눠 먹고 또 적으면 하나만 놓고 하고요. 하나가 삼백 개도 될 수 있고 백 개도 될 수 있고, 백 개가 하나도 될 수 있는 겁니다.

이 도리 알기 전엔 결혼 말라셨다는데

질문: 얼마 후에 결혼을 앞둔 청년입니다. 예전에 큰스님께서 이 도리를 알기 전에는 시집 장가도 가지 말고, 시집 장가를 갔거들랑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제가 좀 이해가 안 가서 질문을 올려 봅니다.

답변: 이 도리를 모르고 장가를 가거나 시집을 가지 말라. 그건 왜 그렇게 말을 했느냐 하면요, 이 도리를 알아야 모두 그 자식을 낳더라도 좀 차원이 높은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거라 한 겁니다. 시집 장가를 가지 말란 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 뜻은 그런 걸 알고 좀 하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 오래됐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잠시 잠깐이라도 그렇게 관하는 도리를 알면 그게 바로 큰 덕이 된다 이런 거죠. 그리고 그 도리를 모르고는 자식 낳지 말라 한 것은, 그 자식이 전자에 살다가 어떠한 영령이 어쩌다가 인연이 돼서 들어왔단 얘깁니다. 들어오면 벌써 들어온 자체가 벌써 여기 그 의식들에 영접을 해 가지고 있거든요. 의식들의 응신이 돼서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안과 밖을 조복해야 된다 하는 원인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서 입력이 됐으니깐 그냥 나쁜 거는 나쁜 것대로 입력이 나오고, 좋은 거는 좋은 것대로 나오고, 돈이 생길 만하면 다 쓰게끔 나오고, 돈이 또 들어올 듯 들어올 듯 하다가도 안 들어오고, 그냥 거기에 다 입력이 돼서 다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부지간에도 자식 부모지간에도 탓을 할 수가 없어요. 탓을 할 데가 하나도 없다고요, 자기 탓으로 돌려야지. 자기가 벌여 놓은 일이고 그런 걸 보는 것도 자기가 벌여 놓은 일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모두가 부부지간에도 서로 ‘이거는 모두가 내 탓이로구나! 주인공, 이러지 않게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그냥 관하면 양쪽이 다 불이 들어오죠. 그 순간순간 그게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장가를 들지 마라. 시집을 가지 마라.” 이런 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조끔이라도 좀 알고 붙잡고 갈 수 있는 그 도리를 알고서 장가 시집을 간다면 양쪽의 그 조상들이 그냥 좋아서 하실 거 아니냐. 그러면 또 자식을 낳더라도 이 도리를 이렇게 관해 가면서 자식을 낳으면 어디 가도 끼침이 없고 어디 가도 손색이 없도록 그 영명한 영령이 태어나거든요. 꼭 지금 말해 준 대로 그대로 해 보세요.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