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해의 길 11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는 “사물은 본질을 갖추고 있는 ‘존재(存在)’이지만, 인간은 본질을 스스로 창조하기 때문에 ‘무(無)’다”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의자는 앉을 수 있고 칼은 무언가를 자르며 휴대폰은 전화하는 데 쓴다는 본질이 정해져있지만, 인간은 어제는 나쁜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착한 사람으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은 정해진 본질(我)이 없기(無) 때문이다. 물론 그는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리고 있지만, 본질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무아적 사유를 살짝 엿볼 수 있다.

무아란 글자 그대로 자아(自我)가 없다는 뜻이다. 자아란 자기동일성이나 정체성, 본질 등 여러 표현으로 쓰인다. ‘나’라는 존재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동일한 자기의 모습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이일야가 어제 부산 해운대에 있든, 오늘 서울 종로에 있든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가까운 이웃을 낯선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서로 알아보고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붓다는 심하게 태클을 걸었다.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여러 연기적인 조건들이 모여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나의 의자가 만들어지기까지 나무라는 재료도 있고 나무를 자른 사람의 땀방울, 그리고 나무를 잘 자라게 해준 햇빛과 구름, 비 등 많은 요소들이 연기적으로 얽혀있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여러 인연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고집할만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무아는 곧 연기의 공간적 관찰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현실과 연결시키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스마트폰을 인류에 처음 소개한 스티브 잡스는 “우리가 아이패드를 만든 것은 애플이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였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탄생은 기술의 비약적 발전뿐만 아니라 ‘무아’라는 인문학적 사유가 결합된 성과물이다. 스마트폰은 그 기능이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본질은 ‘전화를 하는 데 쓰는’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카메라, 신용카드 등과는 완전히 다른 본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전화를 하는 데 쓰는’ 자아(我)를 해체(無)하고 본질이 전혀 다른 존재들을 담았다. 전화기라는 자아에 집착했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성과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무아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사유가 나오는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무아적 사유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그 의미는 더욱 커진다. 지금도 나의 자형은 해마다 오래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에 벌초를 하러 온다. 나는 그 이유를 무아에서 찾았다. 자형은 아버지를 장인(我)이 아니라(無) 친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인은 ‘아내의 아버지’라는 본질을 갖고 사위는 ‘딸의 남편’이라는 자아를 갖는다. 연기적 관점에서 아내, 혹은 아내의 아버지가 없다면 장인이라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매형과 아버지는 ‘아내의 아버지’, ‘딸의 남편’이라는 본질을 해체해버렸다. 그 결과 두 분은 장인과 사위의 관계에서 벗어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새로운 관계로 질적 변화를 이루었다. 자아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사랑이 깊어지는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자아는 무상과 마찬가지로 사랑이 나오는 원천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부정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집착이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아에 대해 집착을 하면, 자유로운 사유와 사랑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당에서 급식을 하기 때문에 보기 힘들지만 수업시간에 책상은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본질을 갖지만, 점심시간에는 밥과 반찬을 차리는 밥상으로 변신을 한다. 일종의 ‘자아와 무아의 동거’인 셈이다. 아버지들의 로망인 자식과 친구처럼 술 한 잔 나누는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잠시 자아를 내려놓아야 한다. 어머니들이 아들과 애인처럼 서로 팔짱을 끼고 걷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사랑과 자유가 나오는 무아의 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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