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 셀민스

왼쪽부터 비야 셀민스 작가.
〈바다〉, 1975, 종이에 리소그라프, 31.7x42.0cm, 테이트 미술관 (연필 드로잉 후 리소그라프 기법으로 종이에 인쇄)
〈별 하늘〉, 1981~2, 종이에 흑연, 48.2x68.5cm, 뉴욕 데이비드 맥키 미술관
〈거미줄 #1〉, 1999, 종이에 목탄, 56.5x64.9cm, 스코트랜드 국립 미술관

 

이 그림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조금 전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고 먹이를 찾아 선회하며 날던 갈매기 떼의 울음소리마저 잦아든, 어느 연안의 조용한 뱃전에서 어두운 바다 물결을 바라보는 듯하다. ‘긴 외다리로 서 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 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 빛나는 바다를’ 어느 시인의 시가 절로 떠오른다. 종이에 그려진 크지 않은 이 그림에서 사람들은 가없는 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 일렁이는 검은 물결, 깊어지는 어둠과 고요 그리고 물결과 마주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한다.

사진촬영에 밀린 현대 리얼리즘 사조
내면 의식의 변화 조명하며 다시 부각

먼 발치에서 얼핏 사진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연필로 그린 소묘작업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이 그림은 풍경화이다. 일반적으로 풍경화는 전경, 중경, 그리고 후경의 요소를 지닌다. 바다 풍경을 예로 들자면 가까운 곳의 사람이나 해변의 사물들은 근경, 그리고 점점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들이 중경이 될 것이고, 먼 곳의 수평선과 지는 노을 그리고 노을이 물든 구름 등은 후경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그림은 전통적 풍경화는 아니다. 그녀는 단지 검은 바다의 물결만을 화폭에 담아 무채색으로 표현하였다.

발트해 연안에서 태어난 비야 셀민스(Vija Celmins, 1939~, 미국)는 라트비아 말로는 여성인 그녀를 ‘비야 첼미냐 (Vija Celmia)’로 쓰는 것이 맞지만, 작가로서 생애의 대부분을 미국을 근거로 활동하였고 세미나, 인터뷰 등을 담은 대부분의 영상자료에서는 미국식 발음을 따라 ‘비야 셀민스’ 또는 ‘비자 셀민스’로 불린다. 보통의 서유럽 국가나 우리 나라에서는 독특하게 생각되지만, 라트비아에서는 남성형 성씨와 여성형 성씨가 다르다. 같은 집안 사람이라도 남성은 ‘첼민스(Celmins)’로 표기하는 반면, 여성은 ‘첼미냐(Celmia)’로 표기한다. 이는 러시아도 마찬가지인데, 아버지의 성씨가 ‘파블로프’라면 딸의 경우 ‘파블로바’가 된다.

관객들은 사진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린 이런 그림들을 보면서 감탄한다. 사람의 손으로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사실적인 인물화나 풍경화의 경우, 복잡한 현대 미술 이론을 늘어놓지 않더라도 즉각적으로 사람들에게 경탄은 물론 일종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유형의 그림을 ‘포토 리얼리즘(Photorealism)’이라고 하여 미국에서는 1960년대 이후 새로운 미술 사조로 널리 알려졌다.

혹자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실물과 똑같이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그냥 카메라로 촬영하면 될 것 아닌가? 어차피 결과는 똑같은데.” 이것은 정당한 질문이다. 또 이 질문 속에 바로 ‘포토 리얼리즘’이라는 미술 사조의 가능성에 대한 답이 들어 있기도 하다.

서양 미술사에서 17세기 이후 등장하는 네덜란드 초상화의 경우, 사실주의적 기법은 높은 수준에 달하여 기계로 촬영한 사진에 비해 거의 차이가 없는 정확한 비례, 음영, 세부묘사를 보여 주는 작품들도 적지 않다. 예술 작품의 평가 기준은 그 시대의 정신성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당시의 그림들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으로 높이 평가 받았다. 게다가 종교적,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인 다양한 요소를 포함한 의미 내용을 담고 있어야 좋은 작품으로 평가 받을 수 있었다.

근대 이전에는 도제수업으로 상당한 테크닉을 익힌 화가들에게 조차, 실제 인물과 사물의 닮음을 구현하는 일은 고단한 작업이었다. 그러기에 19세기 카메라의 발명 이후 회화는 닮음을 목적으로 하는 재현과 사건의 꼼꼼한 기록의 기능을 사진에게 넘겨 주었다. 사물을 눈으로 보는 것과 흡사히 닮게 묘사하는 것은 이제 사진술의 영역이 됨으로써, 화가들은 다른 길을 모색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를 비롯한 현대 미술의 사조들이 나왔고, 그 흐름은 20세기 이후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실험적 모색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포토리얼리즘 회화는 또 다시 사진적 사실성을 담보로 우리의 시선에 충격을 준다. 사실상 관객의 놀라움은 닮음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토록 닮게 만들기 위해 가해진 손의 수고로움과 소요된 시간의 양 때문일 것이다. 포토리얼리즘의 표현은 극 사실주의를 따르는 듯 하나, 그들이 의도하는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진의 기능을 일반 관객들이 무시하듯, 포토리얼리즘은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진 기능을 역설적으로 철저히 비웃으며, 그 너머의 다른 지점으로 관객들을 유도하고 있다. 그들은 눈에 비치는 사실성이 아니라, 보다 깊은 곳에 있는 의식의 출렁임을 보여 주고 싶은 것이다.

1938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에서 태어난 셀민스는 어린 시절 내내 세계 2차대전의 참화를 겪었다. 1940년 소련이 라트비아를 침공하자, 그녀의 일가족은 소련군의 박해를 피해 독일로 피난을 가서 여러 난민 캠프들을 전전해야 했다. 2차대전이 끝난 후, 일가족은 국제 기구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주한다. 최근 그녀의 인터뷰를 보면, 그 당시의 기억은 매우 오래 전 일이라 흐릿한 파편의 조각으로만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녀는 그저 날아 다니는 비행기들과 포탄이 떨어져 폭발하는 장면을 기억할 뿐이다. 기억은 흐려지나 상흔은 쉽게 아물지 않는 법이다.

셀민스는 2004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예술에 대해 지나치게 기대하는 것들 중 하나는 그 작품의 의미이고, 내 생각보다 사람들이 훨씬 더 빨리 작품에 대해 의미를 찾는 것 같다. 만약 내가 독재자라면, 그들을 묶어놓은 다음에 ‘이것을 눈으로 보세요, 그리고 다시 보세요, 그리고 또다시 보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머리가 아닌, 감각과 가슴으로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감각을 통해 이성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존재의 저 깊은 곳에 직접 닿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그녀로 하여금 작품을 위한 작업에서 오는 육체적 수고로움과 기나긴 시간을 감내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녀는 짧은 시간에 가능한 모든 것을 파악하여 붙잡으려는 현대인들이 가진 조급한 시선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떤 관객들은 한 작품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는 그럴듯한 설명을 구한다.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등,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그 무엇을 원하며,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심지어 사회적 위치와 정치적 입장을 통과한 ‘바른’, ‘참다운’, 그리고 ‘아름다운’ 작품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하나의 예술작품이 바르고, 참다우며, 아름다운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찬양하는 예술 외에는 ‘퇴폐 예술’이란 꼬리표를 달았다. 키르히너, 베크만처럼 오늘날 독일 현대미술의 대가로 칭송받는 예술가들도 당시에는 ‘퇴폐 예술’로 낙인 찍혀 비난 받던 시대였다.

평단에서 셀민스의 작품은 종종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의 ‘사진적 그림(The photographic painting)’과 더불어 언급되기도 한다. 리히터는 해골과 촛불이 그려진 희미한 작품으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는 사물의 뚜렷한 경계선을 지움으로써 사진매체가 제시하는 단순한 재현성을 넘어 사진과 회화, 현실과 비현실, 재현과 표현, 복제와 재 복제 간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낸다. 리히터의 작품세계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몇몇 유명한 회화 작품 이외에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참으로 다양하다. 근래에는 마치 5~6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연상시키는 액션 페인팅에 몰입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회화라는 매체를 재해석하고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리히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 규정적인 것을, 무 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같은 시대에 비슷한 경험을 가진 예술가들은 유사한 공포와 혐오를 공유한다. 리히터와 셀민스는 동일한 시대를 살았던 예술가로, 둘 다 소련 공산주의와 독일의 나찌즘에 대한 불편한 기억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리히터는 비록 작품에서는 표현하지 않지만 노골적으로 나찌 히틀러와 공산주의 스탈린을 비판했던 반면, 셀민스는 오롯이 예술에 몰입했다.

셀민스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표출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소묘(Drawing, 드로잉)는 전통적으로는 회화(Painting), 즉 칠을 해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준비 단계의 부차적인 작업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포토 리얼리즘이 예술 세계의 한 사조로 무대에 오른 이후, 소묘는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부차적 작업이 아니라 작가의 예술정신을 완성하기 위한 주된 도구 중 하나가 되었다.

소묘 작업에서는 연필 또는 목탄이 주로 사용되지만, 평면에 사람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그 어떤 재료라도 무방하다. 미술에서 사용되는 가장 단순한 최소한의 도구이며 기법이 바로 소묘이다. 셀민스는 이 단순한 도구를 사용하여 무한한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과 혜성을 그렸으며, 낯선 땅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의 고독한 소녀 시절을 연상시키는 숲 속의 거미줄을 그렸고, 난민으로서 가족과 함께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으로 향하는 유년 시절인 어두운 바다의 물결을 그렸다.

셀민스의 그림은 조형적으로는 갇힌 평면과 열린 공간의 미묘한 긴장이다. 이를 통해서 그는 현존과 부재 사이에서의 역동적인 흔들림을 표현한다. 셀민스의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인간은 무한한 실재로 채워진 현실과 종잇장처럼 가벼운 비현실의 경계에 놓여 있는 불확실한 존재임을 일깨워 준다.

흔들리는 뱃머리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바다의 굽이치는 파도를 바라보는 나그네처럼, 사막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가없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는 조난자처럼, 거미가 떠나고 없는 낡은 거미줄과 같은 덧없는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더불어 어떠한 물결에도 휩쓸리지 않고 매번 솟구쳐 오르는 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은 가져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해.”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봉우리와 골짜기가 없다면 산이 아니고, 바람에 이는 파도가 없다면 바다가 아닐 것이다. 천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이 없다면 살아있는 삶이 아닐 것이다. 삶이라는 바다에도 상처와 고통의 풍랑이 매 순간 일렁인다. 살면서 시련의 파도가 몰아칠 때면, 셀민스의 그림들을 그저 고요히 바라보고 마음 깊은 곳의 침묵을 마주하고 싶어진다.

양 끝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리니 중도(中道)엔들 어찌 안주하랴.

물이면 물, 산이면 산, 마음대로 쥐고 펴면서

저 물결 위 흰 갈매기의 한가로움 웃는다.

태고 보우(1301~1382) 선사

‘어디에 머물리요(何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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