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연보다 위대한가?

별들과 함께 하는 신선의 고장, 남해

내가 남해에 정착한 지도 벌써 7년이 지났다. 오랜 도시 생활을 털어내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남해로 오니 달라지는 일이 많았다. 워낙 서울이라는 동네가 내겐 지옥과 다를 바 없어 한적하고 넉넉한 농촌으로 내려오면서 상대적으로 기대감은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해도 욕망과 이익에 눈이 먼 종자들이 (많지는 않지만) 사는 세상인 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인정 많고 뭔가 나눠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더불어 살아가기에, 잘 왔다는 생각을 의심한 적은 없다.

불교·우주생성 ‘업’으로 설명
생멸의 과정 교리에 담아
유교는 우주 사유 여가 없어

남해로 와서 나는 사람보다 더 값지고 귀한 존재를 쉽게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었다. 아직 공해라든가 생활폐수, 쓰레기 따위가 이 지역을 갉아먹지는 않아 그야말로 남해는 청정한 해역과 깨끗한 공기를 마음껏 즐기고 마실 수 있다. 그리고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 밤 하늘이다.

나도 고향은 시골이다. 그래도 워낙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의 잔치를 넋 놓고 본 기억은 없다. 그리고 도시의 하늘은 인간들의 불빛이 더 휘황해 더러운 오물을 끼얹은 것보다 더 가혹한 상처로 신음하고 있다.

자정이 지나고 어둠이 차곡차곡 누리를 덮을 즈음 나와 본 남해의 하늘은 온갖 별들이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섬을 찾아온 나를 별들이 모여 잘 왔다며 환영해주는 기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하늘에 관심이 많기는 했다. 무엇이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천문학은 묘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굳이 동기라면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이 책으로도 내고 영상으로도 만든 저서 〈코스모스(Cosmos)〉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그보다 먼저 읽은 책이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의 〈처음 3분간(The First Three Minute)〉이니 〈코스모스〉는 기폭제 역할을 했던 듯하다.

어쨌건 책으로나 읽고 브라운관으로만 본 우주(宇宙), 그 거대한 하늘이 남해에는 잔치상처럼 번듯하게 차려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밤이면 거의 매일 옥상에 올라가, 어떤 때는 몇 시간이고 하늘을 보며 누워있곤 했다. 시력이 안 좋은 나는 처음엔 고배율 망원경을 샀는데, 이것으로는 우주를 관찰할 수 없어 천체 망원경을 장만해야겠다는 통 큰 야망까지 품게 되었다.

그런데 쓸 만한 천체 망원경의 가격이 내 주머니 사정을 가볍게 비웃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야망은 쉽게 접혔다. 유튜브를 통해 우주에 관한 동영상을 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아직도 야망은 내 가슴속에서 스러지지 않았다.

우주란 얼마나 무한히 넓은지 인간이 가진 척도로는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빅뱅(BigBang) 이후 끊임없이 팽창한 우주의 넓이는 대략 반지름이 140억 광년(光年)이라고 한다. 우리가 관측 가능한 가장 멀리서 온 빛이 이 정도 거리이기 때문이라는데, 그 시간 동안 우주는 더욱 빠른 속도로 넓어졌으니, 실제로는 700억 광년도 더 될 것이다. 태양계의 끝과 끝 길이가 1광년도 안 되니, 우주의 무한성은 짐작조차 거부한다.

이 광대한 우주 안에 우리가 사는 작은 땅 지구(地球)는 티끌 만한 존재감도 가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 지구 안에서 제왕인 양 군림하려는 인간은 또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 우주로 볼 때 지구는 우리가 보는 원자의 크기만도 못할 터이니, 우주를 알면 알수록 지극히 겸손해진다는 천문학자의 말이 공염불 같지는 않다.

일개 중생인 나도 대자연의 총화 우주 앞에 서면 겸허해지는데, 옛 성현들에게 우주는 어떤 의미였을까?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미신(?)은 믿고 싶은 사람이나 믿으라 두고, 성현들의 우주 인식이 꽤나 궁금해지기도 한다.

우주와 인간이 공존하는 불교의 상상공간

지구상에 출현한 문명들은 저마다 이 세상의 구성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펼쳤다. 눈으로만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를 아주 길게 살았으니, 그런 상상의 소산이 과학과 배치되기는 했다. 그래도 눈으로 본 세상이 완전 허구는 아니어서 때로 흥미롭게 살펴볼 부분도 있다.

불교는 우주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했으니, 부처님이 말한 우주는 무엇이었을까? 안타깝지만 부처님은 우주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중생(衆生)들의 삶과 깨달음에 설법을 집중했다. 그래서 경전을 열심히 뒤져봐도 그런 궁금증이 시원하게 해소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불교는 우주의 생성 원리를 업(業, Karma)으로 설명한다. 이 업이 사람을 질곡하면서 삼라만상 우주가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 형식을 삼악도(三惡道)와 삼선도(三善道)로 나눠 설명하는데, 지옥과 아귀, 축생이 삼악도이고, 수라, 인(人), 천(天)을 삼선도라고 부른다.

이 업력(業力)이 작동하면서 수미산(須彌山)이 솟게 되고, 주변에 여덟 바다가 펼쳐지며, 바깥 바다에서는 사대주(四大洲)가 자리하는데, 그 중 인간이 사는 세계인 지구는 남쪽 섬부주(贍部洲)에 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순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귀여운 상상력의 소산이 지금은 허무맹랑할지도 모르겠지만, 은유적으로 이해하면 우주의 실체와 완전히 동떨어졌다고 폄하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수미산 우주가 항존(恒存)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을 두고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우주는 생성하고 소멸한다. 그 변화의 기간을 겁(劫, Kalpa)이라 하고, 네 가지, 즉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의 과정을 밟는다고 한다. 우주가 생성되는 성겁(成劫)과 정적으로 존재하는 주겁(住劫), 그리고 붕괴되는 괴겁(壞劫), 오직 무(無)만 존재하는 공겁(空劫)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무한히 반복된다고 불교는 인식한다.

이런 사고는 흥미롭게도 현대 천문학의 우주 인식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우주는 무한히 팽창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소개한 책 〈처음 3분간〉은 빅뱅 이후 3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해설한 것인데, 이것은 불교의 ‘성겁’에 해당된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팽창을 계속하는 현재는 ‘주겁’이다. 그런데 천문학은 우주가 팽창하다 언젠가는 수축으로 방향을 틀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런 때가 오면 이는 ‘괴겁’이 아닐까? 그런 뒤 우주는 작은 점, 빅뱅 이전으로 환원된다는데, ‘공겁’의 시기라 할 수 있겠다.

불교의 사유 체계와 현대 물리학의 이론들에서 유사점을 찾아내는 서적은 꽤 많이 나왔다. 어느 종교처럼 경전을 신주단지 모시듯 맹신해 우주가 6천여 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궤변을 불교는 늘어놓지 않는다. 합리적 사유와 반성적 모색을 거쳐 인간의 실존과 우주의 근원을 찾아나간다. 이런 점에서도 불교는 내게 정말 매혹적이다.

자연을 수양의 도구로 인식했던 유교

그렇다면 공자는 이 우주자연을 어떻게 보았을까?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에는 우주에 대한 이렇다 할 발언이 없다. 논어 원문에는 우(宇)와 주(宙)라는 글자조차 나오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이해하는 ‘우주’와 공자 시대의 ‘우주’는 다르다.) 천지(天地)라는 단어도 없고, 다만 천명(天命), 천하(天下)라는 용어만 눈에 띤다.

공자는 사람이 수양을 해서 도(道)를 체득해 완전한 인격을 갖춘 군자(君子), 그리고 더 나아가 성인(聖人)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런 수양의 필요 조건으로 산수자연이 거론되는데, 강호가도(江湖歌道)나 풍호무우(風乎無雩) 등과 같은 자세가 자연을 수양의 도구로 본 예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어쨌거나 지독한 현실주의자여서 제자들이 현실과는 무관한 질문을 하면 회피하기 일쑤였다. 〈논어〉 선진편(先進篇)에 실린 이런 문답이 대표적이다.

계로가 귀신은 어 게 섬기느냐고 물으니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산 사람도 제대로 삼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그러자 계로가 다시 여쭈었다. “감히 죽음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敢問死 曰未知生 焉知死)

이렇게 귀신이나 죽음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외면했던 공자가 (공자가 몰라서 피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주와 같은 망망한 세상에 대해 사유할 여가는 없었을 것 같다. 물론 공자도 천재지변이라는 측면에서 천문 현상을 주목하긴 했지만, 인간 중심이기는 마찬가지겠다.

다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로 돌아가자. 이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학자인 그는 백혈병으로 고작 63살의 생애만 살고 우리와 이별했다. 그는 인류에게 우주에 관심을 가지고 겸손을 배울 것을 권하면서 많은 책을 냈지만, 내가 근래 읽고 있는 책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다.

미국 나사(NASA)는 태양계 외곽을 탐색하고자 1977년 9월 5일 보이저 1호를 발사했다. 그 탐사선이 목성과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등을 거치면서 무수한 자료를 보낸 뒤, 칼 세이건은 탐사선의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우리가 사는 유일한 장소, 지구를 찍어보자고 제안했다. 몇 차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1990년 2월에 보이저 1호는 카메라를 지구를 향해 돌렸고, 우리들에게 가장 먼 곳에서 본 우리의 지구 사진을 보냈다.

사진 속에서 지구는 눈에 잘 띠지도 않는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었다. 그 바늘의 끝보다도 작은 지구에서 인간은 서로 죽이고 다투고 이간질한다. 나아가 유일한 터전 지구를 괴롭히기까지 한다. 칼 세이건은 이 책에서 이런 명언을 남겼다.

“……지구는 광대한 우주의 무대 속에서 하나의 극히 작은 무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조그만 점의 한 구석의 일시적 지배자가 되려고 장군이나 황제들이 흐르게 했던 유혈의 강을 생각해 보라. 또 이 점의 어느 한 구석의 주민들이 거의 구별할 수 없는 다른 한 구석의 주민들에게 자행했던 무수한 잔인한 행위들, 그들은 얼마나 빈번하게 오해를 했고, 서로 죽이려고 얼마나 날뛰고, 얼마나 지독하게 서로를 미워했던가 생각해 보라.……”(칼 세이건 저, 현정준 역 〈창백한 푸른 점〉 26-27쪽, 사이언스북스, 2019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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