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

정진원 지음/조계종출판사 펴냄/1만 7천원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10개월 만인 1447년 7월 칠석에 24권의 대작 〈석보상절〉이 완성된다. 그것을 보고 아버지 세종이 단숨에 노래를 지었으니 바로 600수에 가까운 〈월인천강지곡〉이다. 1446년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해이지만, 세종과 세조에게는 그해 3월 아내와 어머니 소헌왕후를 여읜 해이다. 나이 쉰의 아비와 서른의 아들이 세상이 무너지고 의지할 데 없는 큰 슬픔 속에 오직 바라는 한 가지는 소헌왕후의 극락왕생이었을 것이다. 때마침 그들에게는 출시를 앞둔, 세상을 가르칠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이 있었다. 이 새 문자로 먹고 자는 것도 잊을 만큼 열과 성을 다해 두 부자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 후 12년이 지난 1459년 세조는 고인이 된 부모님과 요절한 아들 의경세자를 위해 〈월인천강지곡〉의 ‘월인’과 〈석보상절〉의 ‘석보’를 따서 합한 책 〈월인석보〉를 만든다.

세조 5년, 1459년 집권도 안정적이고 한숨 돌리는 시간, 그는 수양대군 시절 아버지 세종의 명에 따라 만들던 〈석보상절〉을 다시 매만진다. 개인적으로 슬픈 일도 많았지만 이 〈월인석보〉 작업을 할 때에는 식음을 잊고 바쁜 정사서 시간을 쪼개가며 틈을 내어 했다는 기록이 〈월인석보〉 서문에 전한다.

저자 정진원 교수는 〈월인석보〉 스물다섯 권 중 첫 권을 현대국어로 옮기고 다듬어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였다. 세조의 절절한 사모곡과 사부곡, 자식 잃은 아비의 슬픔과 왕이 되기 위해 저질렀던 잘못의 참회로 가득한 〈월인석보〉 서문으로부터 석가모니의 과거세 연등불 시절 선혜와 구이 이야기, 불교의 우주관과 세계관, 모계 중심의 사회로 시작되는 인간 세계의 불교식 창세기가 〈월인석보〉 본문에 광대한 스케일로 촘촘히 실려 있다. 그 도저하고 유장하고 사무치는, 15세기까지 이어진 우리 선조의 정수를 담은 불교 이야기 〈월인석보〉는 현재 25권 중 19권이 발견된 상태로, 저자는 전권 번역을 목표로 한다. 저자는 주석을 일일이 풀이하기보다는 본문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함으로써 독자들이 유려한 수양대군의 육성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 세주와 본문을 풀이했다.

최초의 조선 대장경, 조선 최고의 걸작 〈월인석보〉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고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펼쳤다. 심지어 세종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다섯 가지 교종과 아홉 산문에 자리 잡던 선종 5교 9산을 혁파하고 선종과 교종 곧 선교 양종으로 불교를 대폭 축소시킨 주인공이다. 그런 세종이 왕자인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을 짓고 서문을 쓰게 한 사실이 〈월인석보〉 서문에 자세하다.

이 책은 석가모니께서 태어나고 열반에 드실 때까지의 일생과 설법한 경전 내용을 자세히 할 것은 자세히 하고 간략히 할 것은 간략히 편집한 조선시대 최초의 ‘훈민정음 불경’이다. 〈월인천강지곡〉은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는 달이 하나지만, 지상에 있는 천 개의 강에 똑같이 도장 찍히는 것처럼 부처의 진리가 온 세상에 두루함을 노래한 것이다. 특히 〈석보상절〉 내용을 게송처럼 요약한 것이다. 일반적인 불교 경전의 형식은 부처의 설법 내용을 전한 뒤에 요약한 게송이 이어지는 순서로 되어 있다. 우리의 최초 조선대장경도 그 형식대로 하자면 제목이 ‘석보+월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양은 세조가 된 뒤 5년 후인 1459년 아버지 세종의 노래 〈월인천강지곡〉을 앞세우고 아들인 자신이 쓴 〈석보상절〉 산문 순서를 뒤로 하여 ‘월인+석보’의 순서로 만든 것이다. 조선식 대장경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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