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사

개운사 전경. 근대교육의 필요성으로 중앙불전 교사가 자리했다.

 

영도사에서 개운사로

개운사 홈페이지에 있는 사찰연혁을 보면 창건 당시 사명은 영도사(永導寺)였고, 위치는 지금 고려대 이공대 캠퍼스에 있는 인명원(仁明園) 자리였다. 1779년(정조 3) 5월 7일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가 죽자 이곳에 묻혔다. 왕실에 자리를 내준 영도사는 인파 축홍(人波竺洪)이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 표지석이 있는 인명원 자리를 놓고 볼 때 그곳이 실제 영도사 자리였는지 의문이 든다. 그 이유는 인명원을 들린 정조의 표현 때문이다. 1779년(정조 3) 8월 10일 이곳에 들린 정조는 재실에서 분양한 뒤 이곳을 정한 당상과 낭청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대불교 승가교육 필요성
개운사 탄생의 원동력
20년간 승가교육체제 다져

“풍수설(風水說)은 내가 비록 알지 못하나, 대저 간산(看山)하는 법에서는 반드시 산이 빙 둘러싸고 명당이 그 안에 깊이 들어앉은 땅을 취하는 것이니, 이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지금 이 원소는 내가 처음 와서 보았는데 산세가 전혀 둘러싸지 않았고 명당이 큰길에 가까이 닿아 있으니, 비록 풍수설로 보더라도 잘 어울린 형국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큰길이 묘혈(墓穴) 앞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이 길을 끊어 막아버리려고 한다 하니, 이 또한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이 길은 바로 우리 조정이 개국한 이후 400년간 다닌 큰길인데, 전혀 서슴지 않고 이내 함부로 끊고 막아버리려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그때 간산한 당상과 낭청의 뜻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내가 좌상(左相)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어느 정도인가. 그런데 이제 이 원소 한 가지 일은 지극히 한심하다.”

정조의 힐책에 좌의정 서명선은 성상의 하교에 황공하여 아뢸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지만 정조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이런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데 묘를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곳에 영도사가 있었을까? 정조의 표현대로 산이 빙 둘러싸이지도 않은 곳에 사찰이 있었을지 다소 의문이 든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개운사는 지금의 자리에서 영도사 사명만 바뀐 것은 아닐지 모를 일이다.

개운사는 정조 때에도 영도사로 불렸다. 1786년(정조 10) 지금의 효창원인 문효세자의 묘소를 조성할 때 영도사 승려 13명이 묘소도감의 별단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개운사로 등장하는 것은 고종 때이다. 1895년 10월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생명에 위험을 느낀 고종은 198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그해 겨울 그곳에서 명성왕후의 산릉조성을 논의하였다. 11월 27일(양 12월 31일) 淸穆齋에서 산릉을 1차 살펴본 대신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이들은 7곳을 살펴보았는데 연희궁과 청량리 그리고 개운사가 거론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사명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상지관들은 앞의 두 곳에 대한 평가에서 산릉을 쓸 만한 좋은 곳임을 제시하나 개운사에 대해서는 별다른 흠이 없지만 좋은 평가를 내리기에 부족하다 하여 정조의 말고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2월 1일(양 1월 3일) 2차로 살펴본 대신들과 논의에서도 두 곳은 호평을 받았으나 개운사는 평범한 땅으로 평가받았다. 이때 고종은 산릉을 청량리로 정했고 개운사는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일제하 朝鮮佛敎學人聯盟의 탄생지

일제하에서 변질되던 승가의 모습을 지켜본 학인들은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전통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많은 삼보정재가 착취와 억압 앞에 이름도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3천 년 정법과 불조의 혜명이 파괴된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학인들은 정통적인 불법 수호의 기치를 들고 ‘전국학인대회’를 열고자 전국의 40여 개나 되는 강원이 단결하였다. 1927년 10월 29일 개운사에서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장시간 토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여기서 발기인 모집위원들을 선정하여 제반 사항을 위임하면서 학인대회를 1928년 3월에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청담을 비롯한 박용하, 정찬종, 김형기, 박홍권, 배성원, 김태원, 정화진 등은 발기인 모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들에 의해 주도된 학인대회는 중생제도의 큰 책임을 느끼고 시대에 적응하는 교학방법을 모색하며 장차 교단의 주역이 되었을 때를 위하여 資糧을 공동으로 준비하자는 의도였다.

교육제도를 확립하자는 강령 아래 교육제도를 초등, 중등, 고등 세 단계로 나누고 그에 맞는 內典과 철학, 지리, 역사, 등 外典의 광범위한 교과목을 정하고 강사를 과목에 따라 전공제로 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고등강원은 서울에 1개소, 중등강원은 지방에 6개소 이상, 초등강원은 중등강원 안에 부설하고 그 밖의 각 사찰에도 설치할 것을 결의하고 교무원과 본산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서울에 설치하려는 고등강원에 대한 예산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이운허와 이청담이 고등강원을 설치하려 했던 개운사를 떠남으로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학인대회는 강원교육에 내실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학인들의 계속적인 유대를 지속시켜 朝鮮佛敎學人聯盟이 결성되어 기관지 回光을 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2, 3차 학인대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면서 당시 교단에 교육제도 혁신을 위한 건의안을 제출하여 교단 차원의 교육에 대한 문제를 환기시킬 수 있었다.

근대 불교교육과 개운사

한국 근대불교의 많은 선지식들은 승가교육을 강조하였다. 한국불교를 개혁하자는 개혁론의 주장에서도 승가교육은 빠지지 않았다. 근대 불교교육이 시작된 곳은 원흥사였다. 이곳은 1902년 한국불교를 관리하던 대본산이었다. 그러나 1904년 사사관리서가 폐지되면서 그 역할이 유명무실해지자 1906년 불교연구회에서 명진학교를 세웠다.

이후 명진학교는 교단의 변화에 따라 불교사범학교, 1914년 고등불교강숙, 1915년 중앙학림, 1928년 중앙불교전수학교,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그리고 1940년 혜화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근대 불교교육을 시작한 곳은 원흥사였지만 불교교육을 한 단계 발전시켜 사회적 위치를 높인 곳은 개운사였다. 이곳이 교육의 장이 된 것은 석전 박한영의 영향이 크다. 불교계의 대강백으로 박학함이 당대의 최고였다. 독립선언서를 썼던 최남선은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석전은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이 되자 불교계 인재를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중앙불전 교사가 바로 개운사 내 대원암이었다. 이곳에서 능력 있는 인재들을 데려다 불교계 동량으로 키워냈다. 특히 문학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 많았다. 서정주, 조지훈, 김달진, 그리고 조종현 등 광복 후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끗던 기라성 같던 문인들이 개운사 중앙불전에서 석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가운데 미당 서정주와는 남다른 관계에 있었다. 그는 광주학생 항일운동으로 퇴학당하면서 방황하였다. 석전은 그를 중앙불전 학생으로 불러들여 시인으로 키웠다. 그래서 서정주는 석전을 “내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고 부르며 평생 존경하였다.

이렇게 근대 불교교육에 있어 많은 역할을 한 개운사는 혜화전문학교 이후 교육의 장에서 멀어졌다. 개운사는 다시 평범한 사찰로 돌아가는 듯 했지만 한번 맡은 시대적 사명은 계속되었다. 다시 현대 승가교육의 장이 되어 많은 수행자를 배출한 것이다.

현대 승가교육의 요람 개운사

광복 후 많은 사람들이 불교계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그 가운데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고 남다르게 노력한 분이 성철과 청담이었다. 성철은 한국불교의 난제인 승가교육을 해결하기 위해 승가대학의 설립을 제시하였다. 그는 어느 불사보다도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가오는 경쟁사회에는 수행자가 강원을 졸업한 것만으로는 사회적 지위가 낮을 수밖에 없다고 예견한 것이다.

성철 못지않게 승가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 청담이었다. 그 역시 도제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승가대학의 설치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현행 강원과 선원의 제도와 동떨어진 제도가 아니라 현재의 교육체제를 개조하여 성불할 수 있는 수행자와,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스승을 배출할 수 있는 승가학원으로의 변신이었다.

1962년 설립된 통합종단 역시 승가교육에 관심을 기우렸다. 1965년 9월 ‘한국불교 11대 과업’에 포함될 만큼 비중 있게 다루면서 승가대학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8년 7월 10일 총무원은 승가대학 설립을 위한 간담회가 개최하고 적극적으로 검토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그 후 1969년 7월 제20회 종회에서 중앙교육원의 설치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의해 1971년 10월 7일 조계사에서 제1기 교육으로 60명의 수강생을 한 달 동안 교육하였다. 그리고 교육목표도 급변하는 사회정세에 대응할 수 있는 승려재교육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성과를 거두기는 너무 미흡하였다.

이후에도 승가대학의 설립은 꾸준히 논의되었다. 1976년 12월 제 45회 중앙종회에서 승가대학추진위원회가 설립되어 장소와 운영자금 등을 논의하였으나 설립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그 후 1979년 2월 24일 의정부 쌍룡사에서 청년 승려들이 중앙불교승가학원을 시작하면서 승가대학의 첫 여정을 열었다. 이후 3월 18일 승가학원은 서울 돈암동의 보현사로 옮겨 연수부와 교양부를 둔 2년제로 시작하였다. 1980년 학교명을 중앙승가대학으로 개칭하고, 12월에 구의동 영화사로 학사를 이전하였다.

많은 우여곡절 속에 승가교육이 제자리를 잡은 것은 1981년 개운사로 이전하고 20년간 승가교육의 체계가 세워진 이후이다. 개운사로 옮긴 승가대학은 1989년 7월 각종학교 인가를 취득하여 정규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1990년 신입생부터는 정규 대학에 준하는 학력 인정을 갖추고 일반 대학에 걸 맞는 학제와 교육내용, 교육시설 등을 구비하였다. 마지막으로 1996년 12월 11일 교육부로부터 정규대학의 인가를 취득함으로써 승가교육의 염원을 이루었다. 20년간 승가교육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보듬어준 개운사는 2001년 1월 승가대학이 김포로 옮겨지면서 다시 도심의 조용한 사찰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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