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많더라도 놓지 않으면 외려 갈 길을 더디게 만든다

어느 땐가는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알게 되겠죠.

질문자1(남) 스님께서 제게 내려 주신 불명이 용방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의 지혜 그릇은 간장 종지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간장 종지 자체도 고정돼 있지 않기에 언젠가는 용방이 될 것을 믿으며 몇 가지 질문을 올립니다.

안팎이 공하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믿고, 조금씩은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여전히 고정된 나가 있고 고정된 너가 있어 괴로울 때도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안팎이 공한 이치를 뼛속 깊이 체득할 수 있는지 먼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산다는 것이 전부 잘못된 게 없어요
그냥 그대로 물 흘러가듯, 바람 불듯,
구름 떠다니듯 그렇게 하고 가는 겁니다.

큰스님 항상 말했듯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공한 줄을 안다면” 하는 소리는, 과거에도 이런 때가 있었고 또 미래에도 이런 때가 있을 거고 현재에도 이런 때가 있고,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삼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난데 그 하나마저도 공했다. 그 공한 도리에서 우리도 역시 공해서 살고 있다.” 하는 뜻을 알면, 그대로 행해 나갈 수 있다면 그대로 공한 것이죠. 공했다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게 그대로 공한 것이다.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항상 이런 얘기 하죠. “아버지!” 하면 아버지 노릇을 자연적으로 해 준다구요. 또 아들을 부르면 아들 노릇을 자연적으로 해 주고, 그렇게 자연적으로 해 나가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해 나가고 있으면서도 그 자연적으로 해 나가는 걸 몰라서 때에 따라서는 마음으로 자기를 자기가 고민하는 거죠, 모두가. 그러니까 그 고민을 다 벗어 버린다면…. 옛날에 이런 얘기 한 적이 있죠.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자네가 좀 가서 어떻게 해 주게.” 하니까 “나오신 게 없는데 가실 게 어딨다고 그러는가.” 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럼 그 말 한마디에 벌써 된 거죠?

그러니까 “말이 많으면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말이 적으면 실천에 옮길 수 있다.” 이런 말이 있죠. 그랬듯이 마음속으로 자꾸 편안치 않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무조건 편안하게 하세요. 그러면 나중에 그 말 한마디도 없이 그 도리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질문자1(남) 예, 감사합니다, 스님. 두 번째 질문 올리겠습니다. 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때때로 시간이 나면, 혹은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조용히 앉아서 ‘주인공,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잖아. 너만이 내면의 모든 이치를, 물리를 깨닫게 할 수 있잖아.’ 하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을 틈나는 대로 해 왔습니다만 아직은 지혜의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지 않습니다. 제가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깨우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큰스님 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는 잘못되고 잘되고가 없고, 악도 선도 없어요. 잘못된 것 잘된 것이 없다구요. 그 없는 도리를 안다면 ‘내가 전부 공했구나.’ 하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그런다면 모든 세상살이를 편안하게 할 수 있겠죠. 그러다 보면 나중에, 아까도 얘기했듯이 말 없이 말하고, 함이 없이 하고 이렇게 지낼 수가 있다 이런 말이죠.

우리가 지금 산다는 것이 전부 잘못된 게 없어요. 함도 없고요. 한다는 것도 없고, 그냥 그대로 물 흘러가듯이, 그대로 바람이 불듯이, 그대로 구름이 떠다니듯이 그렇게 하고 가는 겁니다. 어느 땐가는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지 그걸 알게 되겠죠. 지금 걷다가 멈춰지는 그런 걸음이 아니니까요. 세상살이가 다 그래요. 찰나찰나 그냥 걸어가는 거지 멈춰서 쉬는 자리가 없죠. 그러니까 그 도리를 알면 그냥 쉴 수 있다,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서 쉴 수 있다 이런 말이죠.

질문자1(남) 예, 알겠습니다. 이 공부를 하고부터는 저 자신의 여러 가지 결점이나 과거에 묻은 습이 나오는 것을 전보다는 조금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온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은 스님의 가르치심인데 습이나 이런 것들이 밖으로 나오기 전에, 있는 그 상태에서 원천적으로 녹이는 길은 없는 것인지 그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나오기 전에 돌려놓으려고 애쓰지 말구요, 항상 내가 살아나가는 데에 모든 걸, 이 세상 살아나가는 모두를 하나로 둥글릴 수 있죠? 모든 거를요. 그래서 거기에다가 맡겨 놓을 때, ‘이런 일이 생기지 말라, 저런 일이 생기지 말라’ 이러고 놓는 게 아니죠. 놓을 때에 ‘너만이 그런 사연이 모두 쉬게 할 수 있어.’ 하는 마음으로 놔야죠. 자기의 요량이에요, 그것도. 모든 게 자기의 요량대로죠. 길을 가는 데도 이쪽으로 가는 사람도 그 집엘 가고 저쪽으로 가는 사람도 그 집엘 가는데 ‘길을 어떡해야만 빨리 가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더디든 빠르든 상관없이 그냥 거길 가는 거죠.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스님. 놓는 방법에 대해서 여쭙고자 합니다. 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예를 들어서 몸에 병이 났을 경우에, 어떤 경우에는 ‘너만이 이 병을 낫게 할 수 있잖아.’라고 관(觀)하라고 하신 적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죽이든 살리든 너 알아서 해.’라고 하신 적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집을 짓는 것도 법, 안 짓는 것도 법이니까 지을 만하면 짓고 안 지을 만하면 짓지 말고….’ 이렇게 세 가지 종류로 풀어서 저희들에게 법문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제가 여러 법우님들하고 토론을 해 본 결과 어떤 결론을 내렸는가 하면, 첫 번째는 이 공부를 해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되는 방향으로 ‘너만이 할 수 있잖아.’ 그렇게 해야 재미도 보고 힘도 얻을 것이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다음에는 그것마저 놓아야 하니까 ‘죽이는 것도 너, 살리는 것도 너. 너 알아서 해.’라는 단계가 돼야 될 거 같고, 그런 단계를 훨씬 뛰어넘어서 큰스님처럼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르면, 필요하면 집을 짓고 필요 없으면 안 짓고…. 그때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상태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그 세 가지의 가르침이 결국은,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법문을 하실 적에 저희들의 근기가 워낙 다양하니까 특정인을 지칭해서 법문을 하실 수 없으니까 두리뭉실하게 하신 거지, 사실은 그게 개개인에 따라서 다 다르게 적용이 돼야 될 것이 아닌가. 저희들은 그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희가 이해한 게 맞는지 가르침을 바라겠습니다.

큰스님 맞아요. 개개인의 그릇이 다 다르죠. 그러니까 작은 사람이 쓸 것이 있고 큰 사람이 쓸 것이 있고 여러 가지가지죠. 그릇을 안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구요. 그런데 그릇이 없어서 안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몰라서 안 가지고 다니죠. 본래는 다들 있는데 말입니다. 부처님과 여러분들이 차원이 다르다고 하지만 다르지 않습니다. 왜 다르지 않으냐.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니까 ‘똥둣간의 똥 막대기’라고 했습니다. 그건 무슨 뜻에서 말한 겁니까? 자식을 기르는 데 부모가 항상 똥 닦아 주듯 항상 자기를 떠나는 일이 없어요. 자불(自佛)이 자기를 떠나는 일이 없단 말입니다. 떠남이 없이 큰 거든 작은 거든 수없이 해 나가는 거를 다 손살피 돌보고 있는데 자기가 그것을 몰라서 그렇죠. 또 때에 따라서는 고통이라고 그러지만 그것을 알고 간다면 그것이 고통이 아니죠. 완벽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써 그렇게 길을 걷게도 하구요. 손을 잡아 끌기도 하구요. 그런 경우가 많죠.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 뜻을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그렇죠.

질문자1(남) 감사합니다, 스님. 이번에는 심성과학 연구와 관련해서 몇 가지 힌트를 얻기 위해서 스님께 몇 가지 질문을 계속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정신병이라든지 각종의 암 같은 것은 현대 의학 수준으로는 거의 난치 내지는 불치병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기회 있을 적마다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그런 암이건 정신병이건 간에 과거의 영계성, 인과성, 유전성의 영향이 많다고 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 의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암 같은 경우도 정상 세포의 분할을 억제하는 유전자의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게 지금 많이 밝혀져 있고, 정신분열증 같은 것도 신경 전달 물질에 관여하는 어떤 유전자 결함 쪽으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계성이라든지 과거의 인과성, 이런 원인이 많을 걸로 지금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제가 스님께 여쭙고 싶은 것은, 스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과거 미생물에서부터 인간이 되기까지 수억겁을 거치면서 서로 먹고 먹히고 쫓고 쫓김을 당하고, 서로 인과(因果)의 업(業)을 반복하면서 살아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지 다 과거 생에 수억겁을 두고 서로 인과를 주고받았을 텐데 하필 정신병이나 암에 걸린 그런 사람들은, 왜 유난히 그분들만 그런 병에 걸리게 됐는지, 거기에 무슨 또 저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사연이 있는 건지 그걸 스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큰스님 사연이 새록새록 많죠. 자기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모두가 일어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을 없애고 둘 아니게 하려면 둘 아니게 공부를 해야 되는 거죠. 참, 요즘 외국이나 한국이나 어디를 막론해 놓고 비참한 일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일어나요. 그런데 그것은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는 그런 문제죠, 모두가.

그렇게 문제가 된 경우를 예를 들어서 말하겠습니다. 과거에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애들끼리 놀다가 어떻게 잘못해서 불집게로 애가 죽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다시 나와서 한동네에서 다시 살게 됐는데 또 불집게로다가 쳐서 죽였단 말입니다. 그런 걸 법적으로도 그렇고, 어떻게 처리를 해야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과응보라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면 이 공부하는 길을 잊어버리는 거나 같습니다. 그러니까 인과응보라는 그 자체가, 내가 고운 말을 하면 상대방에서도 곱게 나오고, 내가 악을 쓰고 욕을 하면 상대방에서도 욕을 하고 나온다 이런 뜻과 같죠. 그러니까 그런 업보가 생기는 이유가 뭐냐? 업보라고 하는 것도 일들이 벌어지니까 업보라고 이름을 지어서 방편으로 쓰는 거지 본래 업보라는 자체가 없는 거죠.

그런데 예를 들어서, 예전에 농사지을 때에 길을 가다가 어떤 생명들이 새끼들을 낳고 있으면 그냥 삽으로 척척 쳐서 죽여 버리고, 생명들을 우습게 그냥 잡아서 구워서 먹고, 이렇게 모든 것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다 하면서도 예전에는 지금보다도 더 모르는 경우가 많았죠. 그렇게 한 것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자기 자식들한테로 오거나 자기한테로 오죠. 그게 왜 그런가? 그것이 바로 영혼이 있기 때문이죠. 영혼의 근본을 안다면 그러지를 않을 텐데, 근본은 모르면서 이 영혼만이 누가 지금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극악하고, 그렇게 아프고 죽겠으니까 그냥 그리로 덤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일 년이 지나서든지 이태가 지나서든지 또는 그 후생이 되든지 그렇게 돼서 그 인과가 벌어지는 거죠. 그러니 그것을 해결을 하려면 둘 아닌 도리를 알아야만이 그게 없어지는 법이죠.

질문자1(남) 스님, 그러면 그런 정신병이나 암 환자들은 보통 사람보다도 정도가 심한 인과를 더 많이 지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큰스님 살아온 대로니까요. 그 사람 자체가 살아온 대로니까요.

질문자1(남) 알겠습니다.

큰스님 그래서 “관하라. 둘 아니게 관하라. 둘 아니게 큰마음의 보시를 하라.” 하는 거죠, 항상.

질문자1(남) 네, 지금 제가 두 번째 여쭈려고 하는 걸 스님께서 바로 답을 해 주셨는데요, 그러한 병들이 과거 생의 인과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자기 업식 보따리 속에 다 담겨 있겠습니다. 그래서 정신병 같은 경우는 사춘기, 10대 후반, 20대 초에 생기니까 그 인과 보따리 정체가 좀 빨리 드러나는 셈이고, 암 환자는 주로 장년 이후 노년기에 생기니까 몇십 년 동안 잘 나가던 사람을 불의에 공격하는 셈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 공부를 해서 숙명통(宿命通)이 터지기 전에는 자기 보따리 속에 어떤 인과가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공부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기 과거의 업 보따리, 인과 보따리를 빨리빨리 녹여야 여러 가지 그런 좋지 못한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하자면 심성 의학적인, 예방 의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님께 여쭈어 보려고 했는데 스님께서 이미 답을 해 주셨습니다. 그 질문은 넘어가고요.

세 번째 여쭙고 싶은 것은 저희 선원뿐만 아니라 불법을 찾는 사람 가운데서 극히 상근기 몇 분을 빼놓고는 대개 어떤 육신의 괴로움이라든지 혹은 뭐, 가난이라든지 다른 어떤 정신적인 괴로움 때문에 불법을 구한다고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자기가 어떤 병에 걸렸을 적에, 우리 선원에도 그런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병만 나으려고, 그 병만 어떻게 좀 해결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제가 스님의 일련의 가르침을 생각을 해 보면, 어떤 질병이 생겼건 다른 어떤 괴로움이 생겼건 간에, 눈앞에 닥친 괴로움을 해결하려고 애쓸 게 아니라 먼저 자기 살아온 과거에 대해서 참회를 하고, 어떤 새로운 삶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그 과정이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큰스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또 높으신 법력이 있으니까 중생 제도를 위해서 그런 과정은, 제가 느끼기에는 덜 강조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냥 주인공 자리에 관하라고만 하시는데 제가 느끼기에는, 자기가 어떤 병만 나으려고 하는 그런 그 단순한 동기를 조금 더 확장을 해서 참회를 먼저 해야 되고, 삶에 대한 새로운 개안을 먼저 해야 그 병도 나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저희가, 큰스님께서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시겠습니다만 저희 같은 일반 신도나 혹은 이렇게 연구를 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환자를 지도할 적에, 요컨대 병만 나으려고 관하지 말고 참회도 듬뿍듬뿍 많이 하고 새로운 마음의 지평을 열도록 좀 유도를 해야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이 드는데, 스님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큰스님 내가 항상 저 나무들 뿌리하고 싹에 대해 얘기를 하죠? 그런데 나무 싹이 있으면 뿌리가 있듯이 누구나가 다 본래 그렇게 달려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네 뿌리는 바로 네 주인공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말을 하자면 일체 우주 전체를 한데 싸서 콩 알갱이 하나로도 할 수 있고, (컵 받침을 들어 보이시며) 요런 데로 하나로도 할 수 있고, 한 사발로도 할 수 있고, 한 주먹으로도 할 수 있고, 아주 없이도 할 수 있단 얘깁니다.

그 모두를 콩 하나로 해서 짊어지니까 짊어질 수도 없이 무겁더랍니다. 그런데 그거를 어떡하면 빨리 해소를 시킬 수 있나. 그래서 그냥 무조건 관하라고 그런 겁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믿는 것만치 없어질 거고, 믿지 못하고 뭐를 얻으려고만 한다면 자기 정성에 의해서 그것이 조금 나을 뿐이지 없어지거나 그런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현재만 살려고 그러지 말고 세세생생을 살기 위해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 그걸 벗어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짊어진 콩 한 알갱이를 산더미 같은 산이라고 그런다면, 우리는 산 하나를 짊어지고 다니는 셈이죠. 그래서 “그 무거운 거를 그냥 다 놔라.” 이 소린데, 그러면 그렇게 진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기 주인공이라는 자기 자불을 진짜 꼭 믿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면 알죠. 눈 뜨고 보고 귀를 기울여 듣고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형성시켜서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만든 자가 누구냐는 얘깁니다. 자기 종자인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종자라는 근본인데, 그 근본으로 인해서 자기가 생겼다면 그 근본에다가 다 놔야죠. 진짜로 믿고 놔야죠. 하는 것도 먹는 것도 똥 누는 거 뭐, 일상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놈 때문에 움죽거리게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산 하나다” 해도 되고 “콩 한 알갱이다” 해도 되는데, 그 콩 한 알갱이가 짊어질 수가 없으리만큼 무겁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를 없애려고 한다면 진짜로 믿고 무조건, 가난하든 부자든, 돈이 있든 없든, 밥을 굶든 먹든 ‘굶지 않게 해 주는 것도 너고, 살리는 것도 너고, 길을 걷게 하는 것도 너고….’ 이렇게 전부 다 주인공이 하는 것임을 믿어야죠. 자기 모습이 자기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 머리 위에 상투를 이렇게 하나 해 놓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이마를 짚어 보이시며) 부처님을 여기다 새겨 놓기도 하고, 지금도 해 놨지만 때로는 금으로다 이렇게 해 놓은 것은 바로 그게 크고 좋아서가 아니죠. 그 뜻으로 볼 때는 “텅텅 빈 모습이다. 텅텅 빈 모습인데 무엇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갖추어 가지고 계신다.” 하는 거죠. 텅텅 비고 없기 때문에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거지, 뭐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죠. 오장육부가 다 있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 손도 빈 손 부처님 손도 빈 손, 내 발도 빈 발 부처님 발도 빈 발, 부처님 몸도 빈 몸 나도 빈 몸, 빈 몸이니까 빈 마음. 함도 없이 하고 가는구나.” 하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 이 모두를 알 양으로 애를 쓰지 말고 모두가 공했다는 거, 우리가 공해서 함이 없이 하면서 지금 생활을 하고 간다는 거, 그러니까 모두가 수억겁 전년서부터 인과로써, 인연으로써 둘이 아니게끔 돼 있다는 거, 그러니까 모두 그 뜻만 대략 알면 그냥 믿고 가도 된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바보에게, 아무리 가르쳐도 모르니까 빗자루를 하나 줬단 말입니다. “너는 이 빗자루 하나 가지고 항상 쓸고 털고 그래라.” 하구요. 거기서 터득을 한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수없이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것을 다 놔야 된다. 아는 것을 다 놓지 않는다면 그 아는 것 때문에 길고 짧고, 이렇고 저렇고 이론이 많아서 외려 갈 길을 더디게 만든다.” 이런 소리죠.

그러니까 일거수일투족을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하되 함이 없이 해라. 공했으니까 너는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라는 거죠. 왜,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화면이 이렇게 나오죠? 화면에서 별짓 다 하죠? 그렇게 연기한 사람이 집에 앉아서 보니까 자기가 그렇게 별짓 다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저거는 내 환상이 저렇게 하고 있고 나는 그냥 여기 앉아서 그걸 보고 있다고 하겠죠. 그렇게 온통 모든 것을 환상으로 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진짜처럼 사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어디 다치거나 그런다면 그냥 야단나죠. 그러나 환상인 것을 알면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이런 것이 다 무심하게 돌아가죠. 알게 되면 얼음판을 걸어와도 아주 편안하게 걸어올 겁니다.

그래, 사람들이 강을 건너는데 얼음이 두껍게 얼었더랍니다. 그런데 고기들을 잡느라고 얼음을 꺼 놓은 자리가 큰 것들이 있어서 잘못 걸으면 풍덩 빠져서 야단들이 나니까 조심스럽게 걸어오는데, 스님네 둘은 하나도 거침없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냥 오거든요. 그래, 옆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 두리번두리번거리고 간이 콩알만 해서 오는데 말이죠. 그래서 다 건너와서 물었어요. “스님, 스님! 스님네들은 이 강을 건너오시는 데 겁이 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는 이 강을 건너온 사이도 없는데 어떻게 겁이 나겠소?” 하더랍니다. 그거와 같이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하는 걸 알면 그냥 사는 바 없이 사는 거죠. 그래서 내가 그러는 겁니다. 내 몸에 환상이 생겨서 병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관해서 놓으면 그 환상이 둘이 아니게끔 딱…. 왜, 그런 것도 있죠. 이 한 모습에 다른 모습이 딱 들어가서 하나가 된다구요. 그런 거 보죠? 그런 거 보시면 아시듯이 그렇게 수천 개가 들어가도 그거는 들어가고 나간 사이가 없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그 병은 그대로 낫는 겁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죽일 리가 없거든요.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스님께서 1999년 9월 5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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