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해의 길 10

“인생, 참 무상해.” 상갓집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얘기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의 부고 소식을 듣는다면 누구라도 인생이 덧없다 느낄 것이다. 싯다르타를 출가로 이끈 것도 다름 아닌 허무라는 감정이었다.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인간의 실존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의 출가는 곧 무상함의 실체를 찾는 여정이었다.

영원한 것이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와 더불어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서류를 작성할 때 그 내용이 확실하다는 의미로 도장(印)을 찍는 것처럼 세 가지 법(三法) 즉 무상, 무아, 고는 틀림없는 인생의 진리라는 뜻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일체개고 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기도 한다. 혹은 네 가지를 모두 포함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흔히 무상과 허무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관점은 같다고 할 수 있으나, 이 둘의 지향하는 방향과 에너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허무는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감정이다. 부정의 에너지가 넘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사상이나 규범 등 모든 가치체계를 부정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붓다 당시에도 허무주의나 염세적인 분위기가 성행했다. 국가 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대중들의 삶이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붓다는 부정의 에너지를 긍정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지혜가 필요했다. 붓다는 무상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았다.

무상 역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데 허무가 삶이 무의미하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무상은 그 반대로 향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은 한번뿐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더 의미 있게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붓다의 가르침이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한겨울에 내리는 눈도 수많은 인연과의 만남과 헤어짐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가을과의 인연이 다했기 때문에 겨울과 만날 수 있는 것이며, 하늘에서 내리는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겨울과의 인연이 다하면 또 다시 헤어져야 한다. 그래야 따뜻한 봄 햇살과 만나서 벚꽃 흩날리는 거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걸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과도 헤어져야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과 만날 수 있으며, 가을의 단풍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삶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이내믹한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상한 삶속에서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가꿀 수 있다. 이처럼 무상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놓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상은 사랑이 나오는 중요한 바탕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오래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에 갔는데, 그 옆에서 밭일을 하던 할머니 한 분이 혼잣말로 ‘죽은 다음에 찾아오면 뭘 하누. 살아계실 때 잘 해드려야지.’ 그러는 것이었다. 순간 얼굴이 빨개지면서 무상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삶 역시 무상하다는 냉엄한 현실과 그 위력을 간과하기 때문에 ‘다음에 잘 해드려야지.’ 하면서 자꾸 내일로 미루고 있다. 그러나 내일이라는 시간은 관념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무상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일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무상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명제뿐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 1919~2011)의 말이다. 수연낙명(隨緣樂命)이라 하질 않았던가! 인연으로 다가온 자신의 운명을 즐길 수 있을 때 즐기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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