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찾아가는 기억의 조각맞춤
내면 찾아가는 기억의 조각맞춤
  • 김성수 마음과학연구소 대표
  • 승인 2019.08.23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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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삶의 실타래 풀어내기

모든 기억은 조각으로 나뉜다
조각 사이를 천천히 연결하면
하나의 주제로 내 삶이 읽혀
화난 일도 적다보면 화 사라져

징검다리 글쓰기
징검다리 글쓰기는 징검다리라는 은유에서 알 수 있듯 두 발을 겨우 얹힐만한 크기의 돌덩이가 하천이나 강에 일렬로 이어져 있는 것과 같은 글쓰기를 말한다. 강을 건너려면 다른 대안은 없다. 강물에 듬성듬성 놓인 돌덩이를 따라 한발 한발 건널 수밖에. 당신의 생각이나 기억에 따라 첫 번째 징검다리, 두 번째 징검다리이렇게 하나씩 돌다리를 걷듯 적어가는 글쓰기다. <몰입>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칙센트 미하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종의 몰입적 사유방식이기도 하다.

우리의 대표적 수행전통 중 하나는 화두수행[看話禪]이다. 하나의 언어나 의미를 마음에 간직하고 깨칠 때까지 죽어라고 집중하는 수행법이다. 화두를 들게 된 수행자는 걷고, 먹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일하고 간에 스승에게서 받은 그 말머리[話頭]를 놓쳐서는 안 된다. 가령, ‘이뭐꼬라는 화두를 받았다면 꿈속에서도 이뭐꼬를 잊지 않음으로써 결국에는 언어라는 관념의 껍데기를 타파하여 본질을 깨치는 것이다.

징검다리 글쓰기와 화두 공부는 그런 점에서 조금닮았다. 어떤 언어든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면 징검다리 글쓰기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말머리에 따른 구체적 내용을 일관성 있게 이어가면서 당신의 생각이나 기억을 드러내고 비운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동안 막연했던 문제가 ! 이거였구나작은 깨우침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징검다리 글쓰기는 심리학자 카틀린 아담스(Kathleen Adams)<저널치료>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이 글쓰기야말로 생각이 팝콘 튀듯 분분한 사람에게 특효라고 본다. 일관된 생각을 이어가기 어려운 사람들, 얘기를 나눌 때마다 번번이 삼천포로 빠지는 사람. 뭔가 일관된 글 작업을 해야 하거나 하나의 주제를 깊이 있게 다뤄야 하는 경우에도 징검다리 글쓰기는 묘약이다. 나는 길거나 짧은 글쓰기를 할 때에도 이 징검다리 글쓰기로 사전 워밍업을 하곤 한다.

- 제목이나 주제를 맨 위에 쓴다. 그런 후 주제에 맞는 내 삶의 기억을 일련번호 붙여가면서 적어간다.

- 첫 번호는 반드시 내가 태어났다로 쓴다.

- 주제에 따른 생애 초기 기억부터 현재까지 꼼꼼하게 적어간다.

- 반드시 주제에 따른 기억만을 적는다.

- 서술하는 내용은 간결하고 구체적으로 적는다.

- 이왕이면 기억에 따른 감정을 적어도 좋다.

징검다리 글쓰기의 첫 번째 매력은 일관성이다. 강 건너까지 일관되게 놓여 있는 돌다리처럼 맥락이 매끈한 글쓰기를 할 수 있다. 두 번째 매력은 추상적 주제가 구체적 사실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가령, ‘사랑이라는 주제를 잡았다 치자. 그러면 당신은 맨 먼저 내가 태어났다를 적는다. 그런 후 당신이 사랑이라고 할 만한 사건의 최초 지점을 더듬어 본다. 나 같은 경우는 내 동생이 태어나고 외갓집으로 쫓겨나 외할머니 품에서 잠들 때, 그 기억이 사랑이라고 할 만한 첫 사건이다. 세 번째 매력은, 나라고 하는 존재의 정체성이 또렷해진다는 점이다. 네 번째 매력은, 내 삶을 지탱하는 여러 주제들이 그런대로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중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감 확보에 도움이 된다.

이쯤 되면 당신 스스로 주제 하나 띄어놓고 삶의 실타래 깊은 안쪽까지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가 일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내친 김에 사랑이라는 주제를 내놓고 한번 진행해보자.

사랑

내가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나서 외갓집으로 왔다. 5살 무렵, 외할머니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며 잤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여자 담임선생님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피했다.

방상은 선생님이 3학년 담임이었다. 나를 보면 자주 웃어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사한 집의 세 번째 집에 동급생 여자애가 살고 있음을 알았다. (이하 계속 적기)

번호를 차례차례 붙여가며 서술하다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헛된 생각이나 감정이 사라진 나만의 역사를 캐내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인류학자처럼 특수 도구를 사용하여 진지하게 나의 옛 사연을 발굴하여 어깨뼈, 엉치뼈, 하면서 삶의 골격을 맞춰보는 즐거움. ‘사랑에 대한 나의 경향성을 새삼 발견하는 맛. 모르고 지나쳤던 사랑의 위기. 왜 내가 지금 이 사람과 살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 당신의 생애 속에서 본인조차도 알지 못했던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일이 화나는 20가지 이유
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집집마다 한두 건씩 애간장 탈 만한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나만 이런 건가? 당신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흘깃거리는 속내 또한 애 간장 탈만한 일이 우리 집에 방금 발생했거나, 미구에 닥칠지도 모를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엔 이런 일 없겠지! 하는 기원이 있을 수 있지만, 세상은 예외가 별로 없다. 신은 어느 집이나 크든 작든 유사 사태를 살포함으로써 삶의 공정성과 보편성에 충실을 기하신다. 가령, 당신도 이런 사연을 듣게 되면, 어라, 이거 우리 집 표절 아냐? 하게 되기도 한다.

여전히 근육 팽팽, 오기 창창한 오기창이라는 50대 초반 여자분이 있다. 남편과 아들, 딸도 하나씩 있다. 이 분이 오랜만에 두통약을 먹게 된다. 정량은 두 알이지만, 세 알 먹고 두 시간이 지나도 앞이마가 여전히 딩딩거린다. 남편이 입장할 현관에 마음이 표창처럼 꽂혀 있는 탓이리라. 두어 시간 전, 남현동 사는 시어머니와 통화한 직후, 오 여사는 왜 정량 이상의 두통약을 복용하게 됐을까. “, 며늘아, 나는 네 덕분에 산단다. 길러놓고 나니 큰 아들이고 뭐고 다 소용 없더라.”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그 말씀을 가만히 복기해보니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남편을 살벌한 도끼눈으로 기선 제압 후, 심문에 들어갔다. 남편은 한 번 버티다가 두 대 맞고 불기 시작했다. 시어머니 병수발에 필요한 용돈을 두 형제가 매달 40만원씩 부치기로 했는데, 벌써 3년 전부터 시아주버니 댁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끊었다는 것이다. 그게 다야! 오 여사가 한 번 더 눈에 힘주자, 남편은 2년 전 8월부터 형님 몫까지 자기가 내고 있음을 자백했다. 순간 오 여사는 자신의 극한 감정에 스스로 감전사할 수도 있음을 체험했다. 그와 함께, 며칠 전 시아주버니 아내라는 여자와 통화중에 유럽 10박 여행 다녀왔다는 말이 떠올랐다. 오 여사는 허겁지겁 두통약 한 알을 더 털어 넣었다.

그 일이 화나는 20가지 이유는 이럴 때 쓰는 약이다. 남편을 소멸시키거나 시댁을 분해하는 사업 같은 후련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당신의 감정 쪼가리, 기억 쪼가리들을 일렬종대로 줄 세움으로써 문제 해소의 기반을 다지는 글쓰기다. 당신은 이 일을 즉결심판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을 것이다. 그 마음, 우리나라 수백 만 여사님들이 뜨겁게 응원한다. 당신은 응원에 힘입어 손글씨를 내갈기거나 손가락으로 자판을 냅다 두들기면 된다. 내가 왜, 분노에 휩싸인 건지, 냉정하게, 호흡을 알아차리면서 드러내본다.

- 요즘 나의 분노나 우울 감정을 건드리고 있는 사연이 있는지 살펴본다.

- 그 사건에 초점 맞춰 내 안의 부정적 감정이 일어나는 이유를 일련번호 붙여가며 적어본다. (~하기 때문에 화가 난다)

- 적을 때는 가급적 4~6하 원칙(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을 지킨다.

- 적어가면서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본다.

- 차츰, 내가 그를 화나게 할 만한 의도생각이 있는지도 살펴서 드러낸다.

불교에서는 3대 악행 중 하나로 (분노)’를 지목하고 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나는 그 세 가지 오랏줄에 묶여 살기 싫어서 불교 공부에 뛰어들었다. 뛰어들고 나니 처음에는 심신이 고요해지는 듯해서 좋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문제도 선명해지고, 오랏줄도 선명해지니 고통도 선명해졌다. 더 심각한 사태는 탐진치 오랏줄이 바깥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고래심줄처럼 묶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내 안의 관념, 내 안의 분노, 우울, 슬픔, 좌절, 충동, 두려움, 근심 따위가 비죽비죽 삐져나왔다. 돌아가야 하나. 돌아가는 길은 간단했다. 인간의 마을에 그냥 휩쓸려 살면 그만이었다.

그때 어떤 일로 나를 화나게 하는 20가지 이유를 적어볼 기회가 있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살인이라도 할 것 같았으므로, 나는 적었다. 왜 화가 나는지. 일련번호를 매겨가면서. 그 일련번호를 매기는 심정은 총 한방씩 쏘면서, 네가 왜 내 총알 맛을 봐야 하는지 큰 소리로 집행 이유를 불러주는 심정이었다. 여기서는 오기창 여사의 사연을, 그녀 심정 속으로 들어가 풀어내볼까 싶다.

당신도 역시, 남의 편이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확인한 게 화가 난다.

이제 당신의 숨소리도 믿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화가 난다.

당신과 당신 가족 전체가 나를 따돌렸다는 게 화가 난다.

당신이 여전히 형님한테 눌려 사는 것 같아서 화가 난다.

이런 사람과 살아야 하는지, 때 아닌 고민에 휩싸이는 게 화가 난다.

시어머니도 나를 속이면서 눈치 보고 있었다는 게 화가 난다.

내가 바보 천치 같은 모습으로 보인 게 아닌가 싶어서 화가 난다.

이게 정말 당신 일이라면, 얼마나 적어갈 수 있을까. 여러 사례들을 보아하건대, 생각보다 적을 게 많지 않다. 나의 분노는 식칼이라도 쥐고 망나니 춤을 출 것 같았지만, 막상 내 분노 덩어리를 수제비 반죽 떼어내듯 해보니 아니었다. 이상하다. 이렇게 무게감이 확 떨어지다니. 당신도 이런 체험 해보길 바란다. 이건 마치 정육점에서 꽤 듬직한 고깃덩이를 사다가 썰어놓으니 접시 바닥에 겨우 깔리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접시 바닥에 얄팍하게 깔린 나의 분노 쪼가리를 가만히 살펴보다가 문득, 나비 떼가 생각났다. 왜 하필 나비 떼 생각이 났는지 지금도 아리송하다. 그때 뭔가 훨 날아가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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