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들개에게 공부를 시험받다

간밤 좌선 마치고 걷는 밤길서
들개들에 포위… 종아리 물려
차분히 마음 다잡고 빠져나와

빠옥은 독서·글쓰기 자유로워
예불도 철저… 선교겸수 강조

빠옥총림 주변에 사는 야생 들개들. 허리춤까지 닿을 정도다. 이 들개들에게 공부를 시험 당했다.

선방 대청소로 좌선을 멈추고 일찍 내려오다 한국 스님들과 만났다. 같이 석양을 보러 산등성이를 타고 산꼭대기에 올랐다. 정상에 이르니 이미 미얀마 스님들이 몇 명이 나와서 쉬고 있었다. 전경이 드넓게 펼쳐진 정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선원 공양물에 관한 화제로도 이어졌다. 그런데 공양물 가운데 칼집 낸 사과와 과일에 대해서는 계율 상의 이유가 아닌 먹기 좋게 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재가자들이 사탕수수즙을 보시한 것에 모두 감동의 이야기를 나눴다. 중간 휴식 때 근처 마을의 사람들이 사탕수수를 즙을 내서 패트병에 담아 모든 요기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준다. 푸른 사탕수수 즙이 굉장히 달콤하다.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에 대해 주변의 일반인들까지 지원하는 것에 그저 감동할 뿐이다.

정상에 오르며 살펴보니 산자락마다 수많은 개인 수행처가 산재해있다. 나무로 짓는 개인 처소의 비용도 알게 되었다. 나도 하나 지어놓고 가끔 이곳에 와서 수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율장에 수닷타 장자가 하룻밤에 꾸띠를 60개나 건립해 보시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정사로 번역하여 하룻밤 사이 60개 정사(精舍) 건립으로 종종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열대지방의 목재 등을 이용한 가건물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나라는 아직 각국의 불교권 문화에 관한 인류학적 차원의 연구가 미흡하다. 그러니 꾸띠도 정사로 잘못 이해하기도 했다.

오늘로 미얀마 빠옥총림의 다섯 째 날(2012년 1월 26일)이 됐다. 지난 선방 옆 보리수나무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 나에게 향을 보시한 사람이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임을 오늘 아침에서야 알았다. 요기는 아침마다 식사 전에 합장한 채 공양게를 낭송하는데 그 의미를 일본인에게 묻는 것을 어느새 들었던지, 그 호주인은 <데일리 찬트(Daily Chant)s>라는 책을 총림에서 구하면 알 수 있다고 알려준다. 후에 자신이 직접 구해 와서 나에게 전해준다. 책의 내용은 빠옥 총림의 조석 예불문과 중요 독송 경전 등으로 편집되어 있다.

공양 전의 공양게는 스님이나 요기들이 탁발 전이나 공양 전에 낭송을 한다. 우리의 오관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음식뿐만이 아니라 음식을 포함하여 수행생활을 하는데 의식주와 약에 관한 네 가지 필수품에 대한 마음가짐을 확인하는 경구이다. 옷과 거처의 경우 추위와 더위를 막고, 벌레들을 막기 위한 목적이지 치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음식도 몸을 지탱하고 수행하기 위함이지 즐기기 위함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약품도 병을 고치는 데에 목적이 있지 보양 차원이 아님을 확인하는 공양게이다.

호주인의 이름은 모르지만 이곳에 온지 약 3개월 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수행할 것이라고 한다. 머리를 삭발하고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다. 덕담으로 자비심이 많은 것 같다고 칭찬해주었더니 겸연쩍어한다. 이곳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스님들이 도량 청소와 도량 정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젊은 수행자들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선원이나 선방에서는 요기가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 행위는 자제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이전의 인도의 고엔까 선원이나 마하시에서는 독서를 금기시 했지만, 이곳은 조금 다르다. 도서관이 잘 되어있고 선방의 좌선 방석 위에 책들이 있는 경우도 많다. 중간 중간 휴식 시간이나 경행 시간에도 책을 보는 스님들이 있다. 또한 선원에서는 예불 의식도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매일 저녁 7시 30분부터 다함께 예불한다. 어찌 보면 이곳 선원은 선(禪)과 교(敎)를 겸수하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모두 이야기하는 것처럼 선과 교도 배타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동아시아 중국 선종 전통처럼 선과 교를 배타적으로 보려는 분위기와는 다르다.

선실에 앉아있노라면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번갈아가며 끊임없이 들려온다. 집중이 잘되는 선정에 이르면 소리부터 들리지 않는다. 즉 초선은 이미 외부의 소리로부터 떠난 경지로 경전에서 설명한다. 그렇게 볼 때 아직 초선도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짜 집중이 되면 모든 사람이 보는 것도 못보고, 다 들었다는 소리도 또한 자신만은 듣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는 꼭 참선할 때 삼매의 상태가 아니더라도 일상사에서도 비슷하게 체험된다.

선방을 오르내리다보면 여기서도 청솔모를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외래종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괜히 생긴 것부터 잔인하게 느껴져 얄밉다. 같은 생각은 한국서 청솔모가 양서류는 물론 귀여운 다람쥐까지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갖게 됐다. 청솔모를 얄밉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까지 청솔모에게 자비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이 방을 쓰는 스페인 요기가 요즘 자비심을 닦는다고 밤에 잘 때도 <자비경>을 되새기며 잔다고 하니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동물에 대한 자비를 다시 생각해본다.

간밤에 좌선을 마치고 선방에서 나오니 밤하늘이 유독 청명하다. 바로 잠자기가 아쉽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시간대에 홀로 나와 천천히 걸어 본다. 길가의 큰 나무들 사이로 이어진 긴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새 중간 절 가까이 발전소까지 이르렀다. 아무도 없는 한 밤중에 큰 나무 사이사이가 그림자로 어둑어둑하다.

숲속에는 거의 야생 들개들이 여기저기에 살고 있음을 대낮에 보아왔다. 그러한 개들이 어느새 나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했는지 멀리서 한 마리가 짖어 댄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경계의 짖음이다. 그래도 무시하고 걸으니 순식간에 허리춤까지 닿는 예닐곱 마리의 큼직한 개들이 모여들어 삽시간에 나를 포위한다. 순간 아찔하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한국 스님이 밤길을 가다가 이쯤에서 개에게 물렸다는 이야기도 생각났다.

사탕수수를 착즙해서 선원 수행자들에게 보시한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개떼에 낭패를 보겠구나’하는 생각이 일었다. 좀 더 조심했어야 하는 후회가 일었다. 개떼들이 계속해서 내 주변을 빙빙 돌며 으르렁거리며 짖어댄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동요하는 기색을 감추고 마음을 다잡아 안정시키면서 더욱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가는 것을 멈췄다. 돌아서 가능한 빨리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슬며시 아주 천천히 돌아설 때 뒤에서 개 한 마리가 내 종아리 윗부분을 문다. 순간 물렸다는 서릿발같은 싸늘한 느낌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그저 아찔한 생각에 사로잡혀 혼미해지려 한다.

온 몸이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겁을 먹고 위축되거나 도망가면 오히려 개떼가 사나워져 만신창이로 물어뜯길 수 있다. 조금이라도 겁먹은 기색을 보이면 개떼들의 공격성이 더욱 자극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마음 속으로 ‘동요하지 않고 최대한 무심하게 걷자, 무심하게 걷자’를 되뇌이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었다.

개떼들이 계속해서 앞뒤로 돌면서 으르렁거리고 짖어댄다. 한참이 지났는가! 점점 멀어지니 개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고 짖어만 댄다. 내심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때부터 드는 생각은 개에게도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동물로부터도 모욕감을 느낄 수 잇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근처에 암캐가 6마리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인도 유학 시 밤늦게 홀로 다닐 때도 몰려다니는 거리의 개떼를 늘 보아왔다. 그렇지만 두려움을 느낀 적은 없었다. 여기서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개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로부터 1년 뒤 인도에서 같이 공부했던 미얀마 스님의 지방 사찰을 찾았다. 도량에 마찬가지로 개들이 있어 체험담을 전했더니 스님은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으면서 “개들이 너의 공부를 시험했다”고 하였다. 지금도 개떼에 대한 두려움과 모욕감을 느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찔하다. 이러할진대 청설모나 개에게 자비관이 가능한가! 아직도 주저해진다.

오늘 새벽은 3시 30분 전에 일어나 선방에 올랐다. 선방에서 잤던 스님들을 제외하는 첫 번째 입실이다. 어둠 뒤 해골바가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약 1시간 45분을 앉았으나 캄캄한 조명이어서 그런지 호흡관이 선명하지 않다. 아침을 든 후 오전 9시까지의 수행 또한  순일하지 않다. 가끔 순간 잠에 꾸뻑 떨어지기도 하고 명료한 의식상태로 나아가질 않는다. 정신 차리고 보면 많은 스님과 재가 요기들은 모두 조용히 수행할 뿐이다.

인터뷰를 위해 바로 내려왔다. 같이 방 쓰는 스페인 친구가 벌써 내려와 있다. 스페인 요기는 오개(五蓋)와 관련한 자신의 상태를 질문하고 다음은 나의 차례가 되었다. 먼저 새벽과 밤인지 명료한 의식 상태가 진행되기보다는 약간의 혼침 상태가 있다고 보고하자, 이는 ‘불을 꺼서 캄캄해서라기보다는 이전의 습관이지 않겠는가’라는 답변을 해준다. 캄캄한 곳에서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될 수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좌선을 해왔지만 이곳처럼 완전히 소등하고 캄캄한 곳은 처음이다. 물론 선방이 아닌 내 처소에서 할 때도 어두운 경우는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났는데, 전번 인터뷰 때 빠옥 총림에서 제시하는 것은 <청정도론>의 수행법으로 출입식염 시에 코와 인중 주변의 한 점에 집중하라고 한다.

혹시 이러한 행법이 경장(Paca Nikya)에서 찾아 볼 수 있는지를 질문하였다. 스님은 바로 “경전에서는 분명히 제시해줄 수 없고, <청정도론>과 같은 주석서에서 그 근거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답변한다. 스님은 나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고서 “만약 이러한 주석서를 준거로 삼지 않는다면 각자 개인적인 이해에 따를 수 있다”고 전한다. 또한 이런 이유로 “반드시 주석서를 경장 이해의 기준으로 삼아야한다”고 강조하였다.

상좌불교 전통의 공부 태도와 수행 자세를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현장이었다. 경장만 가지고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수긍하고 삼배를 드리고 물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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