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확탕노탄(?湯?炭)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체감온도 39도. 가히 화탕지옥이다. 조만간 지구를 녹여 없앨 기세이다. 지구 온난화 현상은 새로운 뉴스가 아닌 오래된 뉴스가 되었다.

이렇게 날씨가 찜통, 불볕더위로 시달릴 때는 좌고우면하지 말고 피서하는 것이 최고의 상책이다. 문제는 어디로 피할 것인가? 온 세상이 열탕, 피할 곳이 마땅치가 않다. 심산유곡이나 바닷가로 가자니 교통 체증이 여간 심한 게 아니다. 게다가 바가지요금은 더위를 한껏 부채질한다. 피서가 아니고 고역이다.

‘확탕노탄(?湯?炭)’은 ‘뜨거운 가마솥과 용광로 속’이라는 말인데, 고통이 극심함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와전되어 ‘화탕(火湯)노탄’이라고도 한다. ‘확탕(?湯)’은 팽형(烹刑)으로서 예전에 사람을 가마에 넣어서 삶아 죽이는 형벌을 이르는 말이다. 팽형은 〈삼국지〉나 중국 고대 문헌인 〈통감〉 등에도 종종 나온다. 죄인을 뜨거운 가마솥에 넣어서 삶는 형벌인데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형벌이다.

확탕, 팽형과 관련한 유명한 ‘칠보시(七步詩)’가 있다. 위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는 동생 조식(曹植)의 재주와 시문(詩文)을 항상 시기, 질투했다. 조비는 동생 조식을 죽이고자 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했다. 만일 7보(步) 사이에 짓지 못하면 팽형에 처한다는 특별법을 발동했다. 이제 동생 조식의 운명은 형 문제의 칠보에 달린 그야말로 슬픈 운명이 되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일곱 번째 발자국이 놓이자마자 조식은 오언(五言) 시를 지었다.

煮豆燃豆阜(자두연두기),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네, 콩은 가마 안에서 우네, 본시 한 뿌리인데, 어찌 이렇게도 급하게 볶아댑니까?”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눈물 쏟아지는 고사이다.

그리고 ‘로탄(?炭)’은 화로인데 용광로를 말한다. 과거 용광로는 숱(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확탕노탄(?湯?炭)’을 흔히 ‘화탕노탕(火湯爐蕩)’이라고 쓰고 있으나 확탕노탄의 와전이라고 생각한다.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불화(火)’자를 사용해서 ‘화탕(火湯, 불 속)’으로 쓰게 된 듯하다. 끓는 가마 속이나 불 속, 그리고 용광로 같은 곳이라는 뜻으로, 지옥 또는 현실이 매우 지옥 같음을 상징한다.

지옥 가운데 화탕지옥도 있다. 화탕지옥은 ‘불지옥’이다. 죄인을 하루에도 수십 번 불 속에 넣는다고 한다. 죽을만하면 꺼내고 집어넣기를 반복한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악행을 가능한 하지 말아야 한다.

전통강원의 교과서인 〈서장(書狀)〉은 대혜 선사의 편지글(서장)을 모은 책이다. 유시랑(劉侍郞)은 당시 장관급의 고급 관료였는데, “어떻게 하면 이 복잡한 세상, 그리고 치열하게 타오르는 번뇌를 피해서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은 듯하다. 이에 대하여 대혜 선사는 선승다운 명답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거사님)예전에 어떤 젊은 수행승이 노(老)선승에게 이렇게 물었소. ‘세계가 이렇게 뜨거운데, 어느 곳에 가서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노선승이 말씀하셨소. ‘확탕노탄(?湯?炭, 가마솥과 용광로 속)’ 속에서 피하시오. ‘뜨거운 가마솥과 용광로 속에서 어떻게 피한다는 것입니까?’ 노선승이 말했소. ‘그 속에는 갖가지 고통이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衆苦不能到)’”

치열하게 타오르는 번뇌 망상 극복 방법을 물었는데, ‘펄펄 끓는 뜨거운 가마솥과 용광로 속에서 피하라’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고도 훌륭한 명답이다. 산속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데, 세속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번뇌가 일어난다면 그런 수행은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환경적인 치유일 뿐이다. 번뇌는 정념(正念, 淨念)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

번뇌는 치열한 현실 속에서 극복해야 한다. 이열치열. 현실을 떠나서 번뇌를 극복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번뇌를 극복하는 최상의 방법은 번뇌를 괘념하지 않는 것 밖에 없다. 괘념하면 그 즉시 번뇌에 끌려 다니게 된다. 속칭 신경을 끊는 것이다. 그러면 번뇌는 저절로 극복된다. 아니면 확탕노탄 속밖에 없다. 그 속은 500도 이상이 되어서 갖가지 고통이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衆苦不能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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