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 처능, 조선 불교 철폐에 맞서다

벽산 원행, 자현 지음/조계종출판사 펴냄/2만 2천원

이 책은 현 조계종 총무원장 벽산 원행 스님〈오른쪽 사진〉의 첫 저술이다. 여러 권의 불교 교양서를 집필한 대표적 학승 자현 스님과 공저했다. 백곡 스님의 숭고한 실천을 널리 알리고 시대를 뛰어넘는 귀감으로 삼고자 원행 스님의 박사학위 논문 일부를 저본으로, 그 위에 백곡의 생애와

한국불교사 바꾼 단 한번의 상소문
<간폐석교소>올린 백곡 처능 일대기
백성과 함께 아파한 진정한 수행자

우리말로 번역한 〈간폐석교소〉 원문을 덧붙여 펴냈다. 제 4차 산업혁명의 일대 전환기 속에서 한국불교에 가장 필요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책임의식과 선공후사 멸사봉공의 자세이며 그것이 실천종교로서 불교가 가야 할 길이라는 저자들의 메시지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잊혀서는 안 되는 시대의 불꽃, 백곡 처능

백곡 처능(1617∼1680) 스님은 광해군 8년인 1616년 인도 스님에게 구슬 2개를 받아 삼키는 태몽 속에 잉태돼, 이듬해인 5월 3일 아버지 전씨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탄생했다. 이후 12세에 벽암 각성의 제자인 의현에게 출가하고, 17세부터 20세까지는 선조의 부마인 신익성에게 승려의 신분으로 유학과 시문을 수학한다. 이는 백곡이 유학과 역사 및 시문에 능한 배경이 되는데, 이로 인해 문장가로서의 명성을 크게 떨친다.

이후 20여 년간 사법 스승인 벽암 각성을 모시며, 전란 과정서 파괴된 사찰과 민중을 추스르는 실천행을 펼친다. 그러다 45세가 되던 1661년 현종과 유교 대신들이 불교를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목숨을 내놓고 불교 탄압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문인 〈간폐석교소〉를 올린다. 이로 인해 폐사의 위기에 직면한 봉은사와 봉선사가 존치될 수 있게 된다. 50세에 백곡은 정부로부터 남한산성 승통(僧統)에 제수되며, 54세에는 남한산성 도총섭에 오른다. 그러나 중생구제를 더 중시한 백곡은 오래지 않아 사임하고, 교화와 수행에 매진한다. 1680년 64세의 고령으로 모악산 금산사에서 5일간의 대법회를 주관하고, 6월 20일 가벼운 병증이 나타나 7월 1일 금산사에서 평온한 입적에 든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은 절대점에 위치한다. 이런 국왕을 상대로 비판의 칼날을 겨누며 조선 불교를 지켜낸 승병장인 벽암 각성의 사법제자가 바로 백곡 처능 스님이다. 백곡의 의기는 한국 불교사에 일대 획을 긋는 사건임에도 어찌 된 일인지 우리들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중기를 가르는 왜란과 호란은 방만한 유교 사회에 불어닥친 외부적 충격이자 희대의 비극이었다. 전란의 상황에서 국왕과 유생들이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도망칠 때, 스님들은 승병을 조직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산화하는 의기를 떨쳤다. 그럼에도 조선은 혼란이 수습되자, 스님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오히려 불교를 말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때 죽음을 각오하고 임금을 정면으로 비판한 8,150자의 상소 〈간폐석교소〉가 현종에게 올라간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에 대한 비판은 유래가 없는 일이며, 그것도 숭유억불의 조선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온몸으로 불교를 지켜낸 숭고한 이가 바로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백곡 처능 스님이다.

백곡은 백성과 함께 아파하고 시대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한 진정한 수행자였다. 또 그가 쓴 〈간폐석교소〉서 확인된, 불교를 넘어서는 방대한 지식의 스펙트럼은 학인들의 지남철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런 점에서 백곡은 시대를 넘어 오늘의 우리와 한국 불교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 또한 조선 중기 가혹한 척불의 시대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고 냉철한 논리로 척불의 시정을 촉구한 백곡 처능의 〈간폐석교소〉는 조선조 500년간에 걸친 배불 정책하의 불교사에서, 단 한 편의 반박 상소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와 가치가 높다.

가혹한 불교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다

조선 초인 태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불교 탄압 정책은 조선 중기로 오면서 더욱 심해진다. 세조의 돈독한 신심과 불교를 옹호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세조의 죽음 이후 불교를 탄압하려는 시도는 더욱 격렬해졌다. 당시 유생들의 상소에 실려 있는 표현 그대로 불교의 뿌리를 뽑기 위해 온갖 행태가 자행된다. 그 결과 연산군 · 중종 대에 이르면 그나마 남아 있던 선종과 교종 두 종파마저 모두 없어지고, 조선 초기 이래로 실시한 승과고시제마저 철폐된다. 이로써 승려가 될 수 있는 길은 차단되고, 승려의 신분을 인정하는 제도마저 모두 폐지되는 등 노골적인 폐불 정책이 시행된다. 당시 이미 조선의 승려들은 도성 출입을 금지당하는 등 심한 신분적 차별을 받고 있었다. 더 이상 불교의 소생을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문정왕후가 등장하면서 새 국면이 펼쳐진다. 문정왕후는 선종과 교종을 부활하고 승과와 도첩제를 실시해 선종과 교종 양쪽에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고, 전국 300여 개의 절을 공인하는 등 과감한 불교 중흥 정책을 전개한다. 또한 양주 회암사에 있던 승려 보우를 맞아들여 봉은사 주지로 임명했으며, 훗날 중종과 함께 묻힐 마음으로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능을 봉은사 인근인 정릉으로 이장한다. 문정왕후의 노력 덕분에 불교 교단은 활기를 띠었고,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실시한 승과를 통해 대두한 인물들이 청허당 휴정과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등이다.

그러나 당시 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노력에 격렬히 반발한다. 각지서 보우를 타도하라는 상소와 승과를 폐지하라는 상소가 빗발친다. 보우를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다 못해 성균관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는 집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문정왕후 덕분에 잠시나마 부흥의 빛을 보인 불교계 고승들은 유생들의 탄압에 다시금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얼마 뒤 발생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이들은 승병이 되어 나라와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에 앞장선 덕분에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소 나아졌지만, 위정자 및 유생들의 부당한 핍박과 시달림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한 주요 산성을 쌓고 지키는 일은 모두 승려에게 맡겼고, 관가와 유생들에게 종이와 기름, 신발 등을 만들어 바치게 했으며, 그 밖에 잡역도 부가되었다. 특히 현종은 즉위(1659년)와 동시에 양민이 출가해 비구나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했고, 이미 비구나 비구니가 된 사람들도 환속할 것을 명령했다. 또 서울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과 인수원을 철폐하고, 거기에 모신 여러 선왕의 위패를 땅에 묻어버렸으며, 사찰 소속의 노비와 밭은 모두 몰수했다.

이와 같은 가혹한 불교 탄압 속에서 정면으로 자신의 뜻을 밝힌 승려가 바로 백곡 처능이다. 백곡은 현종이 불교를 탄압하자 그에 항의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려 조선왕조 척불 정책과 배불 사상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자 했다. 이 탄원 형식의 상소문이 바로 〈간폐석교소〉이다. 〈간폐석교소〉는 조선시대 모든 상소문 중 가장 분량이 많은 것으로 현종의 불교 박해를 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곡이 〈간폐석교소〉를 집필한 동기

백곡 처능은 조선시대 가혹했던 배불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그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기를 촉구한 유일한 승려로 기록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유문집인 〈대각등계집〉과 〈백곡선사탑명〉, 이 탑명을 쓴 최석정의 〈명곡집〉 등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그의 행장을 일부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적 재능이 무척 뛰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걸출한 선배들의 아낌없는 사랑과 칭찬을 받았음은 물론, 효종 역시 세자로 있을 때 백곡의 글재주가 높은 경지에 있음을 극찬할 정도로 시에 대한 재주가 탁월했다.

백곡은 많은 사례와 경전 등을 근거 장문의 〈간폐석교소〉를 지어 당시 가혹했던 배불 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줄 것을 간청했다. 백곡은 이 글을 통해 불교를 비판하는 근거가 논리적 타당성을 갖추지 못하다고 조목조목 대응했다. 그러면 백곡이 이와 같은 장문의 〈간폐석교소〉를 제출한 동기는 무엇일까?

“삼가 승정원서 반포한 의결 사항을 보고 엎드려 성지를 받잡건대, 승려를 모두 말살하기 위해 비구니는 환속시키고 비구도 역시 없애기로 의논이 되었다 하옵니다. 신은 실로 우둔하여 전하께서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엿보지 못하겠습니다.”

그가 절박한 마음으로 붓을 들 수밖에 없었던 직접적 계기가 있다. 우선 현종이 즉위하자 양민이 출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비구나 비구니가 된 자는 모두 환속시켜 그것을 어기는 자는 벌을 받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듬해 정월에는 부제학 유계(兪棨)가 상소를 올려 이단을 척결하는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현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도성 안에 있던 자수원과 인수원의 혁파를 명령했다는 것도 직접 계기가 되었다.

〈현종실록〉에 따르면 자수원에 봉안된 여러 성인의 위패를 땅에 묻도록 했다는 사실과 선교 양종의 수사찰이던 봉은사와 봉선사까지도 철폐해 승려들을 환속시키고 불교를 무너뜨리려 했던 정황도 백곡을 자극했다. 이와 같은 당시 불교계의 절박한 현실 문제가 상소의 직접 동기가 됐지만, 근본적으로는 도첩제와 승과제의 폐지 등 가혹한 척불시책에 대한 부당함이 백곡으로 하여금 〈간폐석교소〉를 쓰게 하였다.

〈간폐석교소〉, 그 후

백곡이 상소를 올린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후 몇 가지 조치와 추이 과정을 통해 짐작해볼 뿐이다. 서울의 비구니 사찰인 자수원과 인수원의 양원은 이미 철폐되었지만, 봉은사와 봉선사는 끝까지 존속되었다. 또 현종이 만년에 봉국사(奉國寺)를 창건하는 등 불교를 믿은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현종 15년에 백곡이 남한산성도총섭에 임명되었다는 점 등은 백곡 처능의 상소가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저자 벽산 원행 스님은?

스님은 1973년 태공 월주 큰스님을 은사로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서 출가했다. 그 뒤 해인사승가대학과 중앙승가대를 졸업한 뒤, 동국대 교육대학원과 불교대학원서 수학했다. 2008년 한양대학교서 석사학위를, 2013년에는 한양대 대학원서 〈조선 초기 관료들의 성리학적 정치 이념과 함허 선사의 현정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스님은 나눔의 집 원장, 대한불교조계종 호계원 및 중앙종회 사무처장, 제17교구 금산사 주지, 전국교구본사주지협의회 회장, 중앙승가대 총장, 중앙종회의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6대 총무원장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장, 그리고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 대표의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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