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랏말싸미〉를 위한 辯

친제·협력설 논쟁은 꾸준해
협력설 기반한 픽션 영화에
다큐적 잣대 잔혹하지 않나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훈민정음 창제 주역으로 세종대왕이 아닌 신미 스님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영화 내용을 반박했다. 세종은 144312월 훈민정음 창제를 알렸다. 하지만 신미 스님의 기록은 1446년에 가서야 처음 등장한다. 문종 역시도 선왕 세종이 1446년에 신미의 이름을 알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정사(正史) 기록인 실록을 살펴보면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완벽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신미 스님을 필두로 한 창제 협력설은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가설이다.

실제 조선시대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해 언문을 만들었고, 이는 범자(梵字)’를 본받았다고 밝힌다. 음소문자의 원리와 계보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던 김만중 역시 서포만필에서 범어는 초··종성으로 합해 글자를 이루니 생성이 무궁하다. 우리나라도 이로 말미암아 언문을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현대에서도 협력설은 범어기원설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된다. 대표적인 학자가 정광 고려대 국문과 명예교수다. 그는 한글 창제를 세종 단독이 아닌 세종의 형제·자녀들과 불가의 학승이 이뤄낸 위대한 발명으로 본다. 최근 저서에는 신미가 반절하자(反切下字)의 운을 중성과 종성으로 나누고 모음에 해당하는 중성 글자 11자를 따로 제정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역사의 뒤편에 묻혀 있던 신미 스님을 전면으로 소환한 것은 불교계의 노력이었다. 정찬주 작가는 소설 천강에 비친 달로 신미 스님을 그려냈고, 박해진 작가는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 평전을 통해 스님의 면면을 역사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몇몇 스님들이 자문 역할로 참여한 영화 나랏말싸미도 마찬가지다. 앞선 역사적 사실들에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픽션이었다. 범어기원설과 협력설에 기반한 역사영화임에도 유독 나랏말싸미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혹독한 잣대가 적용되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 세종 친제신화라는 불가침의 영역을 영화 나랏말싸미가 침범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역사도 종교도 신화화는 위험하다. 새로운 이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없게 된다.

실제 한 문화평론가는 칼럼에서 신미를 통해 한글이 조선의 순수 창작품이 아닌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문화 전통의 산물인 것처럼 인식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미 15세기부터 내려온 범어기원설이나 전문 학자들의 여러 학설을 한 번에 부정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재 제기되는 역사왜곡 논란의 문제점은 단순 창제설의 이견을 넘어 훈민정음 관련 불교 역할을 부정하는 데에 있다. 다양한 학설을 통한 다각적 조명이 아닌 전체주의적 접근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불교계 역시 이번 논란을 계기로 스스로 뿌리 깊은 나무가 돼야 한다는 교훈을 가졌으면 한다. 감정적 대응보다 신미 스님의 역할론과 훈민정음 창제에서 불교의 영향을 체계적 연구를 통해 규명하는 노력을 범불교적으로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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