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내면에서 자유로운 털어놓기

부처·예수 같은 신 아니라
내 안에 묻는 하나의 대화
걸릴 것 전혀 없는 내면서
안 좋은 기억들 쏟아내보자

신과의 대화 글쓰기

신과의 대화 글쓰기라고 하니까 ! 신이 있기는 해?’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런 경우를 들어 헛다리짚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은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신탁을 내려주는 신이나 교회 첨탑 아래, 사찰의 대웅전 안에 계시는 그분이 아니다. 글쓰기명상에서 신이 계시는 처소를 굳이 말하자면 원고지나 노트북 모니터, 그 어느 지점인지 모를 곳이다. 아니, 그 안에서 부재중이어도 상관없다. 확인불가 조건에서도 우리는 신을 믿어왔거나 괜히 쌍심지를 켰거나 하소연을 했거나 이번 일만 잘 되면, 하고 긴급하게 읍소한 전력이 있다.

나는 신이 어디에 있나보다는 신이 나와 어떻게 연관 있는가에 관심이 크다. 나라는 존재가 없을 때도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식의 질문 말이다. 나라는 존재가 없으면, 신은 있지 않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나라는 존재가 있고, 글쓰기명상을 하고 있으며 신과의 대화 글쓰기를 실습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 신은 어디 계실까. <신과의 대화 글쓰기>는 그런 질문과 응답을 직관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구상했다.

어떤 신이건 간에, 당신에게 그 분은 탁월한 해결사다. 안갯속 같은 미래의 길을 열어주거나, 당신의 지혜로는 풀 길 없는 실타래를 풀어주거나, 당신이 감당키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는 분이다. 설사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더라도 그조차도 신의 뜻이리라는 믿음으로 견디게 해주는 백마 탄 왕자였다. 수많은 청중 속에서도 당신의 신은 늘 유일한 단수다. 오늘 당신은 그 신을 만난다. ‘이라는 단순 설정 안에서 담백하게 묻고 답하는 글쓰기. 이른바, 11 맞짱 뜨기 글쓰기다.

- 지금 당면한 문제를 6하 원칙에 의해 구체적으로 적는다. 그에 따른 지금의 감정도 적으면서 당신의 신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

- 당신에 대해 신은 완벽한 수용자다. 화가 나는 상황이면 그 분노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공격적, 냉소적, 비난조로 질문해보라.

- 질문을 반복해도 상관없다. 당신의 신 또한 같은 답변을 할 수도 있다.

- 질문의 관점을 바꿔서 묻기도 하라. 가령, 내가 주인공인 질문이 아니라 타인이 주인공인 질문도 해보라.

- 당신이 아닌 사물의 관점에서 물어보라. 사물과 신의 중재자로서 질문하고 답을 드러내보라.

이 작업을 통해 당신은 그런 과정의 조그만 결실을 보게 될 것이다. ‘신과의 대화 글쓰기는 끈질긴 대화의 꽃이 피어나고, 그 꽃송이에서 열매가 맺히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다는 의도에서 장만했다. 당신이 준비할 것은 딱 한 가지. 포기하지 않고 손끝 대화를 이어가겠다는 결심 한 장이면 충분하다. 당신은 당신의 말을 적고, 신은 신의 말을 적어가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은 단순한 시나리오 대본이다. 하지만 당신은 나와 신이라는 설정 속에서, 그동안 아무에게도 묻지 못했던 유치한 질문이나, 어린아이의 응석 같은 말들을 쏟아내는 데 충실하면 그만이다. 장담하건대 당신의 신은 반드시 반응한다. 진지한 수용과 반문과 호기심의 눈빛이 당신의 손끝을 통해 전해질 것이다. 이를테면 이와 같다.

: 길동이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데, 어떻게 하죠?

: 피가 거꾸로 솟구칠만한 일이라도 있었어?

: 그거야 수도 없이 많죠. 내 뒷담화한다고 인찬이가 그랬단 말예요. 그게 한두 번이겠어요? 몇 년 전에는 정현보 뒷담화를 한 걸 현보가 알고 둘이 경찰서에 불려갈 만큼 싸웠단 말예요.

: 길동이가 뒷담화하는 걸 직접 보거나 들었어?

: 안 봐도 뻔하잖아요. 걔는 전과가 있단 말예요.

: 넌 혹시 친구들하고 남의 이야기 전혀 하지 않아?

: 그거야가끔하지만, 길동이처럼 악의적으로 하지는 않죠.

: 호오, 악의적으로는 하지 않지만, 하긴 한단 말이네?

질문과 응답을 받아 적다보면 참 인간적인 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뿐만 아니라 생각하지 못했던 이면조차도 꿰뚫고 있구나 하는 감탄이 일기도 한다. 내가 묻고 내가 적는 것인데 그럴 리가? 이래서 사람은 자신을 너무나 모르고 한 생을 보내는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이런 체험이 왜, 몸을 고요히 정지시켜 자신의 몸 감각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찬찬히 관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인지 증명해준다. 삶이란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출발하여 이와 같은 공부를 통해 지혜를 확장해가는 것이리라.

홈 그라운드 글쓰기

21세기 초반 대한민국 전역이 들썩거렸던 사건을 기억하는가. 2002 월드컵 축구 4강 달성, 이를 두고 전문가의 이구동성이 있다. 월드컵 4강은 한국이 홈에서 뛰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다는 것. 홈 게임은 통상 30% 정도 경기력 향상을 가져온다는 것. 하지만 나는 이런 뒷이야기의 실효성을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홈 그라운드라는 게 어떻게 그런 효력을 발휘하는가에 꽂혀 있다. 그런데 양자물리학에게 물어보니 그럼, 당연하고 말고!’라고 한다.

현세에 이르러 대한민국 4강 신화 곱하기 200은 될 만한 대형 사건이 양자물리학이다. 양자물리학은 모든 물질에 지능이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세기말 과학계를 뒤집어 놓았다. 모든 물질은 고도의 지능을 가진 미립자로 만들어져 있고, 그 미립자를 조종하는 주체는 마음임을 증명한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라고 하신 2500년 전, 붓다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다르지 않은 결과가 이제야 입증되다니! 월드컵 4강 신화는 그런 점에서 이 땅에 홈 그라운드의 이익과 양자물리학을 실제적 현상으로 드러낸 멋진 사건이다.

홈 그라운드 글쓰기는 마음의 에너지를 마음껏 즐기는 언어의 막춤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상대를 내 앞에 앉혀놓고 하고 싶은 대로 내질러대는 막춤 말이다. 그를 내 앞에 꿇어앉히든 두 손을 들게 하든 상관없다. 일단 마음으로 상대를 정했으면, 냅다 써갈기기. 7만 홈 팬들이 당신의 모음 한 획, 자음 한 획마다 미친 듯이 함성을 질러대는 그 속에서 나만의 욕망과 분노와 득의와 기세 빵빵한 언어들을 이끌고 유유히 적진을 돌파해가는 스타 플레이어가 돼보라는 제안이다. 글이란 이런 맛에 쓰는 것이다. 그것이 상대의 골망을 뒤흔드는 결승골이 되든 말든, 그런 결과에 연연할 일은 아니다.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모든 감정, 모든 언어, 모든 기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당신은 당신만의 홈 그라운드 글쓰기를 즐길 수 있다.

- 마음의 독성이 차올랐을 때, 당신은 위험하다. 이때 독성 그래프를 치솟게 한 그 사람을 당신의 모니터에 소환하라. 상대를 명확히 규정하고, 삿대질하듯 쓴다.

- 마음의 대상을 내 앞에 앉혀놓고, ‘말하듯이, 악 쓰듯이, 울먹이듯이, 뒹굴면서 소리지르듯이마구 쓰는 글쓰기

- 세상의 모든 에너지가 당신을 돕고 있다는 전제하에 언어는 물론,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여 언어를 초월한 언어로 자유롭게 글쓰기

박미라는 이런 종류의 글쓰기를 자신의 저서 <치유하는 글쓰기>에서 미친년 글쓰기라고 명명한다. 치료 글쓰기로 유명한 페니베이커 박사는 <털어놓기와 건강>이라는 저서에서 감정표현 글쓰기라고 했다. 어떤 표현으로 은유되어도 좋다. 당신이 만약, 자신만만한 패기와 결기의 눈빛으로 온 우주의 응원을 가슴에 품고 모니터 앞에 놓인 손가락 수다를 허용한다면, 준비 끝이다.

홈 그라운드 글쓰기 효력은 엄청나다. 하지만 차마, 정신치료 받으러 갈 필요도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정신과 문 앞에서 뒷덜미 잡아채 진료비 깨나 건진 실화가 몇 건 있긴 하다. 몇 년 전, 이마의 열이 열흘이나 내려가지 않아서 사직서를 품에 안고 술 사달라고 온 후배가 있었다. 중소기업의 상층 간부였던 그 친구에게 언제부터인가 사장이 일거리를 주지 않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은 눈치도 못 챘다던가. 그는 20여 년 전부터 그 사장과 한솥밥 먹으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소위, 창업공신이었다. 그런 창업공신이 슬슬 걸림돌이 된 이유는 후배가 용돈 줘가며 귀여워했던 사장 아들이 장성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눈치 챘다. 드디어 내가 팽 당하는구나. 후배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생각은 그랬는데, 감정은 그러지 않았다. 그날부터 빗나간 해저 지구판처럼 위장이 비틀리고, 메스껍고, 우울하고, 슬프고, 아득했다.

후배가 말했다. 나 인생 폐품 됐어 형. 내가 말했다. 이왕 폐품된 거, 한바탕 구겨지는 소리라도 질러보지 그래. 그럴까? 그럼, 그런 사람은 너의 저주와 악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여생을 보내야하지 않겠어. 야아, 말만 들어도 통쾌하네. 그렇지? 통쾌하지? 내일 회사에 가거든, 어차피 일감도 없을 텐데. 모니터에 계속 사장을 향한 저주와 악담과 환멸과 20여 년간 헌납한 청춘과 간혹 덜 채워진 급료와 사장 추모비, 사장 추도사, 사장한테 인간적으로 남기고 싶은 말. 이런 거, 실컷 써. 모니터에 두두두두 써 갈기고, ‘저장 안 함엔터 한 번 누른 후 또 쓰기 시작하라고. 가끔 사장실 한 번씩 노려보는 거, 잊지 말고.

성실한 후배는 그렇게 닷새를 계속 했다. 하루 종일 사장실을 바라보며 빈 모니터를 채우고 저장 안함, 엔터 탁!’을 거듭했다. 그러는 동안, 후배가 경험한 기적이 있다. 첫날의 감정과 둘째 날 감정의 온도 차를 느꼈다. 셋째 날과 첫날의 온도차는 너무나 커서, 사장의 고충이 후배 가슴에 들어오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넷째 날은 사장이 가련해지고, 다섯째 날은?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사장에게 그동안 진심으로 미안했다고 말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

20여 년 동안 사장님은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이 외롭고 괴로웠을까. 창업 초에 몇 년 고생하고, 그 공로만 헤아리면서 얼마나 많은 위세와 기세와 거드름을 피워왔던가. 온갖 아는 척으로 사장 입장을 난처하게 했던가. 이래서 개국공신을 팽하는구나. 그는 모니터를 은폐용 장애물 삼아 납작 엎드리고 싶었다. 다섯 째날,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사장이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상무, 이거 모레까지 기안 좀 해주게나. 후배는 그로부터 그 직장에서 5년 더 일한 후 그해 봄날, 직원들의 따뜻한 환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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