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의 길 시코쿠] 26. 오셋타이 공덕과 행복
[정진의 길 시코쿠] 26. 오셋타이 공덕과 행복
  • 박지산 자유기고가
  • 승인 2019.08.01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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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어린 보시… 여긴 ‘소확행’ 순례길

40번 간지자이지서 맞는 아침
“힘내 걷겠다” 기도하며 다짐
운동부 학생들 산사 기원 눈길
귤·목욕비 오셋타이 온정 ‘훈훈’
소소한 행복 느끼는 힐링 순례
40번 간지자이지의 전경. 아침 운동 후 승전 기원을 위해 지역 학교 운동부 학생들이 사찰을 찾는 모습은 매우 신선했다.
40번 간지자이지의 전경. 아침 운동 후 승전 기원을 위해 지역 학교 운동부 학생들이 사찰을 찾는 모습은 매우 신선했다.

40번 간지자이지(觀自在寺)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사찰 한 켠에 있는 츠야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40번 사찰은 순례자들을 위해 츠야도(通夜堂)과 슈쿠보(宿坊)을 모두 운영한다. 절에서 운영하는 숙소인 슈쿠보에서 묵을 경우 보통 아침예불에 필수적으로 참석해야 하지만, 이곳 간지자이지는 자율참석이다. 다음 사찰까지 50km가 넘다보니 새벽 일찍 출발하려는 순례자들을 배려해서다.

반면 츠야도의 경우 그러한 종교적인 규율에서 자유롭다. 본래 츠야도라는 것은 절에서 철야로 정진하는 이들이 잠깐 눈을 붙이거나, 쉬기 위한 작은 방이기 때문이다. 시설이 좋은 곳은 간단한 샤워시설이 있거나 이부자리가 마련된 츠야도도 있지만, 노숙순례자들에겐 지붕과 벽이 있는 안전한 잠자리란 사실에 감지덕지하다.

6시에 일어났지만 주위는 꽤나 밝아있다. 화장실로 가면서 슈쿠보 쪽을 보니 벌써 몇몇 순례자들이 길을 나섰는지, 현관이 열려있다. 오늘의 목표는 30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순례자 휴게소. 노숙을 할 수 있는데다, 하루를 마칠 즈음 도착할 만한 거리다.

괜히 본당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새벽에 출발한 순례자가 공양 올렸는지 향 몇 가닥이 향로에서 타고 있다. 간지자이지의 본존은 아미타부처님과 약사여래, 십일면관세음의 삼존불. 사찰의 연기 설화에선 한 그루의 나무에서 3구의 불상을 코보 대사가 손수 조성했다고 한다. 안에서는 예불을 준비하는지 부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잠깐 손을 모아서 부처님께 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는 감사히 잘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힘내서 걷겠습니다.”

츠야도로 돌아와 보니 모두들 짐을 부산히 싸고 있다. 언제까지 같이 길동무를 할진 모르겠지만 홋카이도 콤비와 계속 함께 걷게 된다. 그래도 맘이 잘 맞는 길동무들과 함께 이어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뒤에 묵을 순례자를 위해 츠야도 청소까지 마치고서, 오전 7시를 조금 넘겨 길을 나선다.

산문을 나서려는데 한 무리의 학생들이 조깅을 하면서 사찰로 달려온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순간 우뚝 서있는데 인솔자로 보이는 교사 한 분이 인사를 한다. 그것을 신호로 학생들이 밀물이 들이 닥치듯, 인사를 하며 본당을 향해 달려간다. 어안이 벙벙하여 있으려니 코에이 씨가 설명한다.

“박상, 이런 광경은 처음 보죠? 아마도 지역 학교 체육부일겁니다. 보통 아침 트레이닝하면서 사찰이나 신사를 들려서 대회 우승을 기원하곤 하거든요. 일본에선 꽤 흔한 광경입니다.”

산문을 빠져나와 순례길로 막 들어서려는 찰나, 등 뒤로 또다시 왁자지껄한 소리가 나 돌아보니 참배를 마치고 다시금 달려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아침부터 다들 활기찬 모습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40번 간지자이지에서 이어지는 순례길은 국도를 타고 걸어가다가, 옛날 길을 따라 고개를 넘느냐, 그대로 국도를 타고 나아가느냐로 나뉜다. 결국에는 다시 국도로 통하기 때문에 많은 순례자들이 걷기 편한 국도를 따라 걷곤 한다. 필자도 이틀간 노숙과 츠야도로 밤을 지샌지라 체력적으로 한계가 느껴져 국도를 따라 걷기로 하고 천천히 나아갔다.

간지자이지에서 이어지는 순례길은 완만한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이다. 길 옆으로 스치듯 보이는 바다가 제법 멋있다. 실제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한 길이자만 지친 몸에는 큰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죽하면 이날 일기에 “바다가 예뻐 봤자, 바다지”라고 심드렁한 감상을 써두었을 정도다. 홋카이도 콤비도 꽤나 지쳤는지, 여느 때와 같이 신나는 입담은 나오지도 않고 무겁게 지팡이를 끄는 소리만 순례길에 울렸다.

그렇게 2시간가량 꼼짝없이 걷다가 옛날 순례길의 분기점에 들어선다. 오늘은 모두가 국도를 따라 걷기로 결정했기에 잠시 길게 쉬어가기로 한다. 번듯한 가건물로 되어있는 버스정류장에 들어가 땀을 들이고 가려니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말을 건다.

오셋타이로 받은 자몽. 가지 하나를 잘라주셨다.
오셋타이로 받은 자몽. 가지 하나를 잘라주셨다.

어디서 왔느냐, 1번부터 걸었느냐, 오늘로 며칠 째냐. 순례길에서 자주 듣는 질문들에 답을 하고 있으니 할아버지 한 분이 물어본다.

“순례자 양반들, 혹시 귤 먹을런가? 내가 오셋타이 함세.”

다들 뭔가 새콤하니 힘이 나는 걸 먹고 싶었기에 감사히 받겠다고 답례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밖으로 나간 할아버지는 정류장 옆에 있던 트럭을 타고선 휑하니 가버린다. 순간 놀라서 멍하니 있으려니 옆에 있던 할머니들이. 저 할아버지는 버스를 기다리던 게 아니라, 귤밭에 일을 보러 가다 잠깐 놀고 있던 사람이라며 웃어보였다.

“아마, 자기네 귤밭에 귤 따러 갔나보우.”

5분 뒤, 다시 돌아온 할아버지는 주렁주렁 귤이 달린 가지를 불쑥 내밀었다. 이 지역의 특산물인 본탄(文旦)귤이다. 처음에는 여름 귤의 한 종류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시코쿠의 기후에 맞게 개량된 자몽이었다.

가지에서 귤을 골라내보니 어른 주먹만 한 것이 11개나 나왔다. 크기도 크고 무게도 있지만 오셋타이로 받은 것이니 물릴 수는 없다. 그 자리에서 2개를 까서 다 같이 나눠 먹곤, 서너 개씩 배낭에 챙겨 넣는다. 작은 버스정류장 안에 상큼한 귤 향기가 번진다.

두꺼운 껍질을 어찌하나 했더니 할아버지가 밭에 뿌리면 된다며 그냥 두라고 한다. 그러면서 껍질에 만져지는 기름을 몸에 바르면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다며 목덜미와 팔에 슥슥 문질러 주신다.

시은(施恩)에 묵직해진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앞으로 걸어 나간다. 다들 정신이 조금 돌아 왔는지 다시금 왁자지껄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연히 화제는 오셋타이다.

“난 처음에 귤을 주신다기에 한 서너 알 주실 줄 알았지!”
“본격적으로 가지를 끊어 오실 줄이야. 이 동네 귤이 많이 나긴 하지만요.”
“그래도 며칠 과일 걱정은 없겠습니다. 박상은 이렇게 특이한 오셋타이 또 받아본 적 있어?”
“그러네요, 예전에 도쿠시마 어딘가에서 양배추를 한 통 받은 적 있어요.”
“양배추? 그냥 생양배추 말이야?”
“네, 더위에 먹으면 좋다면서 밭에서 그대로 캐서 주시더군요. 한 3일 양배추 잔치였죠.”
“우린 죽순을 받은 적 있었는데 참 난감했지. 조리도구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나는 어찌어찌 먹었는데 남은 건 자연으로 방생했지.”

돌아온 입담에 다시 힘내서 걸어 나간다. 한 시간 정도 걸어가자 캠핑장과 공원이 모인 지역에 들어섰다. 캠핑장엔 가족단위로 꽤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부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코에이 씨가 제안을 하나 한다. 지도를 보니 얼마 안가 온천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몸을 담구고 가는 건 어떠냐는 것이다. 마침 제대로 몸을 씻은 지도 좀 됐고, 온천이라니 냉큼 제안을 받아들인다.

온천에 도착하니 개장시간이 30분정도 남았다. 바닷가 근처라서인지 해수온천이라고 적혀있다. 문 앞에서 어슬렁대고 있으려니 직원이 문을 열며 오늘은 첫 손님에 순례자가 세 사람이나 있으니 재수가 좋겠다며 너스레를 떤다.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니 입에서 저절로 신음소리가 난다. 몸에 긴장이 풀려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고, 간단한 빨래거리를 손으로 대충 빤다. 여유롭게 있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해가 지기 전엔 오늘의 잠자리에 도착해야하니 서둘러 씻고 나간다.

온천 입구에 있는 늘어서있는 특산품 점에서 시식용으로 놓인 과자를 몇 개 집어 먹곤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온천을 마치고 나오는 할머니 한 분이 불러 세운다.

“순례자 분들 목욕비를 보시하고 싶었는데, 잠깐 차에 다녀오는 사이에 다들 들어가셨더군요.”

그러시면 한 사람당 1천 엔씩 오셋타이라며 손에 쥐어주신다. 아침엔 시은으로 배낭이 무거워 지더니, 이젠 지갑까지 무거워 진다. 손빨래한 양말과 속옷들이 주렁주렁 배낭에 걸어놓고는 길을 나선다. 몸을 산뜻하게 씻어서인지 더운 바람이 선선한 산들바람으로 느껴진다.

아무리 힘들고 심심한 순례길이라도, 이런 소소한 행복이 다시금 두 다리에 힘을 불어 넣는다. 선의로 가득한 오셋타이, 함께 도반이 되어 길을 걷는 순례자들,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장소들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이 순레길이야 말로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길임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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