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외도 타파하며 불교 정립

그림. 강병호

기원전(B.C) 1500~2000년 경 인도에서 베다문명이 완성된다. 인도에서 기본적으로 존재한 종교인 브라만교는 바로 신에 대한 예찬이고 신에 대한 종교이다. 이것은 B.C 2000년에 시작해서 B.C 1500년에 완성되어 인도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인 브라만교이다. 그런데 B.C 5~6세기쯤 되니까 인도에서도 인간 중심의 사상이 일어나게 된다.

육사외도라는 사상가들이 출현한다. 인도사회에서 가장 뛰어난 사상가 여섯 명의 육사외도다. 부처님을 포함시키면 사상가 그룹이 일곱 명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을 제외한 나머지 6명의 사상가를 육사외도라고 표현한다.

업이 축적되면 어떤 과를 받는다
우린 부처될 수도 지옥갈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신화에서 인간으로
부처님께서 12처나 18계를 주장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육사외도 때문이다. 육사외도를 타파하면서 불교가 성립된다. 이것이 불교가 성립되는 사상적, 환경적 상황이다. 육사외도의 생각과 부처님의 생각의 차이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이 때 사고가 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왜 교통사고가 났는가? 전생 인연과 이 부분을 무시한다면 사고가 난 것은 아무런 인과도 없이 그냥 사고가 난 것이 될 것이고 또 숙명론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해석을 했을까. 불교에서는 전생을 인정한다. 지금까지 공부해오면서 분명히 인연과가 있음을 배웠다. 인연과가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은 나타난 ‘과’인 것이며, 분명히 전생이나 현생에서 교통사고가 날 수 있게끔 인과 연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과’가 나타난 것이다.

분명하게 내게 교통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어떤 인과 연을 지어서 ‘과’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과는 숙명론이냐, 운명론이냐 무엇이 되는가. 내가 받게 될 과가 분명히 정해져 있어서 죽든지 다치게 되는 것은 운명론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교통사고가 날 수 있는 인과 연을 내가 지었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인해 내가 죽을 수 있고 중상을 입을 수도 있고 또 상처가 조금 날 수도 있고 혹은 차만 조금 상하는 정도로 다양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란 것은 이생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르게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처와 18계를 제대로 알게 되면 인과의 문제가 해결된다. 내가 이생에서 전생에 지은 그 인연에 의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고 혹은 중상을 입을 수도 있고 혹은 경상을 입을 수도 있고 아니면 차만 조금 상할 수도 있다.

이것은 이생에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과보가 달라진다. 그러니까 업이 내게 축적되면 축적된 업력에 의해서 어떤 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뚱이 속에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도 60% 갖고 있고 지옥에 갈 성품도 40% 갖고 있다. 내가 암에 걸릴 확률도 45% 갖고 있고 이 세상을 편안하게 살아갈 확률도 55%다. 이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갖고 있는 45%를 통해서 조합이 잘 맞아 떨어지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 술을 마시고 생활이 제멋대로이면 조합이 잘 맞아 떨어져 암에 걸리지만, 반대로 내가 45% 암에 걸릴 확률을 갖고 있지만, 규칙적이고 바른생활을 한다면 암에 걸리지 않고 이생을 살 수 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30분씩 정진을 하는 바른생활을 한다면 암에 걸리지 않는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나타나는 과보는 다르다.

육사외도들- 아지타
아지타는 유물론적인 단견외도로서 세상을 지수화풍의 결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부정하고 단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과와 과보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이다. 과보도 없고 다음 생도 없는 모든 인연과를 부정한 사상가가 아지타이다. 부처님의 사상은 이 육사외도의 사상을 깨뜨리면서 불교가 이뤄진다.

육사외도들- 파쿠다라
파쿠다라의 사상은 지수화풍에다가 고락명을 덧붙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파쿠다라는 ‘무인외도’다. 여기도 인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신이 없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지수화풍 고락명의 고는 괴로움의 덩어리, 락은 즐거움의 덩어리, 명은 생명의 덩어리, 이것들이 함께 일곱 개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끌려다니면서 느끼는 수용자의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괴로우면 괴로운대로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주어지는 대로 살자는 평등이론을 주장하였다.

육사외도들- 막칼리
막칼리는 지수화풍·고락명에 생사득실을 더한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 인간들이 태어나고 죽고 내게 득이 되고 내가 잃고 하는 득실을 더한 외도가 막칼리로 ‘사명외도’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 마지막 안거를 끝내시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든다. 열반에 들기 전에 부처님과 더불어 많은 제자가 모두 다른 길로 전도를 떠난다.

부처님의 가장 큰 제자인 가섭도 전도를 위해서 길을 떠났다. 길을 가다가 바로 사명외도인 막칼리를 만나고 막칼리는 가섭에게 너의 스승인 부처님께서 열반했다고 말한다. 가섭은 사명외도의 말을 듣고 포교의 길을 접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는 사라쌍수로 달려간다.

가섭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10일 만에 도착하게 된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가섭이 돌아와서 “부처님이시여”하자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그 상태에서 두 발이 관 밖으로 나온다. 바로 선불교의 뿌리가 되는 삼처전심 중 하나인 화두 ‘곽시쌍부’이다.

육사외도들- 푸라나
푸라나는 숙명론을 주장한다. 푸라나를 따르는 무리들을 ‘숙명외도’라고 한다. 푸라나는 사람의 빈부귀천, 선악부정 등 인간행위는 숙명적으로 결정되었다고 주장한다. 숙명론은 받아들이기가 쉽다. 잘못하면 숙명론에 빠지게 되는 데 절대로 거기에 빠져서는 안 된다. 숙명론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푸라나며 그것을 따르는 무리가 숙명외도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빈부귀천이 정해져 몸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육사외도들- 니간타
니간타는 지금도 인도에서 존재하고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이다. 부처님 당시에 두 개의 종교가 탄생한다. 아직도 인도사회에서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칸타는 물질과 정신이 능동적으로 활동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불교의 인과와 유사한 부분도 많다. 니칸타는 인간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물질과 정신이 능동적으로 활동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정도 연기에 접근해가고 있는 이론이 나칸타의 주장이다. 니칸타를 따르는 무리를 ‘나형외도’라고 한다. 

나형외도들은 태초부터 정신과 물질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대립하고 사람이 잘 살고 못사는 것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당시 부처님처럼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니간타다. 니간타가 주장하는 것은 사람이 잘 살고 못사는 것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도 바로 부분적인 인과를 주장한다.

니간타는 나름대로 존재의 본질에 대해 깨쳐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인도에는 지금도 종교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이 지구상에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인간이 나름대로 집단을 이루어서 삶의 목표를 제시하는데 종교만큼 분명한 것이 없다. 분명한 그 목표가 부딪치니까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지구상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은 유일한 종교는 불교이다. 그 당시 부처님처럼 니간타도 깨친 성자로서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룬 후 승단이 구성된 이후 니간타는 불교를 비난했다. 표적의 대상인 불교를 무너뜨리고 조로아스터교의 천국을 만들려고 했다.

육사외도들-산자야
산자야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뛰어난 사상가들이 많았다. 실질적으로 능력 있는 사람들을 제일 많이 거느린 사람으로 약 200명이나 된다. 산자야의 제자 중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가장 뛰어난 제자 사라불과 목련존자가 있었다. 하루는 부처님의 제자인 마성이 길을 가는데 마성의 거룩한 모습에 사라불과 목련이 반해 버린다. 그리고 마성에게 묻습니다. “너를 가르친 스승이 누구냐, 너의 스승은 무엇을 가르치느냐” 하고 묻자 마성이 말하기를 나의 스승은 부처님이고 연기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그 연기를 사라불과 목련에게 설명을 해 준다.

사리불과 목련은 그 자리에서 연기를 인식하고 터득한다. 그리고 사리불과 목련이 “우리는 산자야를 스승으로 모실 수 없다고 하면서 더 뛰어난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부처님에게 귀의했다.

산자야의 200명의 제자들을 모아놓고 산자야를 따르는 무리는 여기에 남고, 나와 같이 부처님의 제자가 될 사람은 나를 따르라고 하니 200명의 제자들이 모두 사리불과 목련을 따라 부처님에게로 갔다. 갑자기 부처님의 제자가 인도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1250명의 집단이 된다.

개인으로 최초의 출가자는 야사이다. 뛰어난 청년인 야사가 출가함으로써 인도사회의 가장 부유층이자 지식인층을 이루었던 50명의 청년들이 야사와 더불어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 가섭 삼형제 1000명, 산자야 200명 합하여 집단으로 출가한 제자들이 1250명이 된다. 이렇게 부처님의 제자들이 엄청나게 불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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