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화계사

화계사의 개화승 차홍식

서울의 많은 사찰 가운데 일찍부터 세계화에 눈뜬 곳이 있다. 그곳이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이다. 이곳 역시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다. 창건과 중창 때 왕실의 도움이 컸다. 근대에 들어서 1880년 11월 完和君 李獻公의 명복을 빌기 위해 상궁 千氏 등이 화계사에 佛糧을 시주하는가 하면, 대왕대비 趙氏는 翼宗과 憲宗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화계사 명부전에 불량토를 헌납하였다. 대비는 이후 1883년 12월 관음전에 佛糧을 시주하는 관심이 많았다. 이런 왕실과의 인연은 1866년 불전과 승방 건물들을 중수할 때 흥선대원군이 크게 시주하여 원찰로 삼을 정도였다.

숭산 스님의 세계화 원력
한국으로 세계 수행자 불러들여
한국불교 알리는 기회, 다시 삼아야

이런 화계사에 개화승 차홍식이 있었다. 그는 18세의 어린 나이로 개화파에 가입하여 갑신정변에 참여하였다. 그가 개화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신분차별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을 비롯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홍영식 등은 왕실의 부마에서 자신들은 물론 선대 모두 벼슬을 하던 양반이었다. 그런 기득권층이 동지를 규합하는데 양반은 물론 중인 계급 심지어 자신들의 하인들도 참여시켰다.

그들은 경학을 배워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지만 불교에 심취하였다. 향후 불교의 평등사상이 부패에 빠진 조선을 구하는 희망으로 보았다. 그래서 불교를 배우는데 열심이었고, 개화파에 승려를 참여시켰다.

도성 내 많은 이목에서 벗어나 동지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은 사찰이 제격이었다. 그곳이 서쪽으로는 봉원사요 동으로는 화계사였다. 봉원사에 이동인이 있었다면 화계사에는 車弘植이 있었다. 그는 1882년 김옥균이 화계사에서 10일 정도 묶었을 때 그의 권유로 개화파에 가입하였다. 그 후 김옥균 집에 머물고 있다가 동남개척사로 일본에 갈 때 취반작찬(炊飯作饌)의 임무를 띠고 수행하여 일본에 갔다 왔다.

차홍식이 개화파에 가입하면서 김옥균은 화계사에서 개화파 인사와 해외 인사들이 만나는 곳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대를 살았던 윤치호의 영문 일기를 보면,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전인 1884년 가을 김옥균은 그의 동료인 서광범, 홍영식과 함께 천문학자로 조선을 여행하며 여러 여행기를 저술하여 미국에 우리나라를 알렸던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과 당시 주미공사관인 스쿠더(Scudder)를 화계사에서 만나 식사를 대접하며 해외정세를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게 화계사를 개화파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도운 차홍식은 거사 직전에는 서재필의 집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당일인 1884년 12월 4일 밤 국왕이 景祐宮으로 옮기자 다른 행동대원들과 함께 正殿 밖에서 보초를 섰다. 거사가 실패로 끝나면서 체포된 후에는 지정불고죄(知情不告罪)가 적용되었다.

화계사에서 김옥균과 탁정식의 만남

근대 이곳에 머물며 개화의식에 투철했던 수행자가 無不이다. 본명이 卓挺埴으로 아버지가 참판을 지낸 양반가의 자제였으나 벼슬길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나라가 국운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면서 佛門에 들어왔다. 백담사에서 출가하여 강사를 지냈지만 일찍부터 개화된 문물을 알고자 화계사로 왔다. 이곳에서 운명적으로 개화파 김옥균을 만나 활동하게 되었다.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을 배우는 것으로 양이 차지 않았던 그는 넓은 세계를 알기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첫 번째 일본에 간 것은 같은 승려이면서 개화파였던 이동인이 일본의 변모된 사회와 국제정세를 파악할 때 그를 돕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일본행도 이동인이 韓美修好條約의 체결을 알선하기 위해 청국공사 何如璋을 만나러 갈 때 동행하였다. 1880년 11월 5일 원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임무를 마쳤지만 귀국하지 않고 神戶에서 영국 영사의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동경으로 옮겨서는 영국 공사에게 우리나라 말을 가르쳐 주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문물과 정세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였다.

세 번째는 신사유람단 13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을 마치고 동경에 머물며 동경 외국어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일본은 물론 당시 일본에 거주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사절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을 통해 세계정세에 대한 흐름과 안목을 배웠다. 1882년 4월 김옥균이 일본에 오자 일본의 실정을 들려주었다. 임오군란으로 김옥균이 귀국하면서 울릉도 목재운반을 부탁하자 배를 구입해 神戶港에 왔으나 급병으로 1884년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가 병으로 일본에서 사망하자 당시 일본 재야인으로 명성을 가지고 있던 福澤諭吉은 그가 항상 개화의 길에 관심이 많았으며, 국정에 밝아 한국의 사절이 왔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평하였다.

무불은 한국의 현실을 아직도 문명의 개화가 일어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서양의 문물이 한국에 전해져 야만적 상태를 벗어나려면 서양의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언어의 습득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이 급병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던 몇 안 되는 불교인 가운데 하나였다.

화계사의 국제선원과 숭산

여느 사찰처럼 제법 역사성을 간직한 화계사이지만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국제선원이 있어 눈 푸른 납자들이 수행하는 것이다. 이곳은 1991년 개원한 이래 세계 각국에서 구도자들이 한국불교를 배우기 위해 몰려오고 있다. 한국의 선을 체험하려는 수행자에게 문을 활짝 열어 놓았지만 수행과정은 녹녹하지 않다. 엄격한 선방규율에 의거하여 하안거 및 동안거를 지내야 한다. 한국불교를 알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을 위해서는 매주 일요일 영어 참선법회 법문이나 템플스테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서 수행한 외국인 승려 가운데 한국사찰의 조실과 주지를 맡아 한국인의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진정한 한국불교의 세계화라 말할 수 있다.

화계사가 진정 한국불교 세계화의 산실이 된 것은 숭산 행원에 이르러서이다. 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출생한 그는 1947년 10월 마곡사에서 출가하였다. 1949년 1월 25일 고봉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고 숭산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1958년 화계사 주지가 된 이래 불교정화운동 참여, 대한불교 신문사 초대사장, 총무원 총무부장, 그리고 동국학원 이사 등 교계 안팎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가 1966년 일본에 홍법원을 개원한 이후 한국불교 세계화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그 시작은 작은 데서 비롯되었다. 종단 소임을 맡아 중구 초동 동국대 기숙사를 허물고 새집을 지으려 할 때 지하실에서 4천여구의 일본군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곳이 일본 서본원사의 별원이었던 까닭에 전몰장병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것이다. 화계사로 옮겨다 놓은 유골이 일본으로 반환되고, 이 일을 계기로 일본에 건너간 숭산은 재일교포들이 일본 불교를 믿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여기에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약속이 있어 일본포교를 결심하였다. 정부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힘들었지만 일본인 신도와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동경에 홍법원을 개원할 수 있었다. 이곳은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의 거점이 되었으며, 일본에 유학한 한국학생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이곳이 번창하자 숭산을 초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 인연은 그로 하여금 다른 나라로 가게 하는 인연을 만들었다. 그것이 1968년부터 절을 짓기 시작해 2년 뒤에 개원한 홍콩 홍법원이다.

숭산의 한국불교 세계화는 미국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홍콩 홍법원이 마무리되자 미국포교를 제안 받았다. 1972년 봄 초청장과 비행기 표를 받은 숭산은 잠시 머물 생각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의 문화는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미국의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미국에 도착해 조그만 아파트를 얻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참선을 지도하였다. 영어를 하지 못한 선사는 통역을 통해 선을 설명하였다. 그러는 사이 참선을 배우러 찾아오는 신자가 늘어 아파트를 옮겼다. 공간이 넓어지고 미국인들에게 불교를 잘 전달하는 통역자가 생기면서 아파트가 메어지도록 사람들이 몰려왔다.

좋은 일이 많아지면 싫거나 어려운 일도 많아지는 법이다. 미국은 한국의 신앙풍토와 달라 시주하는 신도가 없었다. 당연히 재정은 어렵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숭산 자신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세탁소에 나가 돈을 벌었다. 미국인 신도들도 낮에 일하고 저녁에 참선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참선하고 일터로 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참선을 지도하고, 금요일 밤에 정기법회를 하면서 1972년 9월 뉴욕에 홍법원을 세웠다.

미국에 한국불교를 알린 숭산의 발길이 향한 곳은 유럽이었다. 폴란드, 영국, 스페인, 독일, 프랑스 등 수많은 곳에 도량을 건설하고 한국불교를 알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브라질 등 남미까지 전 세계 32개국 120여개의 홍법원을 개설하고 5만여 벽안의 납자와 제자들을 두었다. 가히 세계를 포교한 분이라 할 수 있다.

1991년부터 화계사에 국제선원을 두고 한국으로 세계의 수행자를 불러들였다. 숭산이 이처럼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것은 만공으로부터 전해진 世界一花의 서원 때문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해외에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수행의 올곧음이 살아있고, 오랜 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불교문화의 우수함이 해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호평은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동양문화라고 낮게 보는 편견 속에서 한국불교를 알려온 결과이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신장한 국력이 보태지면서 이젠 세계인이 우리의 불교를 배우러 오고 있다.

훌륭한 결과는 쓰라린 아픔을 담고 있는 법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것을 자신의 숙명처럼 처음 걸어가 희생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세계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불교를 배우러 오고, 한국의 불교문화를 보고 찬탄할 것이다. 그런 준비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토대를 만든 선구자에 대한 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진 : 개화된 문물이 빠르게 들어온 화계사는 숭산 스님 이후 한국불교 세계화의 거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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