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 논란 어떻게 봐야 하나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신미 대사를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으로 묘사한 것이 문제가 돼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세종 찬제와 협력설은 꾸준히 이견이 제시됐던 문제이며, 범어기원설의 경우 그 뿌리가 15세기로 올라간다.

영화 <나랏말싸미>와 관련한 논란이 뜨겁다. 개봉 직후 <나랏말싸미>는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됐고, 논란으로 이어지며 곧바로 흥행에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조철현 감독은 직접 발표한 입장문을 통해 역사 속에 감춰져 있던 신미라는 인물을 발굴해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으로 조명하려고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다. 백성을 위해 처절하게 고민했던 세종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리고자 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해외 판권 수출 등을 금지해달라는 청와대 청원과 한글문화연대 성명 발표 등 역사왜곡 논란은 이어지고 있다.

1443년 세종 친제 밝힌 후
실록서 신미 등장이 정설
왕사 예우·병환 시 법회 등
세종 각별한 총애도 사실

세종 단독VS협력 논쟁 꾸준
범어기원설한글 창제에
불교 학승 참여 유력 증거
정광 신미, 모음11자 제정

1443년 창제와 세종 친제
이번 <나랏말싸미> 역사 왜곡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25(1443) 1230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창제했는데 옛 글자를 모방했으며, ··종성으로 나눠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고 기록됐다.

이후 실록에서 신미 대사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이로부터 3년 후인 1446년이다. <문종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즉위 직후 신하들에게 선왕이 훈민정음이 반포되던 1446년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었다고 나와 있다. 실제 <세종실록>에도 14465월에 돼서야 신미 스님의 법명이 처음 나타난다. , 정사(正史) 기록인 왕조실록에서는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는 직접적 기록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김무봉 동국대 국문과 교수는 역사적 기록을 놓고 보면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 창제에 직접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다만 훈민정음 반포 직후 유교경전이 아닌 불경 언해가 바로 이뤄졌다. 이를 주도한 신미 스님을 비롯한 학승들이 훈민정음의 보급과 정착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단독인가 -세종인가
이 같은 논란은 훈민정음 창제설이 단독협력으로 나뉘기에 비롯된다. 정사에 기록된 친제는 세종 친제론에 가장 핵심적 근거이고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하지만, 협력설의 역사도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그 뿌리가 깊다. 실제 조선시대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해 언문을 만들었고, 이는 범자(梵字)’를 본받았다고 밝힌다. 음소문자의 원리와 계보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던 김만중 역시 <서포만필>에서 범어는 초··종성으로 합해 글자를 이루니 생성이 무궁하다. 우리나라도 이로 말미암아 언문을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현대에서도 협력설은 범어기원설을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된다. 대표적인 학자가 정광 고려대 국문과 명예교수다. 그는 한글 창제를 세종 단독이 아닌 세종의 형제·자녀들과 불가의 학승이 이뤄낸 위대한 발명으로 본다.

특히 불교에서 전해 오는 유구한 역사의 음성학이 한글 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정광 교수는 주목했다. 실제 그는 2015년에 발간한 연구서 <한글의 발명>에서 고대 인도 음성학인 비가라론이 불경을 통해 동아시아에 유입되면서 서장·거란·파스파 문자 제정으로 이어졌고, 이 문자들은 한글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동아시아 표음문자의 정수인 한글 창제에는 범어와 음성학에 능통한 학승들이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광 교수는 올해 증보한 저서 <훈민정음의 사람들>에서 세종25(1443) 12월 제정된 최초 언문은 27자로 중성 11자가 없었다. 모두 자음으로 이를 반절 혹은 언문 27자로 불렸다면서 그러다가 신미가 훈민정음 제정에 참여해 반절하자(反切下字)의 운을 중성과 종성으로 나누고 모음에 해당하는 중성 글자 11자를 따로 제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신미를 주목하는 이유
신미 스님을 역사 뒤편에서 전면으로 부각시킨 박해진·정찬주 작가 등은 훈민정음 제정·보급에 있어서 당대 학승 신미와 불교의 역할을 부정해선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신미 스님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쓴 정찬주 작가는 논란 직후 본지에 발표한 기고문을 통해 왕사제도가 사라진 시대에 세종은 신미 스님을 왕사로 예우하고 정음청 학사로 제수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병환 중일 때 놀랍게도 스님이 침전에 들어 법문했다는 기록도 있다면서 영화 <나랏말싸미>가 그동안 한글 창제에 대한 상식을 벗어나 있어 논란은 당연하다. 다만, 역사적 진실은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훈민정음의 길-혜각존자 신미 평전>의 저자 박해진 작가는 본지와의 인터뷰서 훈민정음은 세종이 총괄 기획·편집을 맡고 신미는 전문편집인으로서 성음과 문자학의 핵심을 정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해진 작가는 신미가 세종으로부터 받은 두터운 대우를 정황적 근거로 제시했다. 실제 신미스님의 동생 김수온의 문집 <식우집> ‘복천사기에는 세종이 신미의 이름을 듣고 불러 담소를 나눴다는 기록이 있으며,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 국상과 전경불사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신미였다.

신미에 대한 세종의 애정은 스님에 내린 승직과 법호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세종은 신미를 판선교종(判禪敎宗)에 임명하고 승직과 법호를 내리려 했으나 신미가 병이 있어 내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세종은 1450217일 승하했다. 이후 문종은 선왕의 국상을 끝내고 신미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禪敎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碍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특히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우국이세라는 칭호는 공적이 분명한 대신과 장상에게 주는 것이어서 더욱 특별했다.

박해진 작가는 “‘정사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완전하게 구성한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 “<세종실록>의 편수관이었던 정인지는 훈민정음과 관련 기록을 편집하고 해례의 서문을 <세종실록>서 의도적으로 왜곡했다. 결과적으로 역사에는 훈민정음 해례를 편찬할 때 참여했던 집현전 8학사만 남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신미는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핵심 협찬자이고, 훈민정음 해례의 간행과 이후 편찬된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 등을 통해 훈민정음 보급에 앞장섰던 선지식이라며 “<월인석보> 협주에 기록된 신미 스님을 비롯해 수미·설준·홍준·효윤·지해·해초·사지·학열·학조 등 당대 10학승과 신미의 동생 김수온의 역할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곡 논란 이후를 준비하자
현재 제기되는 논란의 문제점은 단순 창제설의 이견을 넘어 훈민정음서 불교 역할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감정적 대응보다는 신미 스님의 역할론과 훈민정음 창제에서 불교의 영향을 체계적 연구를 통해 규명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고영섭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는 몇몇 기록과 구전을 통해 오던 신미를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과 영화를 통해 현재로 소환했다. 이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전문 연구자의 몫이라며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세종과 신미의 뜻을 올바로 기리기 위해서는 불교학자와 국문학자의 협동 연구들이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한국불교사연구소에서도 관련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영화에 많은 자문을 했던 안동 광흥사 주지 범종 스님(조계종 호법국장)영화 <나랏말싸미>는 충분히 역사적 고증과 근거를 통해 만들어졌다. 현재 왜곡 논란이 답답하기만 하다면서 이번 논란을 통해 불교계와 학계가 관련 연구를 추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창제 직후 발간된 <월인석보> <석보상절> 등 불경 언해본들에 대한 번역도 이뤄졌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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