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설봉고간 평창 3

[評唱 3]

只如 雪竇道 “如斯話會 深屈古人” 且道 是屈 是不屈. 懷和?道 “作?生會不答話底道理. 讚歎趙州?不無 還知趙州一片玉瑕生?. 若點檢得出 相如不?於秦王” 雪竇分明拈了也. 而今人却不去見趙州雪峯 却走去咬雪竇語句 去語脈上走 不知他雪竇一手擡 一手?. 且道 阿誰是斬釘截鐵本分宗師. 阿誰是就下平高難?作者. 到這老直饒辨得去 也只是語脈上走

설두가 말했다.

“(대중이 모두 말하기를 ‘설봉은 이 스님의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조주가 긍정하지 않은 것이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말은 고인을 몹시 억울하게 하는 것이다.”

자, 말해보라! 억울하게 한 것인가, 억울하게 하지 않은 것인가?

회 화상(懷和, 천의의회)이 말했다.

“(설봉이) ‘대답하지 않겠다’고 한 도리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 조주를 찬탄한 것인 즉 없지는 않으나, 조주에게 한 조각 옥의 티가 생긴 것을 알겠는가? 만약 이를 점검해낸다면 상여(相如, 인상여)가 진왕(秦王)을 속이지 못했을 것이다.”

설두는 분명하게 염(拈)을 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도리어 조주와 설봉이 만난 곳엔 가지 않고, 설두에게 달려가서 설두의 어구(語句)나 씹고 어맥(語脈)에만 치달리니, 저 설두가 한 손으로는 들어 올리고 한 손으로는 내리누른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 말해보라! 못을 끊고 쇠를 자르는(斬釘截鐵) 본분종사(本分宗師)가 누구인가? 누가 낮은 곳을 취하여 높은 곳을 고르기에 작자가 되기 어려운 사람인가? 이 늙은이에게 와서 설사 분명하게 가려낸다하더라도 역시 다만 어맥에서 치달리는 것일 뿐이다.

천의의회(天衣義懷, 993~1064): 송대(宋代)의 스님. 운문종. 30세에 출가하여 법화지언(法華志言)에게 참학하고, 또 금란 선(金?善)과 섭현귀성(葉縣歸省)에게 참학한 후, 취봉사(翠峰寺) 설두중현(雪竇重顯)에게 참학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음.

사기(史記)의 상여전(相如傳)을 참조하기 바란다.

선문염송집 고칙 785에서는 본 설봉고간화(雪峯古澗話)에 대한 원오의 송(頌)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趙州象骨띀 조주와 상골암(설봉)!

擧世無倫擬 온 세상에 견줄 사람 없네.

共撫沒絃琴 줄 없는 거문고(沒絃琴)를 함께 타고

千載淸人耳 천 년이나 사람들의 귀를 맑게 하네.

古澗寒泉 옛 골짜기의 찬 샘물

될目疑然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봐도 의심스럽고,

不從口入 입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飮者忘筌 마시는 자는 통발을 잊어버리네.

重出語苦又死 거듭 말을 해서 쓰다 하고 죽는다 하지만

不答話同彼此 답하지 않은 것은 서로 같으니

相逢兩會家 두 대가(兩會家)가 서로 만나

打鼓弄琵琶 북 치고 비파를 뜯네.

몸中誰是的 이 중에 누가 분명한가?

白馬入蘆花 백마가 갈대꽃 속으로 들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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