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해의 길 7

초등학교 시절 각 교실에는 급훈이 담긴 하얀 액자가 걸려있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급훈으로 많이 등장한 단어는 근면이나 성실, 정직과 같은 가치였다.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담긴 단어들이다. 어찌 보면 경제성장을 중요하게 여겼던 70년대 산업사회에 꽤나 잘 어울리는 덕목이다.

그런데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가치들도 사유(思惟)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누군가를 해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이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전범 재판이 열렸는데, 그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강변했다.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세기의 재판에 미국 잡지인 <뉴요커>의 요청으로 재판을 취재한 여성이 있었다. 바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유명한 말을 탄생시킨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다. 그녀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독일에서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다. 그녀는 천인공노할 아이히만의 악행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기 위해 그를 집중 취재했다. 그리고 내놓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였다.”

아렌트의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녀는 이러한 무사유가 인류의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예루살렘에서 배운 교훈이라고 했다. 그녀에게 비친 아이히만은 성실하고 정직한 관료였다. 그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대인을 좋아하는 친절하고 정직한 이웃집 아저씨와 같았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아픔과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렌트의 판단이다.

그녀는 사유를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즉, 자신의 행동이 세계에 끼칠 영향과 의미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사유가 결여된 근면이나 성실, 정직과 같은 가치들이 엄청난 악행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행동을 하게 되면 악은 언제든지 평범하게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아렌트가 우리에게 전한 메시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나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생각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은 서로 깊은 관계 속에서 연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어 엄청난 사건으로 번지기도 하고, 반대로 작은 선행이 상대에게 위로나 용기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사유는 책임이라는 아렌트의 통찰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큰 틀에서 보면 아렌트의 철학과 불교의 연기적 사유는 서로 통하고 있다. 인간과 세계를 독립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불교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메시지는 나와 세계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실상을 깨쳐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동체자비(同體慈悲)를 강조하는 것도 이것을 깨쳤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연기의 진리에서 사유의 의미와 책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곧 문제의식을 갖고 오늘에 맞게 불교를 해석하는 일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말한다면 아이히만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안에도 꽤 많은 아이히만이 잠자고 있지 않을까? 스스로 성찰해 볼 일이다. 연기의 진리는 잠들어있는 우리의 삶(生)을 일깨우는(覺) 혁명적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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