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 스님의 선문답 이야기 ①

‘무문관’ 안으로 들어가 치열한 수행을 하는 것은 ‘문없는 문’을 열고 대자유를 누리기 위함이다. 사진은 지원 스님이 2018년 동안거를 보낸 백담사 ‘무금선원 무문관’전경.

 

선문답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려는 노력에서 출현한 치열한 선수행의 결과물이다. 그 누구의 문답도 아닌 바로 자신이 일상서 제기하고 점검하며 해답을 추구할 마음공부의 방편인 것이다. 조계종 포교원장을 지낸 지원 스님은 지난 겨울 백담사 무문관 수행을 통해서 선문답(禪問答)을 사유(思惟)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올 여름 다시 시작한 하안거 무문관 수행이 끝나면, 9월~10월경에 일반 대중들이 깨달음의 세계를 쉬운 강론을 통해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선 법회’도 마련할 예정이다. 이에 지원 스님은 무문관서 고찰하고 사유한 나름대로의 ‘선문답’ 개념과 특징 등을 원고로 정리했다. 본지는 4회에 걸쳐 이를 지상 연재한다.<편집자주>

선문답, 선에 생명 불어넣는 문화현상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일어나는 禪 행위
선사들, 문답 통해 禪 도리 깊이 이해
선문답의 대표적인 특징은 ‘간명직절’

선문답이란 무엇인가?

수영이나 골프를 하는 사람이 훌륭한 코치의 레슨을 받으면 실력이 향상되듯, 대선지식의 지도아래 실참(實參)하게 되면 누구나 단박에 깨달을 수 있다고 믿는다. 선문답 하나마다에는 문답을 몸소 체험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진지한 구도 정신이 녹아 있다. 부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최초 행위예술(performance)인 염화미소를 보이시면서,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을 가섭에게 전하셨다.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고도 하는 ‘염화미소’는 선종서 선(禪)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전하는대표적 이야기로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기록돼 있다.

뜻을 풀이하면 정법안장(正法眼藏)은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이며, 열반묘심(涅槃妙心)은 번뇌와 미망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을, 실상무상(實相無相)은 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은 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의미이다. 즉 굳이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으로, 선수행의 근거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화두이다.

“이 세상은 마음 꽃으로 장엄된 세상임을 오직 가섭만이 알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꽃을 들어 보이신 세존의 자비롭고 섬세한 가르침이 담겨 있고, 그것을 자신의 마음과 몸을 바쳐서 이해하려는 가섭의 진지한 구도심이 드러나 있다. 이것이야말로 세존과 가섭 사이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이심전심의 교감이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는 선문답(禪問答) 이기도 하다.

선이란 본래 인도의 말로서 구체적으로는 선나(禪那)였다. 중국서 번역해 사유수(思惟修) 또는 정려(靜慮)라고도 한다. 모두 선정을 통해 드러나는 지혜라는 의미로서 정혜(定慧)를 통칭한 말이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어떤 모습으로든지 모든 의미가 선에서 가능하고 또한 그것을 선이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만이 아니라 산천초목도 모두 수행과 깨침의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선문답은 선사들이 제자나 학인들을 깨닫게 하는 언행이었다. 선사들의 언행에는 말과 고함치기 그리고 몽둥이질까지도 포함한다. 그 언행 자체에 깊은 진리와 지혜가 응축돼 있어 말끝에 단박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긴 여운을 남기는 깨달음의 씨앗이 되었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선문답이 깨달음 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긴다.

선문답은 선에서 활용하는 문답이라는 정도의 뜻이지만, 선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선문답을 통해 선을 체험하게 된다. 선문답은 선을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유지시키고 선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선문답을 통하여 스승과 제자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또 선문답을 통해 선이 그 지평을 넓히고 저변을 탄탄하게 해 왔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선문답은 형식적으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일어나는 행위로서 스승이 제자를 대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문답의 내용은 스승이 제자에게 내려주는 가르침으로, 스승의 깨침의 경지를 문답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가 수행과 깨침에 대한 의문과 함께 자신의 공부를 드러내 보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선문답의 경우 대부분은 제자가 스승에게 자기의 물음을 제기하고 그에 대해 스승의 답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많다.

선에 대한 문답은 하나의 기록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선의 내용이다. 때문에 예로부터 많은 선사들이 선문답을 통해 선의 도리를 깊이 이해하고 선문답을 만들어 냈고, 그것으로 선의 역할과 효용을 삼아 전승하기도 하였다. 이런 것들을 널리 수집해 모아놓은 것이 전등사서(傳燈史書)나 공안집(公案集)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해 일종의 지도법의 기준 내지 깨침의 통과의례처럼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선문답은 철저하게 스승과 제자 사이의 내용이기 때문에 밖에서 그 누구도 엿볼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선문답을 이해하려 한다든가 흉내를 내려는 것은 금기시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선문답에 대해 제 3자의 입장에서는 해석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 전수하는 방식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런가 하면 선문답 본래의 의도와 가치에 대해 내용을 그대로 두고서 거기에다 제 3자의 입장서 일종의 해설이라 할 수 있는 평창(評唱)과 짤막한 주석이라 할 수 있는 착어(著語)를 붙여 유통시키기도 했다. 이것은 이전의 선문답이 지니고 있는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면서 선문화의 다양한 표출이기도 하다.

선문답은 선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선문답은 선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기도 하다. 선문답을 통해 스승이 제자가 지닌 자성을 개발시켜 본래의 자신을 깨치게 하여 궁극에는 깨침의 경지로 이끌어주려는 교육방법이다.

스승이 제자를 받아들여 어느 경지로 이끌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행위 즉 가르침이 필요하다. 아무리 방임주의적인 방식을 취한다 해도 그것은 곧 하나의 의도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스승이든 제자이건 간에 당사자가 선문답을 활용하기만 하면 그것은 교육으로 충분하다. 모든 교육은 선에서 자성이라는 입장을 기반으로 삼아야 비로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자의 행위와 자성 속에 이미 스승이 기대하고 있는 완전에 가까운 요소가 깃들어 있다. 스승은 그것을 겉으로 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선문답이라는 행위이자 교육이다.

선에서는 오직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스승과 제자가 직접 가르침을 주고받아 왔다. 이렇게 대대적적(代代嫡嫡) 해온 조사들은 모두 제자는 스승을 뵙고 스승은 제자를 만나 면수(面授)해 왔다. 이처럼 선문답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상호 인간교섭에 의해서만 인간형성의 진실이 유지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전화나 인터넷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과는 다르다. 깨침이란 단순히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자신의 눈앞에서 살아서 숨을 쉬는 절체절명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제자를 일깨워주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제자인 당사자가 깨치지 않으면 안되는 살아있는 공부법이다.

또한 선문답은 기존방식의 답습을 초월하는 성격을 띤다. 같은 사람이 같은 선문답을 거양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별개의 선문답이다. 왜냐하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에 대하여 그 누가 인용한다고 해도 답변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같은 답이 나온다하더라도 벌써 그 선문답은 상황이 달라져 있어 전혀 다른 선문답이 되어버리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이다. 이것이 선문답이 지닌 또 하나의 매력이면서 특징이다. 선문답은 그 형식 그대로 영원하지만 그대로 부단히 새로운 맛을 뿜어낸다. 이전에 제기된 선배들의 문답이 아니라 지금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거량이다.

선문답의 특징은?

선문답의 특징으로 몇 가지를 들 수가 있다. 첫째는 간명직절하다는 것이다. 선문답은 주로 두 사람 아니면 단지 몇 사람만의 문답으로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문답의 형식이 참으로 단순한 형식을 취한다. 이런저런 상황설정을 배제하고 꼭 필요한 몇 마디가 골격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조주가 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

스님이 말했다.

“와본 적이 없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

또 다른 스님에게 물었다.

“일찍이 여기에 와본 적이 있는가.”

스님이 말했다.

“예, 와본 적이 있습니다.”

조주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

선문답이라고 해서, 그 질문과 답변이 반드시 언설을 통해 드러나는 문답일 필요는 없다. 임제선사의 할(臨濟喝)이나 덕산 선사의 방(德山棒)처럼 때로는 고함치기나 몽둥이질 등 제스처를 통해서 나타낸다. 그 자리에 참여해 직접 그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선문답은 무슨 뚱딴지 같다느니 수수께끼 같다느니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느니 등등을 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선문답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의 상황을 통해서 가장 명확하게 등장하는 일종의 살아있는 설법이고 설법의 형상화이다. 선문답이라는 행위를 통해 설법은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선문답은 설법을 통해서 나타나지만, 설법의 형식을 초월한 살아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언어가 된다. 그래서 선문답은 직설적이고 명확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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