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으로 읽는 선어록(상, 하)

이은윤 지음/각권 22,500원/민족사 펴냄

노장(老莊)사상과 선(禪)불교는 서로 통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책은 거의 없다. 이런점에서 이은윤 前 중앙일보 종교전문 대기자〈오른쪽 사진〉가 〈노장으로 읽는 선어록〉(상·하)을 펴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 책은 한국불교 선학연구원장도 역임한 저자의 역작으로, 중국선이 노장의 사상과 어떻게 통하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자세히 탐구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은 오랜 종교담장 대기자의 선과 노장사상에 대한 안목이 두드러진다.

선가, 개인의 번뇌 해탈에 중점
노장, 만물과 하나되는 길 제시
두사상 공통점 ‘삶의 실존 통찰’
<노장>, 道를 정치철학화 시켜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은 본격적인 학문적 천착이 아니라 선어록을 〈노자〉 〈장자〉와 함께 읽은 독후감 같은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저자의 이 말은 단지 지극한 겸사(謙辭)에 불과하다는 것을 책 몇 쪽만 읽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노장과 불교는 무엇이 같고 다를까? 저자는 책 속에서 “양쪽 다 근본적인 도(道)를 깨달은 수준에서는 사실상 같지만, 노장이 그 도를 표면적으로 정치 철학화시킨 점은 선사상과의 현격한 차이점이다. 노자·장자가 설법의 우선 대상으로 삼는 자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선가의 도가 번뇌를 벗어나는 길을 제시, 자기 해탈에 중점을 두는 데 비해 노장의 도는 만물과 하나 되는 길을 제시해 ‘우주 해방’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노장의 ‘무위’는 질서의 부정이나 해체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질서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어렵고 모호하게만 느껴지는 노장과 선의 세계가 아주 쉽게 다가오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막연한 깨달음의 세계, 감히 일반인들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멀게 느껴지던 선의 세계가 노장과 연결해 읽을 때 아주 분명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저자는 “노장(老莊)은 저 멀리 설정해 놓은 이상을 향하지 말고 가까이서 접촉하는 자연적·일상적 직접성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이 같은 설법 속에는 본체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차이와 다양성, 즉 ‘현상계의 삼라만상’을 체용일여(體用一如)의 세계관으로 인정하고 수용하자는 깊은 철학이 들어 있다. 선사상도 같은 입장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푸른 대나무’와 ‘계곡물 소리’가 부처의 법신이고 설법이 되는 도리도 바로 이것이다. 선가(禪家)의 현성공안(現成公案)은 공(空)과 색(色), 유(有)와 무(無) 양쪽 둘 다를 초월한 절대긍정의 존재론으로 두두물물의 실존을 기꺼이 수용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노장과 선불교가 서로 통하는 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러한 삶의 실존적 통찰이다. 도와 불법 진리는 어디에나 다 흩어져 있다. 선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공안들, ‘뜰 앞의 잣나무’ ‘간시궐(똥 젓는 마른 막대기)’에서 엿볼 수 있듯 삼라만상 두두물물, 심지어 오줌·똥 속에도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 선과 노장의 공통된 진리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노장과 선불교는 절대 평등, 절대 긍정을 설파함으로써 권력에서 소외된 민중들을 위로하고, 삶의 희망을 갖게 한다. 명예, 부귀영화 같은 뜬구름 같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의 진정한 행복, 대자유를 보여 준다.

저자가 밝힌 선과 노장의 유사점을 정리해 보면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선사상과 노장사상의 도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선과 노장은 결코 세속을 떠나거나 버리지 않는다. 노장사상은 중국 고대 사상이 모두 그렇듯이 세속을 떠난 세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선도 그렇다. 도가 이루어지는 영역도 시간(天)과 공간(地) 안의 세계이고 그것을 체득한 성인·대종사로 신이 아닌 신적인 인간일 뿐이다.

둘째, 분별심을 금기시한다. 선림의 사유에서는 ‘분별심을 버리라’는 한마디로 수행 해탈의 관문을 제시한다. 세속의 시비 분쟁, 모든 번뇌가 만사를 대립적으로 분별해 선-악·귀-천의 한쪽만을 일방적으로 간택한 데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장도 이 같은 사유에 철저하다.

셋째, 존재론의 인식 사유체계가 동일한 점이다. 노장은 관계와 변화, 선은 연기론과 제행무상이 존재론의 기본 인식 사유인데 단어가 다를 뿐 그 내용은 거의 동일하다. 선불교의 세계관은 만물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전제로 한 입체론적 세계관, 즉 일체는 다양한 관계를 기초로 성립된 유의 존재다. 불교는 모든 사물이 자성이 없이 연기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아 가유이지만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면서 상호 작용하기 때문에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 같은 존재 인식은 노장과 전적으로 같은 맥락이다.

선에서는 극과 극이 하나이며 사물이 사물이면서 사물이 아님을 아는 것이 깨달음의 본질이며 해탈로 가는 길이다. 〈노자 58장〉은 “복 속에 화가 깃들어 있고 화 속에 복이 숨어 있다”는 설법으로 양극이 하나임을 일깨운다.

넷째는 낙관주의다. 장자는 도(자연)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체험을 적극 추구하면서 광활한 우주와 함께 하는 데로 나아가고자 했다. 그는 생사의 구별을 꿰뚫어보고, 영욕의 득실을 잊으며, 초연히 스스로 즐거워하고 한가하게 마음대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같은 낙관주의는 사람들에게 신기하고 차분하며 즐겁고 자유분방한 일종의 미적 감정을 제공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 속의 모순 투쟁을 잊고 정신상의 쾌락을 얻어 향유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것이야말로 장자 철학이 끼친 큰 영향이며 많은 찬사를 받게 된 중요 원인의 하나다. 선수행의 내용과 목표도 이와 같은 맥락의 정신적 자유와 무소유의 쾌락을 향유하고자 한다. 운문 선사의 화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이다)’이 바로 이런 낙관주의를 대표한다. 견성한 사람은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 결코 세상을 혐오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선자(禪者)는 시끄러움 속에서 정적을 즐기고 고요 속에서 움직임을 보는 지혜로 날마다를 소중하게 살아간다. 수행자가 지향하는 세외지심(世外之心) 또한 이 세상 속의 삶에 있는 것이며 지구 밖이나 바다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은 ‘무심이 곧 도’라는 것이다. 선어록들에 목마(木馬)·목계·석녀(石女)·석인 등이 자주 등장하고 “목마가 울며 내달리고” “석녀가 아이를 밴다”고 한다. 이 때의 목마·석인 등은 무심 도인의 상징이다. 목계·석녀는 바로 마음을 비운 도인이다. 조사선이 누누이 강조하는 ‘무심이 곧 도(無心是道)’라는 법문 또한 장자의 나무닭 우화와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저자는 일목요연하게 노장과 선불교가 궁극의 지점서 만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면 노장과 불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 책의 결론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하권 끝자락서 약간의 지면을 빌어 노장과 선불교의 상이점에 대해 밝혔다.

첫째, 노장사상은 도를 정치철학에 과감히 접목시켜 그 설법이 주로 정치 지도자(성인)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선사상도 부처와 중생의 세계를 이원화하지 않고 범성(凡聖)의 분별을 떠난 만민 평등을 강조해 당초(當初) 이후 보잘것없는 소농 지주 가문, 즉 한문(寒門) 출신으로 과거제도를 통해 진출한 신진 사대부들이 그 같은 선사상을 배경으로 문벌 귀족에 대항하는 배경의 하나가 됐다는 분석도 있긴 하다. 그러나 돈오 남종선은 적어도 표면적으로 적극적인 정치·사회철학을 표방하진 않았다. 선사상과 노장사상의 도는 일치한다. 그러나 양쪽 다 근본적인 도를 깨달은 수준에서는 사상이 같지만 노장이 그 도를 표면적으로 정치 철학화한 점은 선사상과의 현격한 차이점이다. 노자·장자가 설법의 우선 대상으로 삼는 자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다.

둘째, 선가의 도가 번뇌를 벗어나는 길을 제시, 자기 해탈에 중점을 두는 데 비해 노장의 도는 만물과 하나 되는 길을 제시해 ‘우주 해방’을 강조한다. 노장의 ‘무위’는 질서의 부정이나 해체가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질서를 의미한다. 즉 본연의 상태로 귀환하는 우주적 해방을 뜻한다. 선사상도 이러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강도가 노장에 비해 약하다.

선과 노장은 ‘무아의 실천’을 거듭 강조한다. 이는 〈주역〉이 말한 ‘영허(盈虛)의 소식’이기도 하다. 소멸하고 태어나며, 가득 찼다 텅 비는 현상을 자연법칙 또는 우주질서라 한다. ‘영허’란 바로 이를 말한다. 선과 노장은 이를 도라고 말한다. 불교는 생로병사, 노장은 정동(靜動)으로 영허의 소식을 설명하기도 한다. 도는 구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절대로 밖에서 찾는 것도 아니다. 각자가 도(불성·본래면목)를 지니기 때문에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쉽게 말해 자기 자신이 도이고 법이고 진리다. 그래서 도는 천하에서 가장 귀한 것이고 내가 곧 ‘천상천하서 지극히 귀하고 높은 존재(天上天下唯我獨尊)’인 것이다.

선불교는 중국에서 이루어진 불교다. 불교가 중국 문화를 만나서 이루어진 ‘중국화 된 불교’다. 그 속에는 중국문화가 배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인도불교에는 우파니샤드, 바가바드기타 등 힌두이즘과 인도문화가, 일본불교에는 신도(神道)와 무사문화가, 중국 선불교에는 도가사상과 도가문화 그리고 유가문화가 들어 있다. 저자는 이렇게 그 나라와 그 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는 종교나 철학은 없지만, 그 점을 제대로 알고 장점을 활용한다면 이 시대의 유용한 종교, 철학으로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선시(禪詩)의 세계도 노장의 시선으로 읽는다. 평생을 갈고 닦은 언론인의 명쾌하면서도 유려한 필치는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다. 4차산업혁명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모든 산업의 융합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국가와 국가 간의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대다. “선과 노장은 ‘무용지용’을 통해 새로운 가치 창조를 이끈다. 선가의 해탈과 노장의 초월은 실용적 측면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그 ‘쓸모없음의 큰 쓸모’가 정신적 양식이 된다”는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 융합과 소통을 통한 새로운 가치 창조의 시대에 이 책은 현대인들에게 밝은 혜안을 열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 이은윤은?

중앙일보에 입사해 문화부장·편집국 국장·논설위원·종교전문위원을 지냈다. 한국불교선학연구원장, 금강불교신문 사장 겸 주필을 역임, 대중들에게 선(禪)을 알리기 위한 강연과 저술 활동을 하였다. 저서로는 〈혜능평전〉 〈선시〉 〈한국불교의 현주소〉 〈중국 선불교 답사기〉(전4권), 〈화두 이야기〉 〈왜 선문답은 동문서답인가〉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큰 바위 짊어지고 어디들 가시는가〉 〈격동하는 라틴 아메리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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