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근본에다 맡기고 관하는 게 그대로 내가 죽는 방법입니다

칠석과 백중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요

질문 : 불교에서는 해마다 칠석, 특히 백중이 큰 행사로 치러지는데 칠석과 백중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요.

답변 : 우리가 칠석날은 견우와 직녀를 많이 상상하시죠. 옛날이야기든 뭐든 이치가 담겨 있지 않는 말은 없을 겁니다. 옛말에도 까치는 산 사람들을 위해서 인연을 이어 주고, 까마귀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전달을 해 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 둘 것은 전체가 인연 아닌 것이 없지만 칠석이라고 하는 자체가 우리가 태어남을 뜻합니다. 모두가 태어나는 길을 말합니다.

우리가 탄생하는 날을 기해서 칠성이라고 하는데, 불성을 만나는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정자 난자가 만나서, 불성이 둘 아니게 인연이 되는 그런 인연의 소치를 말하는 거죠. 마치 우리가 산 사람들을 위해서 촛불을 켜는 거나 똑같죠. 백중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거고, 산 사람들을 위해서는 칠성, 말하자면 칠석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근본은 칠성입니다. 그러나 칠석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그 자체는 바로 이 칠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칠석이라고 하고 칠성부처님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겁내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그 빽이
자기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동시에 미래로 자꾸자꾸 가는 겁니다. 우리는 과거를 연방 뒤로하면서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미래로 전진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촛불을 켜고 칠석을 맞이합니다. 다시 말해 불성이 밝으면 모두 다 밝아진다는 뜻입니다. 사는 사람들이 다 밝게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따가 죽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마세요. 뭐, 꿈을 꾸었는데 꼭 죽을 꿈이라고 헐레벌떡 뛰어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꿈이 잘못돼서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그냥 놓고 ‘죽이는 것도 너 살리는 것도 너니까, 그렇게 만들어서 꿈을 꾸게 한 것도 너니깐 너만이 잘못되지 않게도 할 수 있다.’ 하고선 관하고 그만둘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능력만 갖는다면 그게 다 훌렁 뒤집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현재·미래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칠석과 백중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칠석날 마음을 밝게 해서 백중에 모든 조상의 영령들을 위해서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백중은, 우리가 죽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거니와 바뀌어서 짐승이 사람도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가 생시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칼산지옥, 화탕지옥, 또 오무간지옥, 독사지옥 등 이러한 이름들이 허다히 많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독사로 태어났다면 그게 독사지옥입니다. 허물을 입었으면 다시는 벗기가 힘들다 이겁니다. 그 독사의 모습을 벗기가 힘들어서 사람 되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화탕지옥이다 하는 것도 우리가 또 얼마 안 있어서 끓는 물로 들어가고, 불 속으로 들어가고, 수십 번 그냥 돌아가면서 들어가는데 그것이 어찌 화탕지옥이 아니겠습니까? 또 때로는 칼로 그냥 산 놈을 탁탁탁 쳐서 모두 먹죠? 그런 거를 볼 때 그게 어찌 칼산지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두 칼산지옥이니 화탕지옥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냉정하게 현실의 삶 그대로입니다. 현실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지옥도 하나하나, 화탕지옥이니 독사지옥이니 모두 보고 있습니다. 보면서 하고 있고 그럽니다.

나는 지금 현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무슨 옛날 얘기 하는 게 아니고 미래 얘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현실 얘기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이렇게 이렇게 되고, 또 사는 동안에도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하고, 이렇게 이렇게 산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렇게 살면 다음 세상에 나올 때도 또 이렇게 살게 되니까 그거는 뭐, 독 안에 들어도 면치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공부를 열심히 해서 독 안에서 벗어나라 이 소립니다. 내 몸 통이 독이니까요. 내 몸 통이 독 안과 같아요. 통과 같아요. 이 몸 통 안에서 벗어나야 지구에서도 벗어나고, 지구에서 벗어나야 우주 세상에서도 벗어나고, 우주 세상에서 벗어나야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왜 백중을 지내는지 아시겠죠? 부모가 예를 들어서 닭으로 화해서 이 세상 지옥고에 떨어졌다, 물고기로 태어나고 또 소로 태어나고 뭐, 독사로 태어나고, 가지각색으로 태어났다 하는 그런 틈에 끼었다 이런다면, 여러분이 천도재를 지극히 해서 그 몸을 벗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백중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그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나오죠? 그런 때 더러더러 나오죠. 그런 경우와 같이 백중 때는 남한테 모함받아서 들어왔던 사람, 지극하게 다시 마음을 다잡은 사람,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백중날 다 내보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천도재를 세 번 네 번 지내도 그거를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된 집도 있습니다. 그런 집들은 자꾸자꾸, 그저 되는 대로 해야죠.

하여튼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살아가는 게 말입니다. 그냥 죽으면 고만이지 그러지만 그게 아니죠. 내가 콩씨 얘기도 가끔 하고 무우씨 얘기도 가끔 합니다. 무우씨 싹이 말입니다, “싹이 없어지면 그만이지.” 이러지마는 그 종자가 있어서 심으면 또 나오거든요. 그러니 ‘그만’이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영원토록 돌아가야죠.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콩씨가 팥씨가 될 수도 있고, 팥씨가 콩씨가 될 수도 있고, 또 아주 상승의 사람 종자가 될 수도 있고, 또 그냥 하(下)의 종자가 될 수도 있죠. 이런 자유자재권은 바로 여러분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칠석이든 백중이든 그 의미를 가벼이 생각하지 마시고 정성을 기울이면서 열심히 노력하셔서 성취하십시오.

허공 길을 걸으려면

질문 : 큰스님께서 ‘허공을 걷는 길’이라 표현하셨는데 우리가 서슴없이 허공 길을 걸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할는지요.

답변 : 왜 부처님께서 “벗어나라, 벗어나라” 했겠습니까? 이 중세계에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모습은 천차만별이지만 그 모습 속에는 모두 곤충주머니예요. 우리가 이 곤충주머니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허공 길을 디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살아나가는 데 관습과 의식이, 욕심이 모든 게 그렇게 습관이 돼서 그걸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러니 죽어도 자기 모습이 그대로 있는 줄 알거든요. 그래서 지옥고를 딛고 나가려도 디딜 수가 없고, 강을 건너려도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또 불수레를 건너가려도 벗어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자기가 있다는 관념 때문에.

그러면 우리가 이 중세계에서 살아나가는 데에 어떻게 살아야 편안하겠습니까? 이 부딪치고 부딪치고 이렇게 수레가 돌아가면서 부딪치듯 우리가 살아 있으니깐 이렇게 부딪치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바로 지혜도 생기고 물리도 터지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은 ‘불’이요, 바로 부딪치면서 살아나가는 것은 ‘교’라고 했습니다. 이게 진리의 언어지, 어떠한 중들만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그런 국한된 마음이 아닙니다. 이 불교라는 자체는 끝이 없는 진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먹지만 않는다면, 먹는 게 없다면 이렇게 강도도 없을 거고, 사기도 없을 거고, 싸움도 없을 거고 그렇지 않을까요? 먹으니깐 똥을 눠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이 잠자고 똥 누고 먹고 이러는 게 없다면 우리는 그냥…. 요 말끝에 한마디 또 하죠. 부처님께서 둘 아닌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전에도 얘기했지만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고 형성돼서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면서 연방 수억겁을 거쳐서 나왔단 말입니다. 그거 나온 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내 도량 아닌 게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없습니다. 안 그럴까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고…. 개구리라고 그래 봤자 올챙이 과정을 거쳤단 얘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똥 안 누고, 그렇게 세 가지를 다 안 할 수 있다면 그건 별천지죠. 부처님의 한도량이죠.

부처님 한마음 속에서 그 보살들의 이름들이 다 나가는 것입니다. 천차만별로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데도 우리 마음속에서, 한마음 속에서 때로는 내가 용도에 따라서 관하면 지장이 돼 주고, 용도에 따라서 또 관하면 관세음이 돼 주고 그렇게 화해서 찰나찰나 나투어 주신다 이런 말입니다. 때로는 길잡이가 돼 주시고, 때로는 또 해결사가 돼 주시고, 때로는 보디가드도 돼 주시고 아니 되는 거 없는데 그렇게 그냥 발버둥이를 치고 애를 쓴단 말입니다. 자기 나무는 자기 뿌리를 믿어야지 공덕이 있는 거지, 자기 뿌릴 믿지 않고 형상이나 이름을 믿고 그렇게 한다면 저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하나 벗어나서 천차만별의 중생을 다 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거 보세요. 아까 얘기했듯 부처님께서 일대사의 인연을 맺으셨다고 한 뜻이 바로 그거란 말입니다. 과거로부터 내 부모 아닌 게 없고, 내 자식 아닌 게 없고, 내 형제 아닌 게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모두가 내 도량 아닌 게 없다고 했죠. 그런데 우리가 그런 세계로 벗어나서 똥 안 누고, 먹지 않고, 잠자지 않는 세계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어떠한 체 없는 그 내 마음의 처소가 될까요?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하나는 배움의 길에 있어서 몸체를 두고도 속도가 너무 빠르게 저 거리를 걸어간다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눈에. 속도가 너무 빠르면 보이지도 않고 바람만 설설 일어나죠. 이런 거 짐작해 보셨습니까? 또 ‘체가 없는 나’가 허공 길을 걸어갈 때는 가고 옴이 없이 갔다가 전체를 요만하게 만들어서 갖다 보기도 하고 또는 요만하게 만들어서 갖다 놓기도 하는데 큰 거를 그 가운데 들어가서 보려면 다 못 봅니다. 작아야 전체를 볼 수 있죠.

이 말은 여러분이 그렇게 허공 길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만이 마음도리…, 아까 얘기했죠. 관세음보살이 되고, 지장보살이 되고 그런다고요. 그런데 만약에 걸어오는데 이 계단을 올라올 때 마음이 올라온다면 점프해서 그냥 올라올 수 있는데, 몸으로 오려니깐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그 마음으로는 그렇게 이 세상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할래도 할 수 있는 마음의 도리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같이 둘 아니게, 즉 말하자면 어느 모습 하나도 내 모습 아닌 게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또 내 작용 아닌 게 없고, 내 공식 아닌 게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휴! 내가 이거 뭐, 중생인데 이렇게 허공에 발을 떼어 놓을 때에 떼어 놓을 수가 있겠나?“ 이러지만 우리는 그냥 거기다가 맡기고 관하고 이러는 게 그대로 내가 죽는 방법이요, 내가 함이 없이 하는 방법이요, 둘 아닌 도리를 아는 방법이요, 구경계에 이르는 방법이요, 전부가 아니 되는 게, 아니 하는 게 없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다 그렇게 어떠한 인연에 따라서 용건이 들어와도 나는 허공 길을 걸어야만 되겠죠. 찰나에 그 모습이 돼야, 화해서 나투어야 만약에 어떤 짐승이 나를 청했다, 짐승을 건져야겠다 이런다면 짐승 속에 내가 짐승이 돼야 되겠죠.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내 모습 아닌 게 하나도 없느니라.” 했어요. 내 마음 아닌 게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내 공용이다, 공식이다 이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할 때에 내가 화해서 남을 건져 주는 데도, 하다못해 물에서 노는 고기 한 마릴 건져도 내가 수많게 화해서 그 고기로도 들어가고, 짐승에도 들어가고 사람에게도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바로 그걸 건지는 겁니다.

부처님만 그러신 게 아니라 여러분들도 그렇게 마음공부 하는 분들에 한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는 전제를 하고 지금 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점프를 해서 계단을 한 걸음에 올라올 수 있다면 강은 못 건너가겠습니까? 강 속은 못 들어가겠습니까? 은산철벽은 못 뚫겠습니까? 삼라대천세계는 못 가겠습니까? 두루 하죠. 덮고도 받치고도 남음이 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 길을 알아야 요다음에도 허공 길에 발을 떼어 놓을 때 서슴없이 떼어 놓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선과 악을 다 놓으라 하는 까닭은

질문 : 수행을 함에 있어서 선은 될수록 많이 닦아야 할 것 같은데 악과 선을 다 놓으라 하심은 무슨 까닭인지요.

답변 : 우리는 마음이 말입니다, 항상 육체 속에도 생명체들이 많이 있어서 같은 의식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두 씁니다. 그걸 같이 하지 않는다면 바로 악과 선이, 즉 말하자면 이 양면이 생겨서 싸우게 되면 몸에 병이 생깁니다. 생명들이 이거는 아군이다, 적군이다 아이, 이게 생겨 가지고 말입니다, 싸움들을 하다가 만약에 아군이 이기든 적군이 이기든 간에 이기면 그냥 살이 굳어지거든요. 생명이 죽으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이거는 나쁜 악신이다, 선신이다’ 이런 것도 따지지 마시고, ‘악한 것이 나한테 왔다’ 이런 것도 따지지 마시고, 선신 따로 찾고 악신 따로 물리치고 이러지 마시고 모든 게 한생각에 악신도 선신이 되고, 선신도 악신이 되는 겁니다. 한생각 차이에. 선신은 선신대로만 있는 게 아니고 악신도 악신대로만 있는 게 아닙니다.

어느 사람이 강도 짓을 하러 들어갔는데, 무슨 부잔 줄 알고 들어갔는데 가난해서 사람 죽일 필요도 없더랍니다. 너무 찾아봐도 없어서. 그래서 사람도 죽이지 않고 가만히 빠져나오려고 그러는데 그 어머니라는 사람이 울면서 하는 소리가, 혼자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서 하는 소리가 “낼 너희들 차비도 없으니 어떻게 학교를 가느냐. 쌀 한 톨도 없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굶겨 보내느냐.” 하면서 울더랍니다. 그걸 보고 그냥 훔쳐 가지고 왔던 거를 거기다 도로 놓고, 그 사람네들에게 주고 돌아섰답니다.

그러니까 악인도 때에 따라서는 선신이 되는 겁니다. 선신도 때에 따라서는 악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다 놔라 이런 겁니다. 선도 놓고 악도 놓고 다 놔라. 놓는 그 가운데서 미묘한 바로 참마음이 생기느니라. 그게 바로 평등공법이며 그것이 바로 법신의 정신이다 이런 것입니다.

왜 행복하지가 않을까요

질문 :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늘 뭔가를 추구하다 보니 마음이 공허해지고 조바심이 나서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행복해지려고 하는 일인데 왜 행복하지가 않을까요?

답변 : 예전에 어떤 시인이 봄을 찾아 밖으로 헤매다가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었다고 합니다. 저 산 너머에는 행복이 있다고 미루어 짐작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일에는, 내달에는, 내년에는…. 이렇게 내일과 저곳에다 희망을 걸고 사람들은 고된 현실을 살아나가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거짓 희망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바로 어저께에는 내일로 불리었으며, 그때 오늘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던 것입니까. 그러나 그 아름다워 보였던 그날이 오늘로 된 지금, 사람들은 오늘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또다시 내일을 기다립니다.

내일과 저곳만을 바라고 사는 사람들, 그들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진리를 저 먼 어느 곳에 있다고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결코 진리를 만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리는 선지식들에게만 있다고 믿고, 진리는 먼먼 훗날에야 있으며, 저 우주 끄트머리의 어떤 신비스러운 나라에만 있다고 믿는 이들은 진리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지 진리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밖에서 봄을 찾던 시인은 자기 집에서 그것을 만났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먼 내일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입니다. 어떤 위대한 스승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 위대한 스승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스승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그처럼 되기 위해서는 나 또한 나의 마음을 되돌려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자랄 때 빼고 늙은 뒤에 빼고, 살면서 얼마나 행복을 느꼈습니까? 행복이 얼마나 됩니까? 이것저것 자는 것 빼고 이것저것 걱정하는 것 빼고, 이것저것 다 빼고 나면 행복이란 그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 어느 때고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그 빽이 자기를 즐겁게 행복하게 해 주는 겁니다. 마음이란 너무나 광대하고 무변해서 마음이란 이름은 하나 가졌지만 그 마음이라는 이름 가지고 얼마나 많은 마음을 씁니까. 그래서 마음은 없는 게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많이 있어서, 그리고 돈도 안 내고 쓰는 마음이라 그저 아무렇게나 그냥 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막 해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부부지간도 자식지간도 모두 누구나 대신 살아 주는 사람 없습니다. 아파 주고 죽어 주고 깨달아 주고 똥 눠 주고 잠자 주고 또는 밥 먹어 주고, 이러는 거 대신해 주는 거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제각기 모두 이 마음을 좀 연구해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묘하고 미묘한지….

우리들의 몸뚱이 자체가 꽃 한 송이라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꽃잎이 얼마나 많습니까? 꽃잎이 한 송이에 많이 붙어 있죠? 한 몸뚱이에 헤아릴 수 없는 의식들이 있고 생명들이 있고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하나로 귀합해서, 즉 말하자면 ‘주인공 자체다’ 이렇게 자기 뿌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큰 일이 벌어졌든 작은 일이 벌어졌든, 우리가 종교를 믿지 않든 믿든, 자기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바로 모든 것은 있는 것입니다.

잘되려고 믿는 것도 아니고 죽으려고 믿는 것도 아니고 못되려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단, 이 세상에 자기를 형성해 가지고 나왔으니까 믿는 겁니다. 믿으면서 ‘모든 거는 네가 형성시키고 네가 이끌어 가니까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맡겨 놓되 진짜로 믿는다면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안달복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맡겨 놓고는 또 못 믿으니까, ‘아이구, 이것이 정말 되려나?’ 이러거든요. 그거는 건네주었던 결재 서류를 도로 뺏는 거와 같아요. “이 서류를 다 좀 해결해라.” 해 놓고는 도로 가져오는 격이죠. 줬으면 해결하게 믿고 내버려 둬야 될 텐데 그 서류를 도로 뺏는 격이란 말입니다. 못 믿으니까! 줬다가 뺏었다가 줬다가 빼앗다가 이러니까 일이 제대로 될 게 뭡니까?

그러니 진짜로 믿는 데서 여러분의 가정에 후환이 없고 애고가 없어질 뿐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무너지고 인과응보가 무너지고 모든 영계성이 무너지고 세균성이 무너지고 생사윤회에 끄달리지 않을 것이며, 모두 그렇게 되는 까닭에 편안함이 오는 겁니다. 삶의 보람을 얻고 삶의 자유를 얻고 이렇게 해 나갈 수 있는 것이지, 만날 이름만 부르고 이름을 믿고 간다면 그건 안 됩니다. 주인공이라는 이름은 “얘, 아무개야! 물 한 컵만 다오.” 할 때처럼, 물 한 컵만 달라고 하기 위해서 이름이 붙은 거지, 실질적으로 목이 말라서 물을 먹기 위해서 떠 가지고 오는 데 이름은 하등 상관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 진실로 믿어야 합니다. 나 따로 있고 주인공 이름 따로 있고, 해 달라는 놈 따로 있고 해 주는 놈 따로 있다면 그건 안 되죠. 과거에 살던 자기더러 현재 자기가 ‘하, 이놈아, 네가 살면서 다 저지르고 네 놈이 있기 때문에, 영혼의 뿌리, 네 놈이 있기 때문에 바로 정자 난자를 비롯해서 나를 형성시킨 것 아니냐. 네 놈이 형성시켜서 네 놈이 끌고 다니는데 네 놈이 해결해야지 누가 해결해?’하고 진짜로 맡겼을 때 그 참자기가 나서서 일을 보는 겁니다. 따로따로 있으면 안 되죠. 과거에도 자기가 살았고 현재에도 자기가 살고 미래에 또 오늘 자기가 살 겁니다. 모습만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바꿔질 뿐이니 이 몸뚱이가 내가 아님을 꼭 알고 밝은 주인공의 삶을 사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