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중생 속에 있고 중생은 부처 속에 있다

여러분께서 한자리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늦도록 기다려 주시는 것이 상당히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다 바쁘신 줄로 알고 있는데, 그 바쁜 것을 다 제치고 이렇게 한자리 해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여러분 자체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어디 상대가 있고 세상이 있고
우주가 있겠습니까?

참, 마음이라는 것이 상당히 요상합니다. 색깔도, 보이지도 않는 것을, 마음 내기 이전을 말해서 자기 불성이라고 하죠. 영원한 근본이라고도 하고 뿌리라고도 하죠. 그런데 그 마음을 냈다 하면 법신(法身)이라고 하고, 그 마음에 따라서 육체가 움죽거린다 하면 화신(化身), 응신(應身)이라고 하죠. 화신은 바꿔지는 걸 말하고 응신은 서로가 대하는 걸 말하죠. 그래서 그걸 종합해서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했던 거죠.

그런데 마음을 안 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을 냈을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를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내 몸속에 많은 중생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장이냐, 심장이냐, 위냐, 식도냐, 방광이냐, 콩팥이냐, 정맥이냐, 동맥이냐 하는, 일체 이름해서 움죽거리는 그 자체가 바로 어떠한 부분에서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정맥이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동맥이 움죽거릴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많은 생명체들이 작용을 하는데 어떠한 것이 작용할 때에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죠.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알아보신다면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왜냐하면 생각나기 이전에도 내가 했다고 할 수가 없고, 또 생각을 냈을 때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몸이 움죽거릴 때나 육체 속에서 정맥 동맥이 움죽거릴 때, 또는 눈 귀가 움죽거릴 때도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죠. 그런데 이 천차만별의 이름이 전부 내 한 그릇에 있습니다, 내 몸뚱이 한 그릇에. 그런데 그게 다 누가 하는 거죠? 누가 하는 겁니까? 모두 본인이 하는 거죠? 남이라고 할 수 없죠? 몸 안에 들어 있는 것도, 어떠한 거위 한 마리도 나 아님이 없죠? 그러니 내가 했다고도 할 수 없고 안 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런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니 어떠한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나는 없다’하는 겁니다. 나는 없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실 때, 여러분 자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맥, 동맥이 쉬지 않고 뛰면서 이어져 돌아가는데, 정맥이 뛸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맥이 뛸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전체를 볼 때에 어떤 걸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내가 없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 나는 공동체야! 공동체니만큼 모든 것을 해도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이 함이 없이 하기 때문에 손도 손 없는 손이 하고 있다. 그리고 없는 발이 한자리를 디뎠다. 이게 평발의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항상 말씀드렸죠? 그래서 여러분 법이,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작용하는 생활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고, 여러분이 법신이자 부처님이자 바로 화신입니다. 그리고 상대성 원리로서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는 거니까 항상 응신으로서 베푼다 이겁니다. 타의의 어떠한 신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니까 나 자체부터 알아야 합니다, 나 자체부터. 나 자체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가 있다는 걸요. 나 자체가 나왔으니까, 내 몸뚱이 속에 있는 그 자체가 모두, 바로 악업 선업이 인과가 돼서 영혼의 근본과 더불어 같이, 어머니의 살을 빌리고 아버지의 뼈를 빌려서, 즉 정자와 난자를 말하죠. 그래서 합류화돼서 합성체제로서 형성이 됐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몸속에서 작용을 하는 거나 외부에서 내 몸뚱이가 작용하는 거나 모든 것이 전체가 함이 없이 하는 겁니다. 왜? 어떤 걸 했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이렇게 말하죠. 가정에서 아버지 노릇 하랴, 남편 노릇 하랴, 아들 노릇 하랴, 형님 노릇 하랴, 아우 노릇 하랴, 사위 노릇 하랴, 친구 노릇 하랴, 사회에 나가서 어떠한 회사나 직장에 있다든가 어떠한 지위를 가졌을 때 또 이름이 붙죠? 그러니 따로따로, 몸뚱이 체가 따로 있어서 따로 행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자동적으로…, 아주 묘법이죠. 그게 묘법입니다. 내가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여보!” 하면 뜻과 행과 말이 동시에 남편이 되는 거죠. 그런데 남편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 노릇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아버지 노릇 할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그거나 그 지금 말씀드린 거나 모두가 하나로 통과가 됩니다. 이 모두가 내가 했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됐다고 할 수 없고, 내가 말했다고 할 수 없는 까닭에 모두가 공했다는 겁니다. 

모두가 공하고, 모두가 함이 없이 했고, 모두가 비었다. 어느 것도 내가 아니다. 내가 없다! 내가 없으니 물이 있으랴. 물이 없으니 강을 건널 게 있으랴.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 한 찰나, 찰나라고 하는 소리도 그 까닭입니다. 찰나에 아버지가 됐다 찰나에 남편이 됐다 이렇게 하듯, 부처님의 마음도 역시 그렇게 찰나에 바로 칠성부처가 됐다가 지장이 됐다가 관세음보살이 됐다가, 약사가 됐다가 용신이 됐다가 지신이 됐다가, 온통 그렇게 화해서 나투죠. 자동적으로 이게 됐다 저게 됐다, 이게 됐다 저게 됐다 하는데, 여러분이 지금 실질적으로 생활 속에서 하고 계시니까 그걸 납득을 하시죠?

그래서 부처님 마음도 동방에 이름을 지어 놓든가, 서방에 이름을 지어 놓든가, 지장이라는 이름을 지어 놓든가 어떠한 이름이든지 그거는 이름일 뿐입니다. 지금 생활 속에서도 아버지다 남편이다 아들이다 하는 거는 바로 이름일 뿐이죠. 그런데 이름이 자동적으로 누구한테나 주어졌지만 누구한테나 주어진 그 이름이 진실하기도 합니다. 영원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알고 본다면 “그렇게 공하고 그렇게 내가 없는 가운데 바로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있구나. 산과 물이 둘이 아닌 까닭에 물은 물대로 있고 산은 산대로 있구나.” 하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마음이라는 것이 참 묘하기도 하고 말로 어떻게 형용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잘 배우고 권세나 모든 게 아무리 다 좋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그 사람에게 작용을 한다면 망하든지 흥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미치든지 성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순전히 마음의 꼭지에 달려서 끌려다니고 움죽거리는 체(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항상 스스로 생각하는 거지만 참, 마음이라는 게 너무나 묘해요. 엊그저께도 이런 예가 있었죠. 이거는 내가 너무나 새삼스럽게 느낀 겁니다. 제가 느낀 것을 한번 말씀드려 볼까요? 어느 젊은이가 유학을 가서 내내 공부를 참 열심히 해서 박사 학위까지 땄습니다. 박사 학위를 따 놓고 일 년 동안 마무리를 다 하고 난 뒤에 입산을 하러 왔습니다. 어때요? 그 마음이라는 게. 어디다 세워 놔도 살 수 없는 사람이 아니고, 어디다 세워 놔도 빠지지 않고 어디다 세워 놔도 아주 모범이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게 웬 말입니까? 다시 생각을 해 볼 수 없겠느냐고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저는 지금까지 헛살았습니다. 부모를 모셔야 할 형편인데, 부모의 육을 모시는 것보다도 진짜 어머니의 마음을 내가 모시기 위해서라도 꼭 입산을 해야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게 당치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신도1(남)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 그런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요상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아니, 입산을 하겠다고 생각을 한 그 마음이 요상하고, ‘저렇게 배워 가지고 왜 그렇게 해?’ 하는 마음이 또 요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훌륭하다고 하는 그 마음이 또 요상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요상한 거예요. 참 묘한 거예요. 마음이 말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도깨비처럼 마음이 요랬다 조랬다,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생각했다 할 수 있는지….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자유스럽게 생각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유스럽지 못하게 모두 생활들을 하시거든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마음대로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고,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 당당한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생각지를 못하세요, 모두. 하, 참!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부처다” 이랬는데도 왜 한 겹을 벗지 못하고 그렇게 극매는지…. 내 마음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 한다는 건 말도 안 돼요. 그 요상한 그 마음 말입니다, 그거를 잘 다루어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한 법입니까?

나는 입산을 하러 왔을 때도 ‘아이구, 참 이렇게 잘 배운 사람이 잘 왔다.’이게 아니라, 못 배웠든지 잘 배웠든지 말입니다, ‘마음이 참 요상하다’는 생각에, 그 마음이 너무나 요상하게 보여서 웃었습니다. 하하하…. 마음이 얼마나 요상합니까? 그런데 그 요상한 마음을 내가 다스려서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도 다 입력이 돼요. 그냥 허탕 이렇게 가는 게 아닙니다! 그, 마음 내기 이전이 꼭지가 붙어 가지고…. 그 꼭지가 뭐냐? 그게 오신통이에요. 그 꼭지가요. 

거기에는 숙명통도 들어 있고, 타심통도 들어 있고, 천안통도 들어 있고, 또 신족통도 들어 있고, 천이통도 들어 있어요. 다섯 가지가 다 들어 있는 동시에 이 마음의 꼭지가 붙어 있는 데서,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마음을 냈든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마음을 냈든 그 꼭지에서 신호가 차악 두뇌로 갑니다. 두뇌라는 건 우리가 지금 그냥 보통 얘기하는 거고요. 그러니까 이 두뇌로 가서 모든 것을 사대(四大)로 통신을 하게 돼 있죠. 통신을 해서 이 속에 있는 생명체들이 마음을 다 알 수 있게끔요. 내 몸뚱이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오고 무엇을 하는지를 알게끔 신호를 다 주는 거죠, 안팎이 다. 안에서 내가 움죽거리는 걸 다 알게 돼 있고, 또 내가 안에서 움죽거리는 거를 다 알게 돼 있는 거죠. 그래서 이게 통과가 되는 거죠.

그런데 이 마음공부를 안 하는 사람들은 누진(漏盡), 즉 두뇌라고 하는 게 누진을 말하죠, 이게 누진에 통신이 되질 않고 이 사대에, 오장육부에 통신이 되질 않기 때문에 이 몸뚱이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뭐를 어떻게 하고 가는지, 잘못하고 가는지 잘하고 가는지 이것도 일체 중생들이 모르고 있는 거죠. 그것이 의심이 가걸랑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지구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 무엇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모두? 우리는 지금 몸뚱이 속에서 별성들이, 그 중생들이 다 살고 있는데, 한 발 더 나아가서 보면 우리가 지구 속에서 또 살고 있어요. 지구가 찰나찰나라는 언어도 붙지 않게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 돌아간다는 거는 알고 있지만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다니는지 그건 도무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마음공부를 하는데 상대와 부딪친다 하더라도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내 탓이지 왜 남의 탓으로 돌리느냐 이겁니다. 안으로 모든 것을, 내가 하고 있는 그 자체를 모두 ‘네가 하고 있는 거니까 네가 해결해라.’이렇게 돌려서 놓는 거죠. 놓는다는 것이 맡겨 놓는다는 거죠. 즉 말하자면 맡겨 놓는 것만이 아니라 굴려서 놓는 거죠. 내가 모를 때, 이렇게 해야 할지 저렇게 해야 할지 모를 때 ‘너만이 알아서 할 수 있어.’하고 그냥 맡겨만 놓으면 아주 정식대로 다 해 나가죠. 그런데 내가 알고 있을 때,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야겠다 할 수 있을 때는 ‘이렇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하고 놔야 굴려 놓는 거죠. 구정물이 들어왔을 때 바로 그 구정물을 새 물로 바꿔 쓰는 거나 똑같죠. 어떤 물체가 아니라 이건 마음의 장난이기 때문입니다. 물체는 맨 나중에 나오게끔 돼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 보이지 않는 데서 먼저 해결이 나야 보이는 데로 나오게 돼 있어요! 

제가 지금 여러분한테 하는 이런 말은 어느 책에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한테 책에 쓰여 있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책으로 나오기 이전, 우리가 지금 생활하는 자체가 그런 겁니다. 어떻게 그걸 말로 다 하며 어떻게 글로 다 쓰리까? 이렇게 우리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고 자유스럽게 마음을 낼 수 있으니, 찰나찰나 돌아가는 이 생활과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지구 및 우주의 섭류를 파악해서 바로 자유인으로서 살아나가는 계기를 만들자는 거죠. 또 부처님께서도 그런 계기가 돼서 ‘너희들은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하는 그런 명시를 하신 겁니다. 

그런데 사십구 년이다, 삼천 년 전이다 해도 부처님 말씀을 우리가 알아낸 게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자기가 지금 어디서 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또는 자기가 내면에 그렇게 많다는 거를 모르기 때문이며, 이 몸뚱이라는 집합소에 자기라는 모습이 천차만별로 돼서 한 바구니에 지금 들어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는 내가 작용하는 집합소입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하는 거고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마음으로 다스려라 이겁니다. 그래서 부처 중생이 둘이 아니요, 부처는 중생 속에 있고 중생은 부처 속에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딴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자체를 말하는 거죠. 여러분 자체가 없다면, 그리고 생활이 없다면, 여러분 자체가 이 세상에 나지 않았다면 어디 상대가 있고 세상이 있고 우주가 있겠습니까? 아주 냉철하게 생각을 잘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종교를 따로 떨어진 어떤 것으로 알지 마십시오. 우리 생활 자체가 그대로 종교며 불교입니다. 이렇게 가깝게 종교 속에서 살고 있고, 지금 생활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이 종교니 저 종교니, 또는 “난 종교 안 믿어!” 이러거든요. “난 불교 안 믿어!” 이러거든요. 안 믿긴 뭘 안 믿습니까? 벌써 생명이 있고 움죽거림이 있고, 벌써 통신을 하고 돌아가고 있고 이러는데 불교가 아닙니까? 천체 생명이 있는 것은 다 불(佛)이요, 바로 마음과 마음이 전달되는 거, 말로 전달되는 거, 바로 통신으로 전달되는 게 다 교(敎)인데, 어떻게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살고 있거든요.  

어떤 때 여러분 모습을 봤을 때 참 혈기 왕성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보이고 그래도, 잘 보면 모습은 건강하나 속이, 마음이 좀 상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뭐, 꼭 보려고 해서 보는 게 아니라 심심하면 그렇게 되는 때도 있죠. 그런데 그렇게 될 때마다, 내가 너그럽지 못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주 딱한 생각이 들면서…. 그게 다 부질없는 생각이겠죠? 여러분이 모두 잘하고 가시는데 내가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건지 그건 몰라도, 딱한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니에요. 
그거는, 얼른 쉽게 말해서 딴 사람으로 생각을 한다면 뭐, 그냥 지나가는 사람 본 셈치고 아무렇지 않게 그냥 갈 수도 있겠지만, 내면적으로 외부적으로 한데 합쳐서 100%를 본다면 이건 남이 아니에요, 전부가. 줄창 여러분한테 말했지마는 억겁을 통해서 모습을 자꾸 바꿔 가면서 이게 되고 저게 될 때 모였던 인연으로 모두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는 것이고, 이렇게 할 때마다 이것이 인연이 되거든요. 그러니 어떻게 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산천초목의 나무들도 이름은 각각이지만 모두 자리는 한자리하고 있습니다. 한자리에서, 한 어머니 속에서 다 자라고 있듯이 이 산하대지에서 모두 살고 있습니다. 밤나무니 소나무니 이름은 다 각각이지만 그렇게 다 각각 살면서도 한자리에 살고 있듯이, 우리도 한자리에서 항상 화해서 돌아가서 또 탄생을 하게 되죠. 그런데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지금 나온 것이고,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오늘, 바로 그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올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나오는 동시에 만날 바뀌어서 같이 만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어저께 부모가 내 부모겠습니까, 또 오늘 다시 모습을 가지고 그 부모 속에서 나왔으니 그 부모가 내 부모겠습니까? 그러니 부모 아닌 게 없고 자식 아닌 게 없고 형제 아닌 게 없어요, 더 넓게 본다면. 우리가 잘못하고 가면 독사도 되고 뭐, 뱀도 되고 곤충도 되는데 곤충이 되는 것을, 즉 말하자면 오간지옥이라고 하죠. 그런데 그런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오는 것까지도 모두가 화해서 이렇게 돌아가니까 네 생명이 따로 있고 내 생명이 따로 있고, 네가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고 그런 게 아닙니다, 알고 본다면.
그러니 그렇게 알면 ‘나’이기 때문에 하나도 죽이지 말아야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또 묘한 도리가 있습니다. 죽여야 그 무명을 벗고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 묘한 도리를 어찌 다 알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소가 소로 보이면 고기를 못 먹고, 소가 약으로 보인다면 약으로 먹고 무명을 벗긴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이 마음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에 한해서만이 그런 게 주어진다는 얘기죠. 기복으로써 만날 복이나 빌러 다니는 사람들하곤 다르죠. 천지 차이죠. 

그래서 우주간 삼세를 다 한마음이 포착하는 거죠. 그러니 이걸로 태어나고 저걸로 태어날 것도 없는 거죠. 내가 마음먹으면 그대로 그것이 법이 돼서 그대로 행하게 되는 거니까요. 컴퓨터에 입력을 해 넣으면 지금 현재 컴퓨터에서 다 그렇게 나오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과거든 미래든 현재든 그 삼합이 체인지가 되어서 같이 내 한마음에서 그냥 돌아가니까 하나도 법에 저촉되는 게 없죠. 그러니까 죽여도 살리는 법, 살려도 살리는 법. 이게 전체가 자비가 되죠. 이 원리가 그러하다 이겁니다.

그러하니 여러분께서 이 생에서만 이렇게 다니는 게 아니니까 한 생, 한 철 지내려 나온 지금 이 도리를 완전히 파악한다면, 이제는 삼세를 포착하고, 부처님을 집어삼키고 중생을 모두 집어삼켰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다 집어삼켰기 때문에, 태양이든지 은하계든지 어떠한 혹성도 다 포착해서 집어삼켰기 때문에, 이렇게 다 집어삼켜서 자리를 만들어도 그 마음자리가 작지 않더라 이겁니다. 이것은 우주를 내 마음으로써 아주 축소시켜서 먼지 하나로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있고, 내 손가락 하나로 삼천대천세계를 다 들 수도 있는, 그런 대대적인 바로 삶의 포착이죠. 

그러니 만약에 내 몸이 이 선원에 와서 마음공부 하기 이전부터 병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몸이 없어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즉 집은 망가져서 헐어 버려야 될 지경에 있다 할지라도 새로 짓는 집을 잘 지어야 하니까요. 그 안의 주인이 삼라만상 대천세계를 다 쥐고 자유스럽게 건질 수 있고, 줄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그런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새 집을 지어야 하니까, 지금 집이, 오두막집이 아주 헐어진다 하더라도 그거를 겁내지 말고 대치할 수 있는 그런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냥 훌떡 벗어 버리면 됩니다. 마음대로 입을 수도 없고, 벗어 버릴 수도 없고, 마음대로 살 수도 없고 이렇다면 이 공부 하나 마나죠. 사실은 마음대로 못 사는 것도 마음대로 사는 거고, 하하하…, 마음대로 사는 것도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그것을 포착만 한다면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감사함과 더불어 크나큰…, ‘하이고! 이럴 수가 있나! 이럴 수가 있나!’ 하고서…, 허, 그건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이 육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마음이 말입니다, 육을 살리기 위해서 육 속에 있는 중생들을 먹여야 됩니다, 이제. 하하하…. 그래서 안으로는 먹이고 거죽으로는 살리고자 해서, 지금 먹여 살리려면 어떠한 짓이라도 하겠다고 하는데, 그 용기를 바로 내면에다 두세요. 지금 세상에 육신이 못 먹어서 죽을까 봐 애쓸 필요는 별로 없다고 봐요. 전 그걸 고문받듯이 많이 배웠어요. 하하하….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1993년 7월 4일 법형제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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