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카르 갸초

곤카르 갸초, 〈나의 정체성: 1 (티벳 시절)〉, 2003 / 〈나의 정체성: 2 (중국 공산주의 체재기 화가)〉, 2003 / 〈나의 정체성: 3 (망명자로서의 예술가)〉, 2003 / 〈나의 정체성: 4 (런던 스튜디오)〉, 2003년, 디지털 사진, 56.6 x 70.6cm
곤카르 갸초, 〈절개된 석가모니불〉, 2010년, 실크스크린 위에 미디어, 콜라주, 연필 및 인도 잉크 혼합, 280 x 230cm, 개인소장, 뉴질랜드. 환하게 빛나는 곱고 찬란한 색채와 더불어, 한 편으로는 보는 이의 심상에 묘한 생경함을 던져 준다.

형상의 실루엣은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인데,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형태를 구성하는 것들은 수많은 다양한 색채의 작은 스티커들이다. 이것은 작가가 전세계에서 모은 것들인데 여기에는 미키마우스, 팅커벨 같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사회정치적이면서도 극소수 컬트적 숭배의 대상이기도 한 체 게바라, 오사마 빈 라덴 등도 있고 맥도널드, KFC, IKEA 같은 회사의 스티커나 모택동, 오바마와 같은 정치인의 이름들도 보인다. 참으로 다양하기 그지없다.

탱화와 흡사한 티벳 탕카 천착
서양에 새로운 미술 사조 전달

석가모니불의 주변에는 새, 자동차, 말을 탄 사람,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 등 다양한 작은 형태들이 그려져 있고, 카툰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 풍선들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다. 석가모니불의 머리를 감싼 원광에서는 방사상으로 비행기들이 가로지른다.

이 작품은 티벳의 전통 탕카 제작 기법을 바탕으로 서구 현대 미술의 팝 아트 양식으로 재현되었다. 전체 도상은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아래 앉은 고타마 싯다르타 주변에 마라가 보낸 수많은 야차들이 에워싸고 공격하는 모습이며, 수인은 ‘항마’ 즉 마구니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는 ‘촉지’의 순간을 묘사하였다.

한편으로 이 작품에서는 대량 소비 사회의 여러 부정적 측면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참 나’에 대한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교란하는 듯한 중의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화폭을 크게 아래 위로 가로지른 수직의 분할선인 “절개(dissection)”는 부처에 이르는 길, 곧 ‘참 나’에 이르는 길에 가로막힌 바리게이트 혹은 일종의 경고 표지판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부처의 심상을 소재로 한 이와 같은 스티커 콜라주 작품을 여러 점 제작하였다. 대부분 그 자신의 성장과정에서 배우고 체험한 티벳 전통의 불교 미술과, 후일 영국에서 수업시대를 거치며 받아들인 서구 현대미술이 잘 조화된 독특한 조형 언어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였다.

곤카르 갸초(Gonkar Gyatso, 1961~, Tibet/China)는 1961년 티벳 라사에서 태어났다. 1950년부터 중국 공산당이 티벳을 지배했기에 갸초는 유년 시절을 그 영향 아래에서 보냈다. “집안의 모든 것들이 중국 물건이었으며, 가족 모두가 당의 지도를 엄격하게 따랐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는 19세 때인 1980년 베이징으로 이주한 후 생애의 대부분을 고향인 라사를 떠나서 살았다.

베이징에서 갸초는 소수 민족을 위해 만들어진 교육기관에서 중국 전통 수묵화를 배웠다. 개인적 창의성이나 실험적 시도의 여지가 없는 도제적이고 엄격한 수업과정을 그는 썩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대도시였던 베이징에서 서적을 통해서나마 처음으로 서양의 수많은 근,현대 회화를 접할 수 있었고, 미술관과 박물관도 접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후기인상파, 큐비즘, 유럽의 고전 회화 등을 알게 되었고, 특히 장 프랑수아 밀레, 빈센트 반 고흐,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좋아했다고 후일 회고하였다.

1989년 5월에 중국 사회를 크게 뒤흔든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을 때, 갸초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술회한다. “그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때 나는 완전한 혼돈에 빠졌으며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환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중국 공산당의 제도권 교육에 의해 형성된 그의 정치적 신념 체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그 무렵, 갸초는 우연한 기회에 달라이 라마,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14대 달라이 라마의 육성 녹음 테이프를 접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중국 당국의 냉혹한 감시와 통제를 피해 불법적으로 유통되었던, 참으로 어려운 물건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이야기하는 티벳의 역사와 불교의 정신은 그때까지 중국 공산당에 의해서 교육받아온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눈에 덧씌워진 가리개를 버리고 조국 티벳과 불교의 참 모습을 보기 위해 머나먼 인도의 땅, 달라이 라마의 망명지인 다람살라로 향한다.

티벳인들에게 종교, 즉 불교는 바로 그들의 문화이자 삶 그 자체이며,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삶의 기본 토대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당수의 티벳 망명자들은 고향에서는 찾기 어려운 티벳의 전통을 이곳 다람살라에서 찾는다고 한다. 갸초의 이와 같은 역설적인 디아스포라는 여기 다람살라로부터 시작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에 의해 파괴되는 티벳의 전통 문화와 불교를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해 많은 사찰, 박물관, 연구소 및 공연 예술 기관 등을 마련하였다. 1992년 다람살라에 도착한 갸초는 자신의 일생에 처음으로 이곳에서 불교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또 이곳에서 승려 불교 화가 상가이 예쉬(Sangay Yeshi)를 만나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탕카를 배우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인생을 바꾼 경험이었다. 탕카( , thangka)는 두루마리 형태의 걸개 그림으로 제작되는 불화(佛畵)인데, 우리나라의 탱화와 주제와 형식 그리고 그 용도에 있어서 매우 흡사하다. 사실 이러한 양식의 불화는 특이하게도 전세계에서 티벳과 한국 밖에는 없다. 티벳을 제외한 중국 지역에도 물론 불화가 존재하고 예로부터 전래되기는 하지만, 티벳의 탕카나 우리의 탱화처럼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갖지는 않으며 사찰에 봉안되거나 여러 불교 의식에서 게시되지는 않는다. 갸초가 이 기간 동안 탕카의 수련에서 경험한 종교적, 미적 체험은 그의 작품 세계와 조형 언어를 특징짓는 요소가 된다.

이후 갸초는 런던으로 떠난다. 첼시 예술대학에서 대학원생으로 있던 그는 런던에서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던 많은 경험을 하였다. 도시의 규모나 화려함은 차치하더라도 그때까지 그는 대가들의 작품을 실제로 보지 못하였고, 다만 도록이나 리프로덕션으로만 접했을 뿐이다. 미술관에서 직접 본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제임스 휘슬러, 노먼 록웰, 에드워드 호퍼 등 20세기의 대가 및 명성 있는 현대 작가의 그림들에서 갸초는 큰 감명을 받았다.

영국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1997년 ‘사치 콜렉션’에서 청년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센세이션〉전을 열었고, 이후 형성된 yBa(young British artists) 그룹을 통해 상당수 작가들이 세계적 유명세를 얻는 사건이 있었다. 이 전시를 본 갸초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며, 그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치 전시를 보고 난 이후, 그리고 거기서 받은 문화 충격을 극복한 이후, 나는 어떤 통찰을 얻게 되었어요. 그 전시는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예술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바꿔 버렸어요. 나는 부처라는 주제를 잠시 잊고 실험적인 작업을 시작했어요”

현대 미술에 영감을 받은 갸초는 그 이전까지 자신을 지배했던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사조에 몰입한다.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고자 했던 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나의 정체성 My Identity, 2003〉 연작 시리즈를 발표하여 화단의 주목을 끌게 된다.

티벳인으로 태어나 중국에서 교육을 받고 인도에서 여려 해를 보내다가 현재는 서양에서 작가로서 살아가고 있다. 오랜 피지배의 존재로서, 한때 망명자의 존재로서 그리고 지금은 이방인으로서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어쩌면 갸초에겐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두렵고 때로 모호하고 낯설게 다가오던 삶의 여정에서 끊이지 않던 질문은 그의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그의 연작 〈나의 정체성〉 4컷의 사진에서 갸초는 한 곳에선 티벳 전통 예복을 입은 ‘티벳인’이며, 다른 곳에선 중국 인민복과 붉은 완장을 착용하고 모택동의 초상 앞에 앉아있는 ‘중국인’이다. 다시 그는 망명지 라사에서 난민의 가방을 앞에 두고 탕카를 그리는 ‘망명자’이며, 마지막으로 이케아 스타일의 가구가 놓인 실내에서 팔레트를 들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이다.

이러한 여정 이후 갸초가 제작한 작품이 앞서 언급했던 〈절개된 석가모니불〉이다. 여기에는 어린 시절의 삶과 티벳의 불교문화, 탕카 수업 시절, 그리고 서구사회에서 배우고 익혔던 현대미술과 새로운 사조의 충격, 이 모든 것이 갸초의 내면에 융해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맺어졌다.

가쵸는 이 시대의 티벳과 관련된 문제들을 문화적으로 그리고 복합적인 예술적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특정 종교에 한정되지 않고,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지난 20년 동안 작품의 중심 모티브인 부처의 이미지를 21세기 깨달음의 상징으로 여긴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술가는 부처의 형상을 캔버스처럼 자유롭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며, “부처의 형상을 보여준다고 해서 다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부처는 언제 부처가 아닌가?” 이러한 가쵸의 부처에 대한 생각은 부처란 고정된 형상이 아닌 바로 내면적, 정신적 투영(mental projection)이라고 하는 오랜 불교 사상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

자아의 내면에는 자신의 모든 삶의 경험이 혼재한다. 작가의 디아스포라적 체험은 여기저기 금이 간 항아리처럼 아픔의 무수한 흔적일 수 있으며, 연이은 큰 파도에 밀려 도달한 낯선 해변의 삶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우리 모두는 어쩌면 고향을 찾아 헤매는 망명자다. 망명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티벳의 전통과 동시대 미술 현상이 융합된 특별한 미적 언어로 가득한 갸초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인류의 오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모색의 과정이다.

나의 여행은 길고 무척 먼 길입니다.

나는 이른 아침에 빛나는 햇살의 수레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항성과 유성에 나의 자취를 남기며 광막한 우주로 항해를 하였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가장 먼 길이며,

그 시련은 가장 단순한 가락을 따라가는 가장 복잡한 것입니다.

순례자는 자신의 집에 이르기 위하여

낯선 문마다 두드려야 하고,

마지막 가장 깊은 성소에 다다르기 위해

온갖 바깥 세계를 방황해야 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돌아다니다가 비로소 눈을 감고 말을 합니다.

“당신은 이곳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타고르의 『기탄잘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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