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 황금기 이끈 대표 선지식

남전 보원 선사의 진영.

어느 승려가 남전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평상심이 무엇입니까?”
“졸리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 것이다.”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우면 시원한 것을 먹고, 추우면 불을 쬐는 것이다.”
- 〈전등록〉 ‘남전장’

평상심(平常心). 많이 들어봄직한 단어이고 이야기일 것이다. 이와 똑같은 내용이 〈무문관〉19칙에도 전한다. 조주(778~897)가 스승 남전에게 이렇게 묻는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이에 남전은 “평상심이 바로 도(平常心是道)이다”라고 답한다. ‘평상심시도’는 중국선의 르네상스 시대(조사선)의 캐치프레이즈나 다름없는 사상이다. 깨달아 있는 본래성불된 본각(本覺)에 입각해 있음을 말한다. 본 부처로서 행하고 말하기 때문에 평상의 그 마음이 바로 도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의미이다. 조사선 시대에 가장 중시되었던 것은 인간중심의 사상과 인간의 주체의식이 강조되었는데, 이 인간 중심사고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평상심시도이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언제 어디서나 자기의 주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자각적인 삶을 일구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선문답으로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남전은 어떤 선지식인가?

조주에게 ‘平常心是道’ 전한 선사
조사선 시대 그대로 드러낸 사상
‘본래부처’ 인간적 주체의식 강조

마조 계승하며 자신 선법 구현해
임제종·조동종 더불어 韓불교 영향
사자산문 개산조 철감도윤이 제자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4)은 조사선의 개조(開祖)인 마조(709~788)의 제자이다. 마치 안회가 공자의 총애를 받은 것처럼 남전도 마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점은 다음 〈전등록〉의 일화를 토대로 한다. 

어느 날 서당·백장·남전 세 사람이 마조를 모시고 달맞이를 갔다.
그 때 마조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바로 지금 같은 때에 무엇을 하면 가장 좋겠는가?”
서당지장이 말했다. “공양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백장회해는 “수행하기에 가장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남전만 소매를 뿌리치면서 그냥 가버렸다.
그러자, 마조가 말했다. “경(經)은 서당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백장에게로 돌아가는데, 오직 남전만이 경계에서 벗어났구나.”

여기서 마조는 남전을 가장 수승한 인물로 보고 있다. 〈송고승전〉에는 마조 문하에 서당과 백장, 두 대사가 각립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러나 원판(元版) 〈전등록〉에 와서는 남전이 첨가되어 세 선사가 각립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마조완월(馬祖玩月)’의 기연에도 남전이 첨가된 것은 송나라 때 선의 특징인 대기대용(大機大用)적인 선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138년에 발행된 〈고존숙어요〉에 남전계(남전·조주·자호)를 포함한 것으로 보아 남전의 선풍이 송나라 때에 재평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구입한 소장용 부채.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은 ‘평상심’이라는 글씨를 많이 소장한다.

남전의 휘호는 보원(普願), 속성은 왕(王)씨, 하남성(河南省)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縣) 사람이다. 757년 10세에 대외산(大磐山) 대혜(大慧)에게 수업하고, 777년 30세에 숭산 회선사(會善寺)의 숭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남전은 계율과 경전을 공부하고, 이어서 용수보살의 삼론(百論·中論·十二門論)을 익히며 불법의 현묘한 도리에 심취해 있었다. 이후 남전은 마조선사를 만나 깨달음을 이루었으니, 사교입선(捨敎入禪)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795년 47세에 남전은 안휘성(安徽省) 지양(池陽) 남전산(南泉山)에 들어가 30년간 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은둔하였다. 79세인 827년 지양 선성(宣城)의 겸사(廉使) 육선(陸걙)이 하산해 줄 것을 간청해 산을 내려와서 선풍을 펼쳤다. 이렇게 7년여 간 법을 펼친 뒤 세수 87세, 승랍은 58세로 입적하였다.

남전에 관한 일화는 어록 곳곳에 전한다. 남전의 사상이 드러난 몇 가지만 살펴보자. 남전이 마조 문하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남전이 대중들에게 죽을 급식하고 있는데, 스승 마조가 물었다. “통 안에 무엇이 있느냐?”
남전이 말했다. “이 노인네가 입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하네.”
마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마조록〉  

제자가 스승에게 막돼먹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선문답을 통해 스승과 제자와의 기량이 전개되는 모습이다. 남전이 스승 마조에게 말로서 제압하는 기연으로 보아 마조가 남전의 대기(大機)를 인정한 것으로 사료된다.

남전의 스승인 마조는 제자들에게 ‘즉심시불(卽心是佛)’을 권하며 법을 설했는데, 마조 이후에 즉심시불 사상을 잘못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았다. 곧 즉심시불은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수시(隨時) 방편에 불과한데, 제자들 중에는 이를 집착하고 교조화하였다. 남전은 이런 시류를 비판하였다.        

어느 승려가 물었다. “위의 조사로부터 마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씀하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평상심이 도’라고 하셨는데 지금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마음이 부처가 아니요, 지혜가 도가 아니다’라고 하십니까? 학인들 모두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화상께서 지도해 주십시오.”  

남전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말했다. “그대가 부처라면 다시 의심하지 말 일이지, 다시 내게 물으면서 어디에 그런 옆집의 부처를 의심하는가? 나는 부처도 아니요, 조사를 보지도 못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그대 혼자서 조사를 찾아보아라.”

또한 〈전등록〉에도 앞과 유사한 내용이 있다.

하루는 어떤 승려가 와서 물었다. “지금 화상께서 말씀하시기를 ‘곧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고 해서도 안되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스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대가 ‘곧 마음이 부처다’라고 믿으면 그만이지, 무얼 다시 되고 안 되고를 말하는가? 마치 그대가 밥 먹은 뒤 동랑(東廊)에서 서랑(西廊)으로 가면서 사람들을 붙잡고, 가도 되는지 안되는지를 묻고 있는 것과 같다.”

곧 원래 부처이니, 다시 찾을 것도 없거늘 왜 의심하고 문제를 일으키느냐는 말이다. 즉심시불이든, 비심비불이든 언구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이 부처임을 믿고 수행해 나갈 것을 강조한다. 조사선은 스승 마조에 의해 개창되었지만, 이를 전개하고 발전시킨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남전이라고 본다. 곧 평상심의 선이 한층 진일보되어 일상성의 종교로 전개되었다. 이런 선사상으로 인해 남전 문하에서 배출된 선사들이 간화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 천동사의 ‘즉심시불’ 위패. 남전의 어록을 위패로 만들어 불상 옆에 모셨다.

남전참묘(南泉斬猫)나 이류중행(異類中行, 수행자가 축생 등 중생 속에서 수행하며 교화에 힘쓸 것) 등 그와 관련된 공안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남전은 당시에 독특한 선풍을 펼친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일원상과 관련된 남전의 선기(禪機)가 드러난 내용이다.

남전·귀종지상(歸宗智常)·마곡보철(麻谷寶徹) 세 사람이 함께 남양혜충 국사에게 예를 드리러 가는 길이었다. 남전이 땅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다. “말해보라 그러면 가겠다.”

귀종은 원상 안에 들어가 주저앉았고, 마곡은 허리를 굽혀 여인처럼 절을 했다.
남전이 말했다. “그렇게 하면 가지 않겠다.” 
귀종이 말했다. “이게 무슨 마음인고.”

이 일화는 〈전등록〉뿐만 아니라 〈벽암록〉 69칙에 ‘남전일원상(南泉一圓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남전에게 독특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그는 마조 생전에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둘째는 마조의 선법을 계승하면서도 독특한 선법을 형성하고 있어서 임제종계 뿐만 아니라 조동종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널리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조동종의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가 출가해 의지한 선사가 오설이다. 오설 선사는 양개의 근기가 수승함을 느끼고, 그를 떠나보내면서 “바른 깨달음을 얻으려면, 남전화상에게 가서 배우라”라고 하였다. 또한 당시 선사들 중, 수행이 잘 되지 않으면 남전을 찾아간 이들이 많이 있다.    

남전 문하에 수백여 명의 제자들이 있었으며, 신라 사자산문(獅子山門)의 도윤(道允)도 포함된다. 남전 문하를 대표하는 제자로는 장사 경잠(長沙景岑, ?~868)·자호 이종(子湖利?, 800~880)·조주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 지역에서 선풍을 드날린 인물들이다. 

경잠은 어려서 출가해 남전 문하에서 수행한 뒤, 그의 법을 받았다. 경잠은 호남성 장사 녹산에서 선풍을 전개하며,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화두로 널리 알려진 선사이다. 백척간두란 수행해서 오르고자 하는 절대 경지를 뜻한다.

최고의 경지인 백척간두에 올라 혼자만의 적정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 중생을 제도한(進一步)는 뜻이다. 중생들 삶속에서 도를 추구했듯이 경잠의 공안에서 남전의 이류중행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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