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사·마곡사, 등재 기념 학술대회 잇달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을 기념하며 각각 산사들의 위상과 가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사진은 안동 봉정사 만세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등재 1주년을 기념해 각각 산사들의 위상과 가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봉정사·유림 교류 양상 분석
조선 儒者들 독서공간 각광
‘천등’ 중심 스토리텔링 필요
능인대사 천등굴 보존 시급해


조계종 천등산 봉정사(주지 도륜)는 7월 19일 경내 설법전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봉정사의 가치와 기록’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학술대회는 안동시와 경상북도가 후원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유교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안동과 봉정사의 관계를 살피는 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황만기 안동대 퇴계학연구소 학술연구대우교수는 ‘봉정사 관련 시문에 나타난 선비들의 교류 양상’을 통해 조선시대 유림(儒林)이 봉정사를 통해 어떻게 교류를 했는지를 살폈다.

황만기 교수에 따르면 봉정사와 관련 깊은 조선 유학자는 단연 퇴계 이황(1501~1570)이다. 퇴계는 16세(1516)에 숙부 송재 이우의 권유로 봉정사에서 독서를 한다. 1515년 송재는 안동부사로 부임했고 자신의 아들 이수령과 조카 퇴계를 위해 1516년 가을 독서 공간인 애련정(愛蓮亭)을 건립했다. 퇴계는 1516년 봄부터 가을까지 봉정사에서 독서를 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이후 퇴계는 50년 뒤인 1566년에 다시 봉정사를 찾게 된다. 그는 그해 1월 조정의 부름을 받고 한양으로 가던 중 병환으로 사직소를 올린다. 하지만 윤허되지 않자 광흥사, 봉정사 등으로 처소를 옮기며 소를 계속 올리게 된다. 퇴계는 봉정사에 머물며 제자 금계 황준량의 문집 〈금계집〉을 교정했고, 남쪽 골짜기의 낙수대를 명옥대로 개칭했다.

퇴계는 봉정사를 독서의 공간으로 사용했지만, 그의 사후에는 퇴계를 기르는 기념공간이 된다. 실제, 약포 정탁·송암 권호문 등 많은 유학자들이 봉정사에 들러 퇴계가 읊은 봉정사 서루 시에 차운하거나 명옥대 시에 차운하면서 퇴계를 추념했다.

황만기 교수는 “이때부터 봉정사는 불교 문화가 유교 문화로 변질되는 양상을 띠었다”면서 “이동표와 정필달은 퇴계를 봉황으로 비유해 퇴계가 이곳에 머물러 봉정사가 됐다고 하며 봉정사를 불교 공간이 아닌 유교의 공간으로 인식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안동 인근에는 맹사성이 공부하던 개목사, 퇴계 부친과 숙부가 독서하던 용수사 등 사찰 외에 유교 공간으로서 함축성이 강한 사찰이 여럿”이라며 “이들 사찰에 대한 연구를 확대한다면 불교 공간 속에 내재된 유교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호림 안동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봉정사 설화를 활용한 스토리텔링 전략’을 통해 봉정사 창건 설화의 양상을 파악하고 이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의 방향성을 모색했다. 그는 봉정사의 창건설화가 ‘천등’과 ‘봉황’의 두 층위로 나뉘며, 새로운 담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천등’에 무게중심을 둘 것을 제언했다.

신호림 교수는 “‘천등’은 봉정사를 창건한 능인대사의 깨달음을 의미하며 그 깨달음을 얻은 공간인 천등굴은 봉정사의 기원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라며 “기원에 대한 기억은 봉정사의 신성성을 담보하며 그곳에서 내려온 천등에 주목했을 때 그 빛을 품어주는 봉황의 이미지까지 포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을 기념하며 각각 산사들의 위상과 가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잇달아 열렸다. 사진은 공주 마곡사 전경.

조선 궁궐서 사용한 ‘청기와’
마곡사도 확인돼 관계 주목
후사 기원 정조와 인연 추정

이에 앞서 공주 태화산 마곡사(주지 원경)는 7월 10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등재 1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조선왕실과 마곡사의 관계를 조명하는 논문이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조원창 한얼문화유산연구원장은 ‘마곡사의 가람배치와 조선 국왕과의 관련성 검토’를 통해 마곡사 대광보전 청기와와 조선 궁궐의 관계를 조명했다.

조원창 원장은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경복궁, 창덕궁, 원각사 법당 등 소수의 유적지에서만 청기와가 검출됐다”면서 “궁궐의 경우도 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정전과 편전에서만 청기와가 확인됐다. 청기와의 장식·장엄성 이외에도 권위의 상징을 내포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 기와에 사용된 청색안료는 중국에서 수입했을 정도로 귀했고, 이런 이유로 청기와를 사용한 사찰은 충남에서 마곡사, 갑사 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럼에도 마곡사 대광보전 용마루에 청기와가 사용됐다는 것은 마곡사와 조선왕실의 긴밀한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단초라는 게 조원창 원장의 주장이다. 또한 마곡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일월오악도’의 존재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

조원창 원장은 “조선시대 궁궐이나 왕의 야외행차 때 설치하는 상징물인 일월오악도는 청기와와 더불어 마곡사와 국왕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 자료”라고 설명했다.

또한 조원창 원장은 마곡사와 관계된 국왕은 정조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그는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농산·체규·계일 등이 천일기도를 통해 순조 탄생을 기원한 것과 연관된다”면서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에도 ‘국가를 위해 바친 정성이 극진해 국가에서 보답이 내려졌다’는 구절도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