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 순례길 넘어 보리도량 이르다

엔코지서 인연된 홋카이도 콤비
함께 마츠오 도게를 넘는 고행
꼭대기에 자리한 대사당서 예불
고개 넘으니 ‘보리도량’ 에히메현
오늘도 걸으며 내 수행 점검한다

마츠오 도게 순례길 옆에 세워진 순례자의 무덤. 약 300년 전의 무덤이다.

노숙을 하는 날은 으레 새벽 한기에 등이 시려 눈을 뜨게 된다. 아직 가시지 않은 졸음을 붙잡고 침낭 속에서 꾸물대다 부스스 일어난다. 잠시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니 어제의 작은 순례자 마을이 아직 건재하다. 알 수 없는 고양감에 허허 웃고 있으니 여기저기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난다. 마을이 깨어난다.

순례자들이 노숙한 휴게소 주변으로는 고요한 새벽이다. 하나 둘 일어난 순례자들이 텐트를 접거나, 배낭을 싸는 등 서로 분주하다. 어제 인사를 나눈 순례자들끼리 어디로 향할지를 묻는다. 어젯밤 소시지를 나눠 먹었던 순례자가 말을 걸어온다.

“좋은 아침! 박 상은 오늘 어디로 가는가?”
“오늘 중으로 40번 사찰을 참배하려 합니다. 옛 순례길을 따라 고개를 넘을 겁니다.”
“그래? 나랑은 다른 루트로 가는군요? 난 국도를 타고 우회합니다.”

몇몇은 국도로 우회하고, 몇몇은 이제야 39번을 향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고개길을 넘는 건 나와 홋카이도 콤비 뿐 이었다.

“앗! 박 상도 고갯길인거야?”
“코에이씨도? 오늘도 하루 종일 말하겠네요.”
“왜 그래. 여행은 길동무라잖아?”
“아이고 부처님!”

배낭을 모두 싸고, 어젯밤 잠들었던 벤치에 앉아 아침으로 미숫가루를 풀어먹는다. 홋카이도 콤비는 텐트를 치고 다니기에 정리에 좀 더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한 사람은 텐트, 한 사람은 식량과 기타용품으로 짐을 나누어 들고 다녔다.

다들 잠자리를 정리하고선 아침을 먹는 모습이다. 모두 다른 출발시간, 다른 루트로 저마다의 순례를 오늘도 시작한다. 39번 엔코지로 향하는 사람들이 먼저 떠나고 나서 나도 일어선다. 아직 밤의 시원함이 남아있는 아침 7시, 떠오르는 아침 해의 열기를 등에 짊어 매고서 나아간다.

마츠오 도게(松尾峠) 고개를 넘는 순례길은 에도시대부터 이어져온 옛 순례길이다. 거기에 예로부터 공식 교통로로 쓰인 가도(街道)였기에 고갯길임에도 돌로 포장이 되어 있다. 잠깐 국도를 따라 걷다가, 옆으로 빠져나와 3km가량 마을길을 걸어 고갯길 입구에 들어선다. 입구에는 예로부터의 순례길이자 가도였다는 설명 표지판이 덩그러니 서있다.

고갯마루까지 거리로는 1km를 조금 넘는 짧은 구간이지만, 워낙 가파른데다가, 옛날의 돌 포장이 좁고 미끄러워 걷기가 힘들다. 모두가 구슬땀을 흘리며 땅만 보며 걷는다. 결국 코에이씨가 한마디 한다.

“아니. 명색이 가도라면서, 왜 이렇게 힘들게 길을 닦은 거야?”
“아까 표지판 보니 이 길이 전략적으로 중요해서 외침을 막으려고 이리 했답니다.”
“우리가 시코쿠를 정복하러 왔나? 부처님 보러 왔지. 순례자를 괴롭히다니 무슨 악업이야!”

편하게 갈 수 있는 국도가 있지만, 이렇게 험한 고갯길을 선택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고갯길이 전통적으로 수행의 도량인 고치현과 보리(菩提)의 도량인 에히메현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1시간 남짓 고생 끝에 오른 마츠오 도게. 스쿠모시를 바라보며 탁트인 고갯마루에는 작은 대사당이 있었다. 앞의 설명문에는 에도시대에 세워진 대사당이 소실됐고, 후에 지역민들이 역사를 잇는 마음에서 작게 재건했다고 쓰여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코보 대사상이 마을을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모셔져 있었다.

모두 배낭을 내려놓고선 합장을 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개경계(開經偈)부터 읊었다. 반야심경으로 예불을 모시고 회향문까지 모두 마치자 서로 마주보고 합장 반배한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코쿠 순례를 한지 한 달 가까이 다 되어 가니, 다들 예불이 몸에 익은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걸 보곤 서로 너털웃음을 짓는다.

“박 상 어느 일본 사찰에서 배웠어요? 독경 잘합니다.”
“아이고, 문 앞의 동자승이라잖아요!”
“문 앞의 동자? 이참에 확 일본에서 출가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마츠오 도게 정상 경계석비. 여기서부터 에히메현이다.

한국에서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한다. 일본에선 같은 의미의 속담이 ‘절 문앞 동자승, 안 배운 경을 읊는다’이다. 대사당의 문을 다시 닫아두고선, 고개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힌다. 어깨를 풀며 서성이니 대사당 조금 아래에 사람 키만 한 석비가 하나 서있다.

“이곳에서부터 서쪽은 이요국(伊豫國), 우와지마(宇和島)번의 지배지.”

드디어 시코쿠 순례의 세 번째 현, 보리의 도량 에히메(愛媛)현에 들어선 것이다. 길고도 길었던 고치현이 여기서 끝났다. 뭔가 머쓱해져서 석비를 한참이고 바라봤다. 과연 내가 지금껏 걸어온 순례길과 나에게 선의를 베풀어준 모든 분들에 대해 과연 내 수행은 충분했을까? 과연 보리의 도량으로 들어서기에 알맞을까? 답을 알 순 없지만, 그래도 나아갈 수 밖에.

고개를 내려가기 전 오늘은 어디까지 갈 것 인지 다 같이 상의했다. 40번 사찰 간지자이지(觀自在寺)까지는 약 14km. 3~4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 하루를 마치기엔 조금 짧다. 그렇다고 더 나아가자니 숙박할 장소가 애매했다. 잠시 생각하다가 걷는 속도를 늦춰 40번 간지자이지에서 하루를 마무리 하고, 그곳의 츠야도에서 묵기로 한다.

올라온 길에 비해서 내려가는 길은 수월했다. 길도 조금 넓게 닦여 있었고,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아 금방 내려 갈 수 있었다. 산길을 벗어나 차도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순례길을 따라 멀리 흰 깃발이 펄럭이는 건물이 보였다. 일반 상점으로 생각하고 무심코 지나가려는데 할머니 한 분이 손을 흔들었다.

“순례자 분들! 여기에요! 여기로 오세요!”

그리곤 건물을 향해서 “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무슨 일인가 하고 서둘러 가보니 순례자들에게 보시를 하는 ‘셋타이쇼(接待所)’가 세워져 있다. 하얀 깃발들 마다 ‘순례자 접대소’·‘나무대사변조금강’이라고 적혀 있다. 배낭을 내리고 앉으니 곧바로 시원한 보리차가 나왔다.

“순례하는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오늘이 오셋타이 하는 마지막 날인데 정말 다행입니다.”

차를 내온 할머니는 지역 부인회에서 매년 2차례 봄·가을에 셋타이쇼를 개장한다고 소개했다. 잠시 뒤 한사람씩 작은 접시에 주먹밥과 반찬 몇 가지로 요깃거리가 나왔다. 할머니들이 주먹밥은 얼마든지 있으니 넉넉히 먹고 가라며 권했다.

“세 명 모두 고개를 넘어오셨나 보네요. 일행인가요?”
“아니요, 엔코지에서 길동무가 됐습니다. 오늘은 40번 간지자이지까지 갑니다.”
“오늘은 멀리까지 안가시네요, 보통 이 시간대에 넘어오는 순례자들은 더 간다고 이야기해요”
“네, 어제 노숙을 한데다, 아침부터 산을 넘었더니 지쳐서요.”

맛있게 아침 겸 점심을 받아먹는데 코에이 씨의 입담이 또 빠지질 않는다.
“오늘은 무슨 복입니까. 이렇게 예쁜 누님들이 밥을 해주시고! 시집가셔도 좋겠습니다.”
“아이고, 젊은 분이 농담은! 우리 영감이 아직 살아있는데 무슨 시집이람.”
“벌써 임자가 있으셔요? 아깝네요. 제가 30년만 늙었어도 모셔가려 했습니다.”

즐거운 이야기에 할머니들이 꼭 소녀같이 웃으시며 좋아하신다. 무슨 입담이 이리 좋나 해서 나중에 물어보니 홋카이도에 있는 노인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다 보니 느는 게 어르신들과 노는 기술이라며 웃으며 말했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저 멀리 다른 순례자들이 오는 게 보인다. 슬슬 자리를 비워드려야 할 거 같아서 짐을 메고 일어선다. 연신 고개를 숙여 후한 오셋타이에 예를 표하고 걸어간다. 40번까지는 13km 남짓. 이어지는 길은 큰 고개 없이 평탄한 길이니 4시간 정도 부지런히 걸으면 도착할 듯했다. 다만 너무 일찍 도착하면 츠야도에서 묵는 것이 거부될 수 있으니 오후 3시쯤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다리를 일부러 질질 끈다.

보리의 도량이라는 에히메현. 시작부터 좋은 인연과 일들로 순례길이 열린다. 과연 시코쿠의 세 번째 도량에서 나는 어떤 보리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무엇인가 바라고 걷는 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달라지는 내 모습을 바라며 오늘도 한 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TIP.

예쁜 '누님'들이 만들어준 주먹밥.

- 국도를 타고 우회하는 길이 매우 잘 닦여 있어 최근 많은 순례자들이 국도를 선택한다.
- 마츠오 도게 위의 대사당에서도 2인 가량 노숙할 수 있다. 단 식수가 없으니 주의 할 것
- 40번 간지자이지는 츠야도와 슈쿠보 둘 다 운영하며, 슈쿠보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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