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내 안의 천사·악마 만나기

누구나 갖춘 내면의 선한 의지
인식하지 않았을 때 펼쳐진다
방어논리로 감춰온 악마 모습
인연 소중히 여기려 돌아본다

선한 의지를 찾아서
있기는 한 걸까. 우리가 알고 있는 천사(天使), 없다. 어릴 적 동화 속에서는 그렇게나 흔했던 천사가 어른이 돼가는 동안 씨가 마른 게 아닐까. 천사 이야기는 내 생애 속에서 미확인 비행물체가 되었다. 천사의 존재를 믿었던 시절, 나는 미확인 비행물체도 믿었었다. 언젠가는 천사도 내 손으로 만져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천사는커녕, 천사를 믿었느니 마느니 하는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이제 천사는 아파트 1004호 현관에나 붙어서 어릴 적 꿈을 싱거운 우스개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나 싶다. 건조한 날에는 살갗에 희끄무레한 살비듬이 일어날 만큼 살았다. 살아온 만큼 상상이나 감성의 샘도 말라붙었다.

상상력은 감성의 습도에 비례하나보다. 삶의 곳곳에서 끈적거림이 사라져간다. 어느 날 통화하던 친구가 그랬다. “목소리 갈라진 것 같은데 컨디션 괜찮아?” 꽃밭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치게 되고, 상가(喪家)에 가서도 친구 만난 기쁨에 비시시 웃음이 새어나오는 눈치 없음. 물난리 장면이 넘실대는 TV 화면 앞에서도 혀끝 한 번 차지 않고 멍하니 지켜보는 불감증. 아이쿠 이런. 내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뒤늦은 각성. 자기 연민.

정말 없었을까. 언젠가는 당신 주변 어딘가에도 흰 날개를 펼쳤을 하늘의 심부름꾼. 잘 더듬어보면, 아주 없진 않았다. 길에서 울고 있는 서너 살짜리 아이를 보고, 아이쿠 저걸 어떡하지? 하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흰 날개를 펼쳤던 것 같다. 아무 대책도, 그 꼬맹이를 도와줄 말 한마디 준비 못했지만 아무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무릎을 접었다. ‘우리 꼬마 아저씨, 혼자 있구나. 엄마는 어디 갔어?’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눈빛을 보아하니, 엄마는 멀리 간 것 같진 않다. 잠시 코앞에 있는 편의점에 갔거나 약국에 갔으리라. 그렇지만 당신은 꼬맹이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선의의 날개가 이미 펼쳐져 있다.

살다보면 가끔 동화 속 천사가 내 안에서 날개 펼친 순간이 있다. 타인에 대한 선한 의지. 돕고자 해서 도운 게 아닌, 그냥 본능적 날갯짓 같은 선의(善意)가 흰 우산살처럼 펼쳐질 때가 있다. 몸이 따르지 않더라도, 마음만으로도 그런 일들이 생긴다. 천사는 그렇게 당신 내면에 있다. 그러니 아직 시력도 체력도 지력도 갖추지 못한 어린 시절엔 내면 깊은 곳에 접혀 있는 흰 날개를 발견할 수도 없었을 터. 그래서 먼 하늘에 있겠거니 하면서 두리번거렸던 것일까. 이제라도 내 안에서 찾아보자. 어쩌면 나는 지금 천사일지도 몰라. 이런 나를 발견해주는 일 자체에도 선한 의지가 녹아 있으리라.

- 이미 하고 있거나 언젠가는 하고 싶은, 타인 돕는 일을 적어보라. 가급적이면 구체적으로 적는다.

- 내면의 천사가 속삭이는 말이 있다. 비록 지금은 실행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하리라 하는 선량한 속삭임. 스스로 민망하여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하지만, 반드시 하리라 싶은 일 혹은 말을 드러내본다.

- 내 생애, 기억속의 감동적인 장면, 경험, 생각, 상상 등을 그림 그리듯이 써본다. 시나리오처럼 대화 형식으로, 만화의 콘티처럼 간결하게, 낙서처럼 생각나는 대로 적어도 좋다. 형식은 자유!

아무리해도 내면의 선한 의지를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소위,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다보니 누군가를 돕는다는 일이 남의 일 같기만 했다. 내가 누군가를 돕다니. 그럴 일 없어. 나 살기도 바빠 죽겠어.

이를테면 소매치기 아빠가 오늘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면서, 스스로 선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긴 어렵겠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어린 딸로서는 아빠야말로 유일한 천사다. 사회적으로는 범죄자지만 딸에게는 천사다. 당신이 지금 무엇이고 무슨 행위를 했건, 존재 차제로 천사인 것은 당신에게 친족이 있고, 이웃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군가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친족과 이웃 속에서 당신은 그저 마른 나무처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천사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내가 천사를 만나지 못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내면의 선한 의지, 내면의 흰 날개는 누군가를 의지할 때 펼쳐지는 것이 아니구나. 누군가가 내게 기대올 때, 누군가가 나를 부를 때, 119 앰뷸런스처럼 발동한다. 알고 보니 나는 당신에게 의지하여, 천사다.

마음속 흉터와 이별하기
가정폭력피해여성 집단에서 이런 제안을 해본 적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욕설을 백지에 한번 적어보세요.” 그 순간, 난감해하는 표정들이 떠오른다. “난 욕설을 잘 모르는데.” “그렇다면, 자신이 이제까지 들은 욕설을 적어보시겠어요?” 처음에는 주저하거나 막연해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끄적이기 시작한다. “시간을 넉넉히 갖고, 기억나시는 대로 적어보세요.” 한동안 시간이 지나면, 백지 앞면도 모자라 뒷면으로 넘기는 사람이 생긴다. 적으면서 표정이 일그러지거나 조용히 눈자위의 눈물을 지우거나, 깊은 한숨을 내 쉬기도 한다. “아유, 더 이상 못 적겠어.” 적던 펜을 탁, 내려놓는 사람도 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물었다.

우리는 왜, 내가 알고 있는 욕설을 적으라고 할 때는 적을 수 없었는데, 내가 들었던 욕설을 적으라니까 술술 적게 될까요?”

알고 있는 것하고 들은 것하고는 다르니까요. 정말 들은 욕설은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해요. 적다가 너무 참혹해서 다 적지도 못했어요.”

, 그렇다면 지금 백지에 적은 욕설은 누가 적으신 거죠?”

내가. , 그러니까 이것도 이제 알고 있었던 거네.”

내 안에 이런 욕설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는 경우와 내 의식 안에 험악한 욕설들이 장전돼 있음을 아는 경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힌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인생수업>이라는 저서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말이다. 언젠가 자신의 몸과 귀를 통해 나의 내면에 서식하게 된 욕설이 있음을 알고, 스스로 그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조건에 따라 그 욕설을 내지르기 십상이다. ?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주도권이 내게 없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양치기 목동이 없는 양떼 상태다. 글쓰기로써 그 욕설을 드러낸다는 것은 나의 내면에 그런 욕설이 있음을 알게 되는 사건이다. 당신은 이제 그 욕설을 양치기처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의 악마. 온몸이 끈적한 점액질로 가득하고, 표정은 일그러지고, 송곳니가 길게 뻗은 얼굴로 상징되는 캐릭터. 그런 불쾌한 것들이 나의 내면에 있을 리 없어. 당신도 같은 생각인가. 우리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자기변론의 대가로 성장한다. 나는 그런 사람 아냐. 나는 당신하고 달라. 당신이 그러니까 나도 그런 줄 알지? 자기변론의 방어막은 각자 삶의 기억 혹은 상처에 따라 두텁거나 얇다. 두텁든 얄팍하든, 자기 안에 험악한 욕설이나 살의, 저주, 배신, 배은망덕, 증오, 욕정 따위가 병기창의 병기처럼 즐비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스로 관리하지 않으니 순간적 상황에 따라 그 병기는 제멋대로 발사된다. 내 안에 방치된 블랙박스 같은 것이어서 그것의 오작동에 대해 속수무책이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행위는 그런 점에서 치유적이다. 내면의 상처를 드러내기 좋은 예술 양식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악마성, 부정성에 대해 깍듯이 예의를 갖춰 이별식을 거행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생리와는 거리가 먼 예술양식을 찾아 많은 사람이 여전히 줄을 잇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시나 소설 속에 치유의 샘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마치 물냄새를 맡은 목마른 포유류처럼 감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인 안도현은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상처와 흉터와 광기와 결핍에 주목하라. 두고두고 치욕스럽게 여기는 것, 감춰두고 싶은 것, 그래 그것을 써라.”

당신은 내 안의 악마성을 떠나보내기 위한 작은 재단 만들기 팁을 하나 얻게 된 순간이다. 굳이 시나 소설을 쓰지 않더라도 아니, 누구나 다 이런 작업 속에서 시나 소설을 건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면서, 자신의 흉터에 주목하게 된다면. 당신은 곧 그 흉터와의 이별을 준비하게 된 셈이다.

- 내가 들었거나,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욕설 적어보기

- 지금도 견디기 힘든 나에 대한 비난, 힐난, 수치심 유발 발언 등을 구어체로 적기

- 세상 모든 존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전제로, 하고 싶은 악마적 행위 적어보기

-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채우고 싶은 , 명예, 사랑에 대해 드러내기

- 스스로에게 악마적 의도로 내지르고 싶은 욕설이나 행위 드러내보기

- 생애 가장 가난했거나 물질적으로 참혹했다고 여겨지는 시기의 마음 드러내기

- 생애 가장 불안, 좌절, 혐오, 슬픔, 분노가 들끓었던 시기의 감정 표현하기

당신은 당신에 대해서 누구인가. 아군인가 적군인가. 내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가 있다. 나는 나에 대해서 때로 피아 구분이 안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를 지켜보는 것과 당신이 당신을 지켜볼 때, 누가 더 친근한 존재인가. 아쉽고 우습지만, 잘 알 수 없다.

생애 인연의 고리를 이어가는 첫 대상이 바로 나라고 하는 물건일까. 이에 대한 정답은? 때로 맞기도 하고 때로 틀리기도 하겠다. 나를 지켜볼 때와 나와 동일시돼 있는 순간이 있으므로. 나는 인연의 고리를 이어가는 첫 대상을 라고 하는 존재에 두고자 한다. 나라고 하는 이 대상의 환심을 사고 싶어하고, 사랑을 주고 싶어하고, 더 알고 싶어하기도 하는 이유다. 내 안의 악마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 또한, 나의 최초 인연을 소중히 여기자는 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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